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드레스는 세련되고 노출이 많았다. 사격으로 다져진 몸매 위로 짜임새 있게 드러난 굴곡이 의외로 에디스에게 잘 어울렸다.
정작 당사자는 어색해 어쩔 줄 몰랐지만, 클라이드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충격적이었다.
“왜요?”
“너무 눈에 띄어.”
“눈에 띄어도 되는 자리잖아요.”
“아니 보통 눈에 띄는 정도가 아니라…….”
연지를 발라 한층 붉어진 입술에 그의 찌를듯한 시선이 머물렀다.
클라이드는 덧입혀 준 코트를 깃까지 세워 에디스를 꽁꽁 싸맸다. 행여 속살이 보일세라 평소보다 더욱 단속했다.
옷 틈으로 깊이 파인 가슴골에 그의 욕망 어린 숨결이 와 닿았다.
“하, 나 지금, 너밖에 안 보여.”
입맞춤할 곳을 찾아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꼼꼼하게 화장한 입술과 얼굴 주변에서 멈칫거렸다. 차마 완성된 아름다움을 망칠 수 없어 배회하던 클라이드는 턱선을 지나 목까지 내려왔다.
그와 마주하느라 길게 세운 목선은 티 없는 진주처럼 우아하고 순결했다.
애타는 입술이 목을 살짝 베어 물었다.
입술의 따뜻한 온기와 눈빛을 통해 열렬하게 배어 나오는 감정이 그녀를 들끓게 했다.
그녀는 금세 말라 버린 목에 침을 삼켰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입맞춤을 느끼고 있음을 클라이드에게 선명히 전하는 행동이었다.
촉, 촉, 소리가 작게 들렸다.
열두 시의 신데렐라처럼 갑자기 정신이 드는 소리였다.
“갈아입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해요.”
“그럼 나만 다녀올게.”
“하지만…….”
“아니지. 다른 사람을 보내면 돼. 에디스는 숨겨 두고 나만 보고 싶어.”
낯간지러운 말을 참 잘도 하는 남자다.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마음에는 쏙 드는 얘기들이다. 어떤 커플은 연인이 감정 표현을 너무 안 해서 불만이라던데, 클라이드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 같다.
에디스는 싫지 않은 스킨십을 아쉽게 떨쳐 내야 했다.
달아오른 뺨만큼이나 핑크빛으로 물든 손끝으로 그를 조심히 건드렸다. 소설 주인공처럼 현실성 없이 잘생긴 얼굴을 살짝 쓸어내렸다.
“얼른 가요.”
가면 갈수록 그에게 홀리는 기분이었다. 갈비뼈 아래가 심하게 아렸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그를 놓치기 싫어질 날이 올 것만 같았다. 빙의할 때처럼 느닷없이 현실로 돌아가게 될 경우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 자신은 과연 지독한 상실감을 견딜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심장이 덜렁덜렁 흔들렸다.
에디스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커다란 손을 잡아끌자 그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가지 말고 갇힌 공간에 단둘이 있자던 말은 진심이었던 듯했다.
“어서요.”
“하…….”
코트를 벗어 돌려주자, 그는 대신에 에디스의 모피 숄을 세심히 펼쳐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제임스의 클럽은 밤이 되자 성황을 이뤘다.
성 대문을 본뜬 형상의 출입구에 마차가 줄지어 늘어섰다. 팔을 깊이 감은 남녀들이 농익은 미소를 머금고 휘황하게 불이 밝혀진 도박장으로 입장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외모를 뽐내기 위해 옷을 입은 탓에, 에디스의 드레스는 얌전한 축에 속했다.
황실의 문양이 박힌 마차가 클럽 앞에 정지했다. 두 황금 사자 문양을 보자마자 직원의 얼굴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클라이드가 에디스를 에스코트해 음악과 흥겨운 소음이 가득한 도박장으로 발을 들였다.
순간 장내가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카드놀이를 하는 테이블에는 국정 회의에서 매번 만나는 자가 패를 들고 있었다. 황태자를 이곳에서 만난 게 믿기지 않는지 그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클라이드와 서로 안면이 있는 귀족이 적지 않았다. 다른 손님도 황태자를 알아봤다. 최근에 대중 앞에 서야 하는 행사가 여러 번 있었던 탓에, 쉽게 잊히지 않는 그의 얼굴을 이곳 손님들이 금세 기억해 냈다.
