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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76)화 (76/129)

76화

클라이드도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사기도박이라는 얘기군.”

“맞습니다. 사기도박입니다.”

“검거할 방법은?”

“정석대로라면 경시청의 소관입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쪽에 맡기면 너무 늦을 것 같습니다. 클럽 측에서 숨기고 달아날 여지가 많습니다.”

“물론이지. 내가 직접 손을 쓰겠네.”

클라이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행보를 결정했다.

“지금 클럽은 어떤 상태지?”

“오늘은 문을 열었습니다. 소유주인 제임스가 잡혀 들어간 소식을 듣고 한동안 어수선해졌다가, 당장 결론 나는 게 없으니 일단 영업하는 모양입니다.”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군.”

꼭 덜미를 잡으러 가야 한다. 지금 가 봐야 해.

현장 검거의 필요성을 바로 제임스를 통해서도 깨닫지 않았던가. 범죄 현장을 딱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실토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 돈은? 아버지가 꼬라박은 거금은?

에디스는 이 사건을 사심 가득한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단기간도 아니고 몇 년에 걸쳐 아버지가 그 클럽에서 집안의 재산을 날렸다.

그 돈에는 에디스의 유모와 시녀, 집사의 급여가 포함되었다. 데뷔탕트에서 입었던 드레스가 저당 잡혔으며 각종 살림살이가 현금 대신 거래됐다. 심지어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에게 영지의 산출물을 담보로 거금이 대출됐다.

제임스의 클럽은 케츠모리스 가의 가세가 기울게 한 주범이었다.

그런데 사기도박으로 인정되면 그 빚은 당연히 무효가 될 것이다.

빚이 상당 부분 없어지게 된다!

에디스는 안면 몰수하고 클라이드가 황태자로서 보고받는 자리에 끼어들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전하…….”

그의 팔목을 덥석 잡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클라이드 역시 적극적으로 사건에 대처하려던 참이었다. 어떻게 손을 쓰면 효과적일지 고심하고 있던 중인데 에디스가 그사이를 참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급변하는 안색을 눈치챘다. 희색이 만면한 한편으로 초조한 티가 역력했다. 사기 증거를 놓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쉽게 드러났다.

“다들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나.”

팔짱을 끼고 책상 모서리에 기댄 채 그가 담담히 에디스를 바라봤다.

에디스는 튕겨 나가기 전의 용수철과 같았다. 클라이드처럼 차분하게 있기가 힘들었다. 그가 당장 군대를 소환하자는 말을 하지 않을까 봐 잠깐만에 하늘만큼 땅만큼 걱정을 쌓았다.

“저기요?”

“잠깐만.”

“아니, 저기.”

잠깐만 생각 좀 하자는 말을 줄였으리라는 걸 그녀도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조급해진 바람에 바짝바짝 속이 타들어 갔다.

너구리가 굴 밖으로 나오게 하려면 연기를 불어 넣어야 하는 법이라고 한다. 아니면 클라이드의 엉덩이를 당나귀처럼 걷어차 줄까?

아 쫌 뭐라도 해 보라고. 이렇게 계속 팔짱만 끼고 있을 거야?

“아니이이, 클라이드으으응—.”

하지만 입으로는 코맹맹이 소리가 튀어나왔다.

에디스 빙의 인생 4년 차. 이만큼 막 나간 적은 없었다. 그의 소맷자락을 살금살금 흔들며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피웠다.

“응? 응? 지금 나갈 거죵?”

그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물론 알고 있다. 지금 제 모습이 무지하게 웃기겠지.

그의 좌우로 긴 눈매가 크게 벌어지고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봐도 뻔했다. 희귀동물 보는 듯한 시선이 분명했다.

하지만 거금이 걸렸지 않은가.

기필코 클라이드를 움직여야 했다.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좋아요. 그럼 조건을 말해 봐요.”

당차게 고개를 들었다.

“조건?”

“클라이드가 클럽을 습격하도록 명을 내린다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한 가지 들어줄게요.”

