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79)화 (79/129)

79화

새로 생긴 도서관은 개인용 아지트처럼 아담하고 아늑했다.

황태자 궁의 명화 갤러리 옆방으로, 가장 해가 잘 들고 조용한 장소였다.

사방을 빙 둘러 세운 책장에는 로맨스 소설만 채워져 있었다. 가운데의 널찍한 테이블도 마음에 들고, 편한 의자와 함께 열댓 개쯤 되는 쿠션도 좋았다.

휴식 목적으로 만든 공간은 아니지만 잠깐 앉아 있어도 저절로 몸이 늘어졌다.

에디스는 일일이 소설을 읽어 가며 자신의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대목을 찾았다. 필요한 내용을 곧바로 기억해 둘 자신이 있어서 따로 메모하지는 않고 책갈피만 끼워 뒀다. 머지않아 몇 권의 소설에 팔랑거리는 책갈피가 잔뜩 붙었다.

‘세계관은 비슷한 게 제법 많네. 장르나 설정은 제각각이고.’

어쨌든 공통적으로 현실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에디스는 잠을 쫓으려고 커피를 끊임없이 홀짝였다.

그런데 달고 따뜻한 맛이 도리어 졸음을 부추겼다. 카페인의 힘보다는 배 속이 포근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앞섰다.

쿠션을 끌어안고 책장을 넘겼다. 하필이면 쿠션에 말린 라벤더 향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수면에 도움을 주는 꽃냄새였다.

어느새 그녀는 쿠션을 베개 삼아 테이블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아무도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이가 없었다. 이곳은 클라이드와 에디스, 그리고 특별히 허락된 소수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무방비하게 엎드린 등 위로 노란 햇살이 덮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햇살이 어깨를 지나 의자 뒤로 넘어갔다.

“에디스?”

그녀를 부르는 음성이 작았다.

“……?”

미동조차 없는 걸 보고 발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날씬한 손목이 에디스의 굳게 닫힌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숙면을 취하는 중이라는 걸 확인한 후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긴 보라색 머리가 테이블에 흘러내렸다.

“잠들었네.”

아드리안이 눈꼬리를 어여쁘게 휘어 웃었다.

소리 나지 않게 의자를 들어서 가까이 붙였다. 의자 끝에 걸터앉자 두 사람의 무릎이 닿을락 말락 했다. 턱을 괴고 그녀의 코앞에서 빤히 바라봤다.

이만큼 가까이에 있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지는구나.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려는 것처럼.’

그는 넋을 놓고 잠든 에디스를 바라봤다.

될 수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를 바랐다. 에디스가 많이 피곤해서 오래 잤으면 좋겠다. 깨어날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길 기원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접으려 한다고 쉽게 접힐 리가 없었다.

바람이 간절할수록 마음은 더 짙어질 뿐이었다. 당분간 만나지 않으면 무던해지려니 싶을 때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다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에디스, 나 그냥 관둘까 해.’

너를 접으려는 걸 관두려고.

어떻게든 되겠지. 에디스가 훗날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면 저절로 포기하게 되려나.

그때까지 그저 담담히 마음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아드리안의 소원대로, 도서관의 공기는 제법 긴 시간 동안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고요를 깨며 클라이드가 나타났다.

클라이드는 아드리안과 에디스의 간격이 아주 좁다는 걸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저는 바로 옆에서 턱을 괸 자세대로 꼼짝도 안 했다.

“이리 나오게.”

참다못해 클라이드가 한마디 했다.

목소리가 도서관에 울려서인지, 아쉽게도 에디스가 눈을 떴다.

“클라이드……. 아티도 왔네.”

“곤히 자길래 잠깐 기다렸어. 많이 피곤했나 봐?”

“어제 못 자서.”

“그랬구나.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어야겠네.”

거절당한 관계지만 친구라는 명분이 있으니 여상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자신이 질척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에디스를 끊어 내지 못했다. 친구라도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아드리안, 조금 비켜 주겠나.”

클라이드의 태도가 단호했다. 아드리안은 의자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에디스는 마른세수하면서 잠들었던 티를 서둘러 지웠다. 기지개를 크게 켜고 제 볼을 주물주물 당겼다.

“아티한테 못 볼 꼴을 보여 준 것 같네.”

“아니야. 아무것도 못 봤어. 나는 책 보고 있었어.”

클라이드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오늘은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아드리안을 불렀네. 이제부터 할 얘기는 극비 사항이네. 꼭 비밀을 지켜 주길 바라네.”

아드리안과 에디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끊는 게 목적인 듯 말투가 경직되어 있었다.

에디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정리했다. 쿠션을 치운 후 읽던 소설을 앞으로 당겨왔다.

“내가 얘기할게요.”

그녀와 관련이 있는 소설을 절판된 것까지 구하려면 아드리안에게 솔직히 털어놔야 했다.

에디스는 행여 장난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아니면 자신이 가짜 에디스로 취급받을까 봐 염려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내내 진지하게 그녀의 사연에 귀를 기울였다.

긴 얘기가 끝난 후 아드리안이 대뜸 물었다.

“나 확인할 게 있는데.”

“응, 뭔데?”

“그럼 내가 만난 에디스는 모두 너인 거…… 맞지?”

“맞아. 나는 4년 전에 이곳으로 왔으니까.”

아드리안이 역력히 안도한 기색을 띠었다.

“그럼 네가 소설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을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네?”

“뭐?”