두 사람은 클럽에 아무도 없는 양 태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바에 걸터앉아 칵테일을 주문했다.
서로 어깨를 맞대며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속닥거렸다.
“이거 맛있네요.”
“입에 맞아? 다행이네. 하지만 은근히 도수가 높으니 조심해야 해.”
“클라이드도 한잔해요.”
“그럴까?”
황태자가 순수하게 놀러 온 것처럼 행동하자, 사람들은 그를 신경 쓰면서도 아닌 척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클럽의 웅성거리는 소음이 되돌아왔다.
두 사람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클럽의 분위기를 즐겼다. 제임스가 자백한 속임수를 직접 잡아낼 자신이 있었다.
에디스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아버지 때문에 클럽 입구까지 와 본 적은 있어도 직접 게임 하러 들어갈 일이 생기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최고급 인테리어의 실내가 고상했지만 돈에 눈이 벌게진 자는 상스러워 보였다. 화려함으로 천박함을 가린 느낌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해?”
클라이드가 잔 끝을 살짝 부딪혔다.
“우리 아버지 생각이요.”
“흠…….”
“대체 뭐가 아버지를 이곳에 빠져들게 했을까.”
“…….”
“사업이 망한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남은 걸 수습해서 집안을 유지할 마음은 왜 들지 않았을까. 그런 걸 놓칠 만큼 이게 중독적인가.”
기본적인 생활비도 없이 궁핍해져 어머니가 떠날 때도 도박장에 있었다던데.
“아버지를 원망해?”
“아뇨, 내 진짜 아버지도 아니고요. 그 시절의 에디스는 내가 아니라 원작 캐릭터였어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 에디스가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는군.”
“기분이 찝찝한 건 솔직히…… 아버지 걱정 때문이 아니라 내 부채가 부담스러워서예요.”
그는 손가락을 엇갈려 단정한 실루엣의 락 글라스를 들었다. 에디스의 날씬하고 목이 긴 칵테일 글라스와는 대조적이었다.
시크 블랙 칼라의 칵테일을 조금 홀짝인 클라이드는 팔꿈치를 바에 고인 채 그녀를 길게 응시했다.
가끔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뒤로 넘어갔다. 커다란 룰렛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곳이었다.
“갈까?”
둘은 거의 마시지 않은 술을 내려놨다.
룰렛에 다가가자 딜러가 게임을 권했다. 자리에 앉자 두 사람 앞에 각각 칩이 놓였다. 클라이드는 자신의 칩을 에디스에게 모두 몰아줬다.
“에디스가 한판 해.”
“내가 전부요?”
“기대할게.”
클라이드는 여유로운 태도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몇 개의 탑이 쌓인 오렌지색 칩이 얼마짜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황태자의 위신이 있으니 싸구려는 아니겠다고만 추측했다.
먼저 게임하고 있던 자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클럽의 손님들은 함부로 구경하지도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기웃거리거나, 지나가는 척하며 흘끗 보기만 할 뿐이었다.
에디스는 딜러에게 룰렛 규칙을 간단하게 설명받았다.
배팅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무 번호나 잡아 칩을 올렸다. 게임을 즐길 목적도 아니라서 칩의 개수를 세지 않고 높이 쌓인 한 줄을 걸었다.
보조 딜러가 그녀를 대신해 칩을 움직여 줬다.
룰렛이 큰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구슬도 어지러이 주변을 돌았다.
색 대비가 높고 화려한 룰렛은 저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라락 구르는 소리와 함께 게임 테이블 중앙에 포인트를 맞춘 조명이 오감을 사로잡았다. 빠르게 회전하느라 흐릿해진 숫자에 관심이 쏠렸다.
룰렛이 한창 회전할 때, 에디스는 주변을 살짝 돌아봤다.
클라이드도 게임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둘은 은근슬쩍 게임장 이곳저곳을 눈여겨봤다.
딜러는 황태자를 모시느라 잔뜩 긴장한 상태였고 주변은 텅 비었다. 종업원이 잠깐 지나간 게 전부일 뿐 게임 조작의 기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진상을 몰랐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룰렛이 멈추고 볼이 휠에 떨어졌다. 딜러가 숫자를 부르며 자그마한 승리 깃발을 올려놨다.
