80화
약속 이상의 돌발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그걸 바라는 마음인지 얌전히 잠만 자길 바라는 마음인지 자신조차 모호할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클라이드보다 먼저 향기가 다가왔다.
자제하지 않고 순리에 맞춰 흘러나오는 향이었다.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숲과 같은 싱그러움이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하긴 구태여 흐름을 막을 이유는 없지. 육체적인 욕구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 한도에서 에디스 역시 그에게 호응했다.
그동안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새까만 어둠의 뭉치로만 보이던 클라이드에게서 차츰 섹시한 얼굴선이 드러났다.
이불을 들치며 신중하게 침대 모서리에 손을 올리는 모습도, 넓은 침대를 신실한 신자처럼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움직임도 낱낱이 보게 됐다.
사각사각 천이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여느 때라면 의미 없는 잡담을 지지배배 떠들어 댔을 것이다. 장난질과 입씨름을 수시로 던지며 받곤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는 쿠션이 많았다. 에디스의 좌우에 여러 개가 있었고 침대 헤드에도 잔뜩 세워져 있었다.
클라이드가 느리게 몸을 눕혔다.
가장 가까운 쿠션을 베개로 삼으며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에디스는 보조 침대에서 베개를 가져오지 그러냐는 물음을 하지 못했다.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딴 건 중요치 않게 느껴졌다. 매사에 빈틈없는 그가 베개처럼 사소한 부분을 놓쳤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누워 있었다. 그리고 에디스는 고집스럽게 천장을 보고 있었다.
고요 속에서 긴 손가락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핫.”
방심한 사이 그가 훅 다가왔다.
손끝으로 에디스의 얼굴을 따라 조심스럽게 선을 그렸다. 이마에서부터 미간을 거쳐 아담하게 솟은 코끝까지. 계속해서 옴폭 팬 인중과 윗입술, 아랫입술.
그녀는 약간 고개를 돌렸다. 실눈을 떠서 몰래 훔쳐보지 않고 편한 얼굴로 비스듬히 바라봤다.
“간지러워요.”
움찔거리는 입술을 그가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잠깐만 더 만질게.”
긴 손가락 끝은 턱의 중심을 지나 목선을 애달프게 건드렸다. 빗장뼈 사이의 우물 굴곡을 넘어 옷자락에서 멈췄다.
피부 세포가 하나하나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그가 닿는 곳에 약한 전율이 일어났다. 손이 떠나고 나서도 느낌이 오래도록 남았다.
그가 진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금빛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태연한 척 감당하기에는 심하게 부담스러웠다.
분명 안색이 달라졌을 텐데, 어둠에 묻혀 홍조가 들키지 않기만을 바랐다.
“침대만 옮겨 자기로 약속한 거 아닌가요.”
에디스는 부러 그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얼굴을 맞대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무 짓도 안 했는걸.”
클라이드의 변명이 맞긴 했다. 얼굴 좀 스친 것이 호들갑 떨 만큼 대단한 스킨십은 아니었다. 그 정도는 다른 때도 종종 해 왔다.
“……졸리네요.”
사실은 잠이 싹 달아나 버렸지만 공연히 핑계를 만들었다.
심장 박동이 매트리스를 울려 그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사납게 쿵쾅거렸다. 이 분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자는 척해야 하나.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하면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누운 자세가 불편해질 때쯤 뒤로 돌았다. 이젠 아무렇지 않겠지. 한결 마음을 내려놓으며 클라이드를 향한 순간, 집요한 눈빛과 곧장 맞닥뜨렸다.
“……!”
“안 자?”
그러는 댁은 왜 이러고 있는데? 그는 당장이라도 에디스를 잡아먹을 듯 강렬한 알파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몸을 뒤척거리느라고 그와의 거리가 좁아졌다. 두 사람의 어깨가 바짝 붙었다.
에디스는 꾸물꾸물 움직여 후진하려고 했다.
그때 클라이드가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이대로 있어.”
“클라이드, 불편하지 않아요?”
“전혀.”
“침대가 이렇게 넓은데 구태여.”
싱글 침대를 써도 될 만큼 밀착할 이유가 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되돌아올 답이 겁나서 그만뒀다.