“거래를 하자는 뜻인가?”

“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요.”

유려한 곡선을 이룬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벌어졌다. 많이 놀란 기색이었다.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설마 이룰 수 없는 소원을 빌지는 않겠죠. 미리 말하지만, 난 별을 따다 줄 능력은 없어요.”

“별은 필요 없어. 내가 빌고 싶은 소원은 따로 있지.”

제가 너무 들이댔나 싶긴 했다. 하지만 이제 와 물러설 수는 없었다.

드디어 그가 팔짱을 풀었다. 그런데 자리를 털며 일어나지는 않고 에디스의 손목을 지그시 쥐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간곡히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과거의 어느 순간을 연상시켰다.

황후 얘기가 나왔을 때, 그가 마음을 털어놨을 때.

“너무 큰 소원 말고요.”

에디스는 조심스럽게 엄포를 놨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훤칠하니 잘난 귀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무리한 요구는 안 된다고 했으니, 근위대를 움직이는 만큼 적당한 걸 생각해 봐야겠군.”

말투를 보니 그가 나중으로 미룰 듯했다. 하지만 자신은 이 자리에서 해치우고 싶었다. 소원 빌기를 남겨 두면 내내 마음이 쓰일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얘기해야죠.”

“당장?”

“돌발적으로 조건을 내민 거니까, 클라이드도 생각나는 걸 바로 말해요.”

그는 에디스와 옷자락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허리가 감겼다. 넉넉히 여유를 두고 그의 팔이 에디스를 빙 둘렀다.

다른 사람을 다 내보내서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창밖 나무에 앉은 새마저도 듣지 못할 만큼 은밀한 행동이었다.

작고 희미하게 들려서인지, 소리의 진폭이 유달리 넓게 느껴졌다.

달고 나직한 음성이 귀 끝을 간질였다.

마치 입술이 닿는 착각이 들 만큼.

“너와 자고 싶어.”

따뜻한 입바람에 섞인 한마디에 짜르르하게 전율이 일었다.

“클라이드…….”

“네 침대에 올라서 같이 말이야.”

“…….”

“처음 에디스가 내 침실에서 잤던 날처럼 같이 눈을 감고, 아침에는 같이 눈뜨고 싶어.”

나란히 누워 자고 싶다는 말이었구나.

일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가 도로 붙는 기분이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소원이었던 탓에 진실을 알고도 여파가 남았다. 맥이 빠르게 뛴 채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하긴 클라이드는 사귐을 강요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이용해 그녀를 억지로 황태자비 자리에 밀어 넣지는 않겠노라고 공언한 적도 있었다. 첫날밤을 고작해야 흥정으로 쟁취하려 할 리가 없었다.

둘러 안은 강인한 팔은 집착적이지만 뺨을 스치는 입술은 지극히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침대 휘장만 보면서 잠들기가 너무 지치더라. 우리 사이에 드리워진 걸 들추고 싶어서 매일 밤 얼마나 갈등하는지 넌 모를 거야.”

“그럴 거면 내가 퇴근하면.”

“안 돼.”

숨도 쉬지 않고 서둘러 그가 대꾸했다.

“안 되는 거 알잖아. 나, 너 못 보내.”

“…….”

“에디스야말로 포기할 때가 되지 않았어? 그냥 마음을 내려놓고 여기서 살아.”

클라이드에게서 페로몬 향이 느껴졌다. 감정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유혹의 냄새가 배어 나왔다. 무리하게 강제하지 않는 향기지만 도리어 호소력은 짙었다. 그녀의 몸이 녹진하게 풀어졌다.

“알았어요.”

그의 입매가 환하게 벌어졌다.

“좋아. 나와 계속 사는 거다?”

“아니요, 그거 말고. 같이 자는 거요.”

이만큼 마음을 흔들고 두드려 대는데도 여전히 벽을 치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참 냉정한 것 같았다.

조금 설레는 사이 정도만 됐어도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서 저에게 접근하던 팀장과는 그럭저럭 사귀어 볼지언정, 너무 잘나고 헌신적인 클라이드는 도리어 어려웠다.

