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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78)화 (78/129)

78화

“끝났군.”

“우시장에서보다 간단하게 해결됐네요.”

그가 팔뚝을 내밀자 에디스는 가뿐한 마음으로 손을 얹었다.

바에 돌아가 바텐더에게 새 칵테일을 주문했다. 사색이 된 바텐더가 겨울철 사시나무만큼 손을 떨면서 술을 만들었다.

둘은 아수라장이 된 클럽을 승리의 전장 바라보듯 하며 예쁜 칵테일을 건배했다.

“나도 ‘내 돈 내놔’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배상을 청구할 수 있겠지.”

“아아, 제발 돌려받게 되면 좋겠네요.”

엄살떨듯이 앓는 소리를 하자, 클라이드가 기분 좋게 웃었다.

오래전의 일이라 장부를 찾지 못할지 몰랐다. 제임스 일당에게 배상을 청구할 사람이 줄을 설 테니, 에디스가 돌려받을 돈은 거의 없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적어도 지금 진 도박 빚은 확실하게 무효가 될 테니.

보람찬 일을 마치고 마시는 칵테일이 유난히 달았다.

* * *

“제임스의 클럽이 황태자에게 털렸다고?”

새로운 소식이 그 밤을 넘기지 않고 페이튼의 귀에 들어갔다. 시종처럼 선 다빌 자작이 대답했다.

“예. 회생 불능의 수준입니다. 아예 다 알고 왔다더군요.”

자다 깬 페이튼이 느슨한 표정을 한 채 눈을 껌뻑였다. 예기가 엿보이지 않아 도리어 불안한 다빌은 더 큰 봉변을 당할까 봐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의 판단을 기다렸다.

페이튼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악재가 겹쳤지만 딱 하나는 다행이군.”

“어떤?”

“빠르게 제임스를 죽이는 길을 선택할 수 있어.”

“아……. 그런 방법이.”

“놈이 괜한 헛소리나 늘어놓지 못하도록, 사기 도박장을 부풀려서 당장 사형에 처하도록 만들어야겠어. 그건 빅토르 백작과 디트리안 백작이 아주 잘할 거야. 죽일 놈으로 몰아붙이는 거 말이지.”

페이튼은 요즘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겨우 눈을 붙이던 참이었다. 황태자가 점점 세를 늘리며 압박해 오고 있어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골머리를 앓았다.

“이번만은 나쁘지 않아. 도박장을 잃는 만큼 장점도 있거든.”

“어떤 점이……?”

“노예 매매상과 관련해서 깔끔하게 꼬리를 자를 수 있잖아. 제임스의 목 하나 떨구면 여럿이 편해지는 거야. 게다가 중죄니까 당장 시키라고 압박할 수도 있지.”

“말씀대로 나쁘지 않군요.”

노예 사업은 이전부터 위기감이 조성되어 와서 어느 정도 각오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게임장 한 군데쯤은 그리 큰 사업이 아니었다.

다만 연거푸 황태자에게 공격을 받고 제게 출혈이 생긴 게 우려스러웠다.

“그럼 이후의 일은, 흠.”

페이튼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시 잠들기는 틀린 듯했다.

“제임스의 후임이 필요하겠군. 누가 적절하겠나?”

“도박 사업이나 대부업은 합법이니까 할 사람이 많습니다.”

“대표로 앉힐 놈하고 손 더럽힐 놈이 따로 필요해. 주먹깨나 쓰는 놈으로는 남쪽 할렘가의 조직은 어때?”

“그놈들은 너무 물불 안 가리지 않습니까.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아서요.”

“일만 잘하면 상관없어. 자네도 괜찮은 놈 좀 추천해 봐.”

둘은 밤이 다 지나가도록 머리를 맞대고 황태자와 맞설 대책을 세웠다.

* * *

에디스는 도박장을 검거한 후 클라이드만 먼저 환궁시켰다.

외출한 김에 오랜만에 본가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밀린 집안일이 이것저것 많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한 일은 노예 시장에서 구출한 병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는 하인용 구역의 제일 끝방에서 요양 중이라고 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실력 좋은 의사를 데려와 치료하게 했다. 다행히 중병은 아니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극도로 몸이 허약해진 데다가 오물 같은 음식을 먹어서 장기가 손상되었다.

노예가 머무른다는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곧바로 인기척이 들렸다.