실컷 고민한 끝에 또 다른 핑곗거리를 떠올렸다.
“한쪽으로 계속 누우면 어깨 결릴 텐데요.”
“그런 걱정까지 해 주는 거야?”
“안 그래도 어깨 넓은 분이…….”
그가 픽 웃었다.
“난 어깨가 넓어 본 적이 없어서요. 옆으로 누우면 더 불편한 건가, 잘 모르겠네요.”
에디스를 지그시 응시하던 그가 이마를 가까이했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제 이마를 툭 갖다 댔다.
손톱만큼의 넓이로 맞닿는 부위가 따끈따끈했다.
숨을 죽이며 그의 체온을 느꼈다. 딱딱한 이마가 부딪혔는데 기분은 왜 몰랑몰랑할까. 잠시 후 한꺼번에 호흡을 내뱉자 그 역시 날숨을 흘렸다.
“내내 이러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맘씨 고운 에디스가 날 걱정해 준다면…….”
갑자기 그가 몸을 들썩였다. 팔을 세우고 무릎으로 지탱하며 일어났다.
팔다리를 네 기둥으로 삼아 에디스의 위로 올라왔다.
“앗!”
다음 순간, 그가 멀어졌다.
에디스를 타고 건너편으로 넘어간 것이다.
기겁했던 행동이 민망할 만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체 저는 뭘 기대했던 건지.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돌아누웠어. 됐지?”
클라이드의 눈매가 근사하게 좁혀들었다.
그에게 잔뜩 묻은 미소가 얄미웠다. 왠지 에디스의 속을 간파한 것 같았다.
“칫, 못됐어요.”
잠깐 째려보고 나서 등만 보여 줬다.
그가 에디스를 당겨 안았다. 이번에는 틈 없이 두 사람이 비슷하게 몸을 구부렸다. 그녀의 정수리에 온온한 입바람이 지나갔다.
클라이드의 한숨이 따뜻했다.
“이대로만 지내면 좋겠다.”
“…….”
“에디스 어디 가지 말고. 아무 탈도 생기지 말고.”
“…….”
“더 바라는 거 없으니, 이대로만.”
이 이상 바라지 않겠다는 희망이 그녀의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 * *
국정 회의장은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황실과 귀족파 간에 불화의 골이 깊어져 갔다. 클라이드가 황태자로서 힘을 키우며 귀족과 대립하는 것이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었기에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이번 국정 회의는 특히 그가 칼을 갈고 나왔다.
그동안 모은 자료를 도구로 삼아 드세게 회의 구성원들을 압박했다. 클라이드의 손에는 우시장에서 체포한 노예상에 관한 문서가 들려 있었다.
“노예가 제국으로 유입된 경로가 확실한데 발뺌할 셈인가. 디트리안 경 소유의 배에서 절반, 그레이브즈 상회의 배에서 절반. 항구에 증인이 넘쳐나더군. 노예상들도 자백했고 말이네.”
디트리안 백작이 뻔뻔스럽게 고개를 쳐들었다.
“책임감 없이 말을 내뱉는 무지렁이들을 증인으로 채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노예상은 고문이라도 당한 거 아닙니까? 없는 사실을 지어내서 자백하다니요.”
“그대들의 배를 수색하겠네. 배 안에 증거가 가득할 테지.”
“죄 없는 저를 너무 몰아붙이시는 건 아닙니까. 아무리 전하께서 뜻한 바가 크다고 한들, 정도를 지나치면 화근이 됩니다.”
“무슨 화근? 그대가 나를 해할 궁리라도 하는 중인가 보지?”
아차 하면 회의장에서 멱살잡이라도 할 기세였다. 말려야 했다.
클라이드의 뒤에 있던 에디스가 작게 말을 건넸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그가 서늘한 눈초리로 회의장에 늘어선 귀족파를 노려봤다.
명백한 사실을 두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디트리안 백작의 행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건 절대 용서를 빌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렇다면 이후로는 실력 행사밖에 남지 않는다. 클라이드는 무력으로 백작과 공작을 제압해야 한다. 경찰을 동원하거나, 심하면 군대까지 파견할 수밖에 없다. 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한 후 죄에 알맞은 형에 처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귀족파 패거리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는가. 국정이 혼돈으로 치닫게 되는 지름길이다.