그가 생각하는 흐름이 의외의 방향이었다. 에디스는 당연히 이 기묘한 현상 자체에 호기심을 가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드리안은 대뜸 그녀가 이곳에 머물기를 바랐다.

“제대로 봤군. 그게 목적일세.”

심지어 클라이드까지 맞장구쳤다.

“결론적으로는 에디스에게 아무 탈도 생기지 않기 위해서지. 그러려면 먼저 원인을 찾아야 해. 그다음에는 사고가 터졌을 때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건지 알아 둬야 하네.”

“너무 막연한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초현상 연구를 중심으로 접근하려 하네. 솔직히 그것도 쉽지는 않지만.”

“일단 책은 가능한 한 많이 구해 보겠습니다. 남에게 대신 읽도록 시킬 수도 없으니 저도 같이 읽어야겠군요.”

에디스가 고마움의 눈빛을 던졌다.

“뭔가 힌트가 될 만한 내용을 찾으면 내게 알려 줘.”

“그럴게. 힘닿는 데까지 뒤져 볼게.”

“지금까지 찾은 건 설명한 대로가 전부야. 묘하게 비슷한 세계관에 내가 살던 곳의 설정이 흩뿌려져 있다는 거.”

“자주 이 도서관에 오게 되겠네.”

“앗, 그러다가 생업에 지장이 생기는 거 아냐?”

“지장이라니, 전혀. 전하께서 여러모로 내 상회에 편의를 봐주신 덕분에 요즘 한창 일이 잘 풀리고 있는걸.”

클라이드는 둘의 대화에 수시로 끼어들곤 했다. 아드리안이 집에서 알아보고 결과만 갖다줘도 되지 않냐고 묻기도 했다.

두 남자 사이에 낀 에디스는 클라이드의 속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여서 약간 민망했다. 아드리안과는 친구 사이라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날을 세우는 태도가 다 읽혔다.

하지만 그들의 공식적인 연인 사이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었다.

클라이드가 아드리안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구시렁거렸다.

“아드리안, 유감스럽지만 대신들 상당수가 우리의 연인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네.”

“저도 눈치챘습니다. 전하께서 에디스를 아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고 말들이 많더군요.”

“그건 내 실수가 맞네. 에디스에게 내 알파 페로몬 냄새가 자주 풍긴다며 쑥덕거린다지.”

“그러면…… 앞으로 어쩔 계획이신지요.”

클라이드의 손끝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각오를 다지듯이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이대로 계속하면 어떨까 싶네. 속이는 데 실패하더라도 아드리안이 궁에 들락거릴 빌미는 만드는 셈이 되니까.”

“이 도서관에 오더라도 의심을 살 일은 적겠군요.”

둘이 합의하듯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아도 가짜 연인의 연기는 지속하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아드리안은 잊었던 일이 생각났다는 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전하, 얼마 전에 노예상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얘기해 보게.”

“저의 상선이 최근에 항구에 도착해서 선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대륙의 같은 항구에서 출항을 준비하는 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레이브즈 상회의 배인 듯했다면서요.”

“그레이브즈 상선?”

“며칠 사이로 그 배가 도착할 겁니다.”

“페이튼이 또 노예를 실어 나를 거란 뜻이군.”

“괜한 억측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거의 확실할 걸세. 바다를 횡단하려면 몇 개월이나 걸리지 않나. 노예를 배에 태울 시점에는 이곳 사정이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겠지.”

대책이 필요했다. 새로운 상품이 되어 이 땅에 발을 디딜 노예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클라이드는 언제나 그렇듯 아드리안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마뜩잖을 뿐, 아드리안이 시기적절한 정보를 물어 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에디스의 불안한 상황과 관련해서도 도움이 되는 건 분명했다.

어느새 세 사람의 분위기가 예전에 에디스가 조언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아드리안이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위장 연인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아드리안은 여러모로 쓸모 있고 괜찮은 신하였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딱히 싫지도 않은…….

그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아드리안을 그 정도 수준에 올려 뒀다.

* * *

에디스는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서 소설을 읽었다.

일삼아 읽게 된 여러 소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해서, 현실 세계의 설정은 따지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탐독하는 중이었다.

“잘 시간이야.”

클라이드가 캔들 스너퍼를 들고 돌아다녔다. 별실이 캄캄해지고 곧이어 침실도 거의 불이 꺼졌다.

“아아, 한참 재미있는 대목이었는데.”

“내일 마저 읽어. 많이 피곤할 텐데 이만 쉬어야지.”

가장 마지막 순서로 에디스의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촛대의 불이 사그라들었다. 에디스가 바르게 눕자, 그가 사방으로 휘장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똑같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클라이드는 옆의 보조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등 뒤로 휘장이 드리웠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얇은 휘장을 뚫고 빛이 희미하게 새어들었다.

에디스는 누운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실눈을 뜨고 클라이드가 뭐 하는지 몰래몰래 훔쳐봤다. 방금 전 누운 탓에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걸 서로 뻔히 알지만, 괜히 낯뜨거워서 똑바로 보지 못했다.

약속대로 그와 한 침대를 쓰게 된 순간.

맥박이 전력 질주하는 선수만큼 빨리 뛰었다.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허튼 상상을 했다. 잠만 같이 자기로 굳게 맹세했더라도 실제로 닥치면 달라질지도 몰랐다.

알 만큼 다 아는 성인 여성의 머릿속은 온갖 19금의 망상으로 가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