“자고 있었나? 늦은 시간에 들러 미안하게 됐군.”

남자가 에디스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앗, 아닙니다.”

역력히 당황한 기색의 남자는 제법 몸 상태가 좋아진 듯 보였다. 얼굴색이 며칠 전보다 나았다.

하인이 들고 온 촛불을 협탁에 올려놨다. 불꽃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제일 끝방이라고 해서 꽉 막힌 골방인 줄 알았더니 제법 넓은 창이 트여서 바람이 선선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를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찬찬히 살펴봤다.

바싹 마른 몸에 키만 멀대같이 자라서, 장대에 살 껍데기만 씌워 놓은 것 같았다. 눈은 튀어나올 듯이 커 보였다.

땟국물을 지운 피부색은 라그란드 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밝았고 머리칼도 올리브색에 가까웠다. 아무리 봐도 보통의 신대륙 노예와는 외모가 달랐다.

“몸은 좀 어때?”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가 유창한 제국어로 냉큼 답했다.

“그래, 다행이군.”

썰렁한 침묵이 잠시 지나갔다. 완전히 나을 때까지 그를 집에서 몸조리하게 할 생각이라, 이제 딱히 용건은 없었다.

그가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로 에디스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제임스의 클럽에 다녀오느라고 지나치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탓에 조금 민망했다. 왠지 얼굴이 가려웠지만 화장한 상태라서 함부로 긁어 대지는 못했다.

“저, 그럼 편히…….”

남자가 돌연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펴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라이담룰룸 쿨레.”

낯선 원주민의 언어가 투박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무슨 뜻이야?”

“샛별의 여신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태어난 부족에서 모시던 신 중 한 분입니다.”

남자는 에디스를 신이라 일컫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는 눈길이 지극히 경건했다.

“과찬이네. 난 우연히 너를 사들였을 뿐이야.”

“저를 살려 주신 여신님.”

그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에디스는 그가 자신의 발등에 입을 맞추려 하길래 황급히 물러섰다.

“이러지 마. 아픈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했을 일인걸.”

“당신 외에는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아니라 그저 자비로운 분이라고 해도, 저만은 주인님을 신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괜히 부끄러워졌다. 칭송을 들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서 더욱 난감했다.

그만 일어나라고 여러 번 권한 후에야 남자가 무릎을 들었다.

“이름이 어떻게 돼?”

“타와누카입니다.”

발음이 힘든 이름이라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입 안으로 타와누카를 중얼거렸다.

“네 고향은 어디지? 다른 노예들처럼 남쪽 대륙인가?”

“저는 신대륙 출신입니다.”

“아, 그래서 생김새가 달랐구나. 라그란드어는 어떻게 배웠어?”

“제가 태어나기 전에 부족이 몰살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농장의 노예였고 저도 농장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타와누카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다가 느리게 다음 말을 이었다.

“제 아버지는 농장주였습니다.”

그것만으로 어떤 상황일지 대략 짐작이 갔다. 에디스는 긴 탄식을 토했다.

“사람들은 제가 아버지를 많아 닮았다고 하더군요. 제 외모가 멀쩡해서인지 농장보다는 주로 저택에서 일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습니다.”

“피를 나눈 혈육인데 이렇게 팔아 버리기까지 한 거야?”

“……낯선 기분이네요. 혈육이라는 거.”

타와누카가 유령처럼 흐르듯이 느리게 뒤로 돌더니, 빌려 입은 티가 역력한 상의를 들쳤다.

온몸에 빼곡하게 채찍 자국이 있었다. 깊은 흉터로 남은 것과 생긴 지 얼마 안 된 게 뒤죽박죽이 되어 성한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깨에는 불로 지진 낙인까지 남았다.

그의 앙상한 등은 고단했던 노예 생활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저는 그저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다시 마주한 타와누카는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에디스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원래 마음이 약해서 사람한테 가혹한 짓을 하는 걸 잘 보지 못하는 편이었다. 예전에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험한 일을 당하는 장면은 흐린 눈으로 넘기곤 했다.

“여기선 널 때리는 일 따위 없을 거야. 잘 먹고, 푹 쉬고. 어서 건강해졌으면 해.”