클라이드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에디스의 말대로 되겠군.”
원작 소설을 알려 주던 당시에 그녀는 줄거리에 위기가 있다고 얘기했다. 황태자가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제국을 크게 휘청이게 만든다고 했다. 이를 극복하게 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아드리안이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위기만 닥치고 해결은 되기 힘들 듯했다.
클라이드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회의 구성원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부지런히 눈치 봤다.
“이 사건은 법정으로 보내겠네. 피고가 될 두 사람은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걸세.”
다른 자료도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번에는 총사 대회와 관련한 건이었다. 거론하기에는 조금 늦었지만, 한꺼번에 귀족파를 공격하기 위해 남겨 둔 부분이었다.
그는 다빌 자작을 앞으로 나서게 했다. 자작은 원래 국정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는데 미리 소환 연락을 받았다.
“총사 대회 당시에 선수들이 암살당했더군. 그 배후는 다빌 자작이고 말이지.”
“전 그런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간신히 달아난 선수들이 내 보호 아래에 있네.”
이후로 갖가지 증거와 증언을 늘어놨다. 하지만 다빌 자작 역시 법정에 서든 말든 배 째라는 식으로 우겨 대기만 했다.
클라이드는 골머리를 잡았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시내에 사기 도박장이 있다고 해서 한번 들러 봤는데…….”
“저도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못된 놈들의 버릇을 고쳐 주셨다고요.”
웬일인지 빅토르 백작이 반색하면서 나섰다. 정작 나랏일과 크게 상관이 없는 일개 도박장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다. 주변에서 말을 거들자, 도박장 주인인 제임스는 순식간에 사형에 처해 마땅한 놈이 되고 말았다.
“물론 나도 중형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대들의 발언은 참 의외로군.”
“제국민을 현혹하는 자는 하루빨리 세상에서 없애야 합니다.”
그들의 저의가 어렵지 않게 읽혔다. 꼬리 자르기구나. 클라이드는 귀족파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 단계에 있는 제임스가 내쳐졌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흠, 글쎄. 취조할 게 아직 남아서 말일세.”
장시간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지만 남은 건 깊어진 갈등의 골뿐이었다.
누구도 죄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 내버려 두면 더 기고만장해질 테고, 무력으로 찍어 누르면 원작 소설과 비슷하게 흘러갈 듯했다.
클라이드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 * *
“수고들 하셨습니다.”
디트리안 백작이 건배를 제의했다. 모임에 참석한 모두가 잔을 들었다. 함께 싸운 전우처럼 서로를 위로하며 술을 들이켰다.
“짜증 나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를 잡아 가두려고 아주 독이 바짝 올랐더군요.”
“황태자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지요.”
“쯧쯧, 정신 좀 차려야 할 텐데.”
실컷 황태자 욕을 해대는 틈틈이 각자 대처를 잘했다며 칭찬도 했다. 여러 귀족이 모여 뒤풀이하는 자리는 거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회의에서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부분에 관해서도 얘기가 오갔다.
“제임스를 빨리 사형대에 올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황태자가 털어서 너무 많은 자백을 받아 내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취조하는 자 중에 우리 편을 넣어 놨습니다. 아마 횡설수설하는 자백문이 나오게 될 겁니다.”
“호오, 디트리안 백작. 수완이 아주 훌륭하십니다.”
그들은 줄기차게 공세를 가하는 황태자를 어떻게 막아 낼지 술잔을 기울이며 장시간 논의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독립에 관한 화두가 다시 올라왔다. 호기에 넘쳐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자는 얘기가 진지하게 오고 갔다. 황제를 누구로 추대할지 다들 심각하게 고심했다.
페이튼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국정 회의에서와 모임에서 내내 과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러분의 진심을 저 역시 공감합니다. 그리고 저를 황제로 꼽아 주시는 분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짤막하게 호흡한 후, 페이튼이 청중을 사로잡듯이 주위를 빙 둘러봤다.
“제가 황제로 추대하고 싶은 분은 따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