“어라? 내가 이긴 건가요?”
에디스의 앞에 상당한 양의 칩이 쌓였다. 생각지도 못한 승리였다.
승리를 만끽하는 척 손뼉을 쳤다. 곁에서 팔짱 낀 채 지켜보던 클라이드도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축하해.”
“한 게임 더 할까요?”
“좋을 대로 해.”
이번에는 가진 칩의 절반을 걸었다. 승리에 도취된 표정으로 이번에는 딜러와 룰렛에 집중했다.
두 번째 게임도 에디스가 건 번호에 볼이 떨어졌다. 딜러가 축하 인사와 함께 깃발을 올렸다.
에디스와 클라이드는 남몰래 시선을 교차했다.
게임장에서는 황태자의 게임을 무조건 이기게 해 주려고 작정한 게 아닌가 의심되었다. 승률이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 게임에서 연이어 두 번이나 큰돈을 딴 정황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다 걸게요.”
에디스는 물정 모르는 웃음을 지으며 번호 칸 안에 칩을 올렸다.
딜러가 저만치 멀리에 있는 매니저에게 도움의 눈길을 던졌다. 또 에디스가 따면 많이 이상해지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등 뒤에 있는 매니저가 어떤 신호를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딜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 번째 룰렛을 돌렸다.
룰렛이 화려한 색으로 돌다가 결국 에디스가 건 번호에서 멈췄다.
어리석게도 매니저는 황태자를 알아 모시면서 승리를 안겨 주는 쪽으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물론 에디스가 패배해도 판을 뒤엎어 승부 조작을 탄로 낼 계획은 변함없었지만.
연이어 크게 따낸 상황을 앞에 두고 이번에는 에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죠? 원래 이렇게 잘 이기는 건가요?”
클라이드도 코웃음 쳤다.
“장난질이 섞였군.”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딜러가 잔뜩 주눅 든 말투로 계속하겠냐고 물었다. 에디스는 돌발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느린 듯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으로 딜러에게 접근했다.
딜러가 가지고 있던 구슬 앞에 손을 내밀었다.
“내놔 봐요.”
“고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희 규정상…….”
룰렛 맞은편에서 클라이드가 험악하게 노려봤다.
“내놔.”
구슬을 그녀의 손에 올려놓는 딜러가 벌벌 떨고 있었다. 다른 종업원들이 에디스의 행동을 저지하려고 다가왔다. 하지만 황태자의 엄한 기세에 눌려 감히 말리지 못했다.
구슬은 가볍지만 굉장히 단단했다.
손가락으로 잡고 높이 들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에 비춰 봤다.
“안에 뭐가 있네요. 구슬에 이물질을 넣어도 되는 건가요?”
그때부터 클럽의 웅성거림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소곤거리며 게임에 필요한 말만 작게 나눴다면, 이제는 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 대는 소리가 커졌다. 단박에 의심하는 사람이 생기고 누군가는 가까운 종업원에게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뭐가 들었는지 한번 봐야겠네요.”
클라이드가 고갯짓하자, 멀리에서 대기 중이던 근위 대장이 다가왔다. 그러고 나서 미리 준비한 것을 품에서 꺼내 그에게 건넸다. 작은 망치였다.
에디스는 구슬을 룰렛 휠에 내려놨다. 딜러가 꽂은 승리 깃발 대신에 구슬이 놓여졌다.
“물러나 있어, 에디스.”
클라이드가 세게 구슬을 내리쳤다.
쩍 갈라진 구슬 가운데에서 손톱만 한 쇠붙이가 나타났다.
“오, 찾았군요.”
이제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손님 중 몇몇이 광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황태자가 이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작이다!’를 외치며 날뛰었다.
클럽에 있는 모든 이가 증인이었다.
한 가지 조작이 드러났다는 건 어딘가에 다른 조작도 있다는 뜻이었다. 모두가 하던 게임에서 손을 뗐다. 내 돈 내놓으라는 아우성이 터졌다. 갑자기 클럽은 전쟁통이 되었다.
근위대가 대거 난입했다. 물밀듯 밀려들어 온 제복의 군인이 상황을 통제했다. 손님들을 클럽 한쪽에 모아둔 채 증거물을 속속 찾아냈다. 룰렛 바닥에 연결된 자석도 발견했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속임수가 들어간 카드들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