이쯤 되니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타와누카의 처우를 어떻게 할지 미리 생각하고 사들인 게 아니었다. 불법 노예를 반대하는 입장이면서 정작 케츠모리스 저택에서 그를 노예로 부리기도 곤란했다.

타와누카에게 고향을 물어본 건 돌아갈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를 안전하게 고향 땅을 밟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를 수배한 다음 그가 다시 노예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이런 상황은 타와누카뿐이 아니었다. 우시장에서 팔리던 다른 노예들도 어떻게 관리할지 아직 황실 차원에서 결정하지 못했다.

또한, 그렇게 애써 봤자 타와누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듯했다.

상황을 알게 되니 돌려보내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일지 망설여졌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즉시 답이 되돌아왔다.

“가고 싶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보내 줄 수 있어. 거기엔 가족도 있을 테고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텐데.”

“여기에서 주인님을 모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 저 잘할 수 있습니다. 이래 봬도 힘도 세고……. 그리고 글도 읽고 쓸 줄 압니다.”

갑자기 당황스러웠던지 타와누카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저러다가 혀를 씹으면 어쩌나 싶게 다급한 말투로 자신의 능력을 피력했다. 할 줄 아는 일을 이것저것 주워섬겼다.

“진정해. 타와누카. 억지로 돌려보내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제발 주인님.”

“알았어.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자칫하면 또 무릎을 꿇는 그를 보게 될지 몰랐다. 이쯤에서 에디스가 자리를 뜨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이만 쉬어.”

“벌써 가시는 겁니까?”

타와누카가 그녀의 스커트 끝자락을 잡았다. 살짝 끌어당기다가 황송한 듯 이내 내려놨다.

“집에 늘 안 계시던데. 황궁에서 사신다던데 언제 또 오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제법 배운 티가 났다. 케츠모리스 가의 다른 하인보다도 오히려 말투와 행동거지에 예절이 배어 있었다. 글도 깨쳤다는 건 고향에서 저택의 일꾼으로 쓸모가 컸다는 의미이려나.

“자주 오기는 힘들어.”

“…….”

“네 앞으로 편지를 보낼게. 다른 편지와 섞일지 모르니 뭔가 표시를 해야겠네.”

“잘 읽어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려보낼까 봐 아직도 걱정되는지 타와누카가 서둘러 대꾸했다. 바싹 말라서 허수아비 같은 몰골로 안절부절못하는 게 에디스의 눈에는 안쓰러워 보였다.

“봉투에 허수아비 표시를 해 둘게. 사실은 이 집에서 집사 역할을 대신하는 하인이 글을 몰라서 말이야.”

“제가 그 일을 하면 안 될까요?”

간곡히 두 손을 모으는 그에게 고개를 젓기가 참 힘들었다.

“네가 하인이나 집사 대행으로 일하기는 좀 곤란해. 정식으로 임금을 준다고 해도 다른 사람 눈에는 노예를 부린다고 비쳐질 수 있어.”

“전 노예인걸요. 주인님의 노예가 맞습니다.”

타와누카에게 나라마다 다른 노예 제도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널 부려 먹으려고 산 게 아니라, 아파 보여서 도와주려 한 거야.”

에디스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의 부탁을 완곡히 거절했다.

방을 나서며 하인에게도 편지 얘기를 해 뒀다. 이젠 타와누카를 방에 두지 말고 자유로이 집 안을 돌아다니도록 하라는 지시도 했다.

이후로 에디스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팔을 걷어붙였다.

서재에 할 일이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봉투가 너무 많아서 아예 문서함이 새로 만들어져 있었다. 봉투 안에는 각종 거래 명세서라든가 서신이 담겨 있었다.

당장 급한 건 자산 관리였다. 돈 문제와 관련한 문서만 따로 모아서 장부에 정리했다. 앞으로는 제임스에게 원금과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니 전체적으로 새로 판을 짜야 했다.

영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도 처리해야 하고, 저택 살림살이도 돌봐야 하고.

서류 더미의 반도 덜지 못했는데 날이 밝았다.

‘먼저 집사부터 고용해 볼까? 돈 계산은 전문 회계사에게 맡겨야겠어.’

주머니 사정이 나아지니 돈 쓸 일부터 생각났다. 하지만 정말 이 많은 일을 자신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몸이 열 개도 아니고.

곧 출근 시각이었다. 에디스는 눈을 붙여 보지도 못하고 황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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