총알도 대신 맞아 주는 남자인걸.

황태자씩이나 되었으면서 애원하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인걸.

질척하게 매달려 죽어도 놓지 않는걸.

심지어 나란히 누워 자도 좋다는 것만 허락했는데도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응, 같이 자자.”

클라이드는 둘의 손바닥을 넓게 마주했다. 펼쳐진 손등을 그의 뺨에 살며시 갖다 댔다.

입가에 가까운 뺨이었다.

고개를 저어 그녀의 손등에 반듯한 곡선의 뺨을 스쳤다. 날렵한 턱선에서부터 뺨을 지나 구각까지, 그가 에디스의 살갗을 야살스럽게 접촉했다.

내리떴던 황금 안이 올라와 그녀를 눈동자에 담았다.

옆에서부터 돌아 들어온 손등은 도톰하게 부푼 입술을 느슨하게 뭉갰다.

“오늘처럼 밤이 기다려진 적은 없는 것 같아.”

손등에 입을 맞춘 채 그가 속삭였다.

* * *

황실 근위대가 몇 개 조로 편성되어 제임스의 클럽으로 이동했다.

노예 매매를 단속하던 때보다는 투입된 인원수가 적었다. 반면에 훨씬 정예 멤버였다. 클럽의 규모가 우시장보다 작고 손님 중에 귀족이 많았기 때문이다.

출발 전에 미리 제임스가 털어놓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어떻게 상대에게 눈속임하는지 구체적인 방법도 알아냈다.

클럽 소유주의 자백만으로도 사기죄로 유죄 판결이 나겠지만,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제임스는 노예상이기도 하니 귀족파를 배후로 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들이 뜻밖의 수작을 부려 제임스를 빼돌릴 수 있었다. 또는 판사 앞에서 제임스가 딴소리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되도록 목격자가 많은 상황에서 사기도박의 현장을 잡는 게 최고였다.

에디스는 밤의 여흥에 알맞은 옷을 차려입었다.

몸에 착 붙는 와인색의 실크 드레스와 털이 풍성한 숄을 걸쳤다. 어깨가 다 드러나고 가슴도 깊이 파인 스타일이었다. 과한 노출이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입어 보랴 싶어서 되도록 당당하게 굴었다.

화장도 최대한 신경 썼다. 얼굴을 내어놓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정체를 숨겨 봤자 소용이 없었다. 귀족 손님 중에는 뒷모습만 봐도 이쪽의 정체를 알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먼저 준비를 마친 클라이드가 에디스의 꾸밈방 문을 두드렸다.

“에디스, 늦겠어. 그만 나가야…….”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멈칫했다.

섹시한 분위기의 드레스가 에디스에게는 무척 어색했다. 그런데 클라이드가 미동도 하지 않고 쳐다보니 더 민망해졌다.

“준비 끝났어요.”

고풍스러운 암체어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거의 절반은 드러난 가슴도 홍조가 피어올랐다.

“갈까요?”

그와 마주하면서 우아한 밤의 여왕 같은 이미지를 자아내려고 노력했다.

클라이드 역시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맵시 있게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하얀 레이스 셔츠 위로 검은 바지와 코트를 받쳐 입었다. 평소보다 허리 라인을 깊이 잡아 그의 넓은 어깨와 늘씬한 옆구리가 예술적으로 부각됐다. 귀금속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펜던트와 반지 세트에 박힌 보석이 영롱한 빛을 발했다.

보폭이 넓은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돌연 자신의 코트를 벗었다.

“에디스, 이 드레스는.”

그녀의 어깨에 커다란 코트가 둘러졌다. 파묻히듯이 완전히 몸이 가려지고 말았다.

다음 순간, 에디스는 어깨를 강하게 쥐어 잡힌 채, 잡아먹을 듯 강렬한 눈빛과 맞닥뜨려야 했다.

“꼭 이 드레스를 입어야 해?”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소리의 끝이 역력히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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