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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75)화 (75/129)

75화

에디스는 군대에 아무런 권한도 없거니와, 얼굴을 가려 정체를 감춘 채였다.

제임스가 벌써 직선 도로의 끝까지 도망갔다. 추격하던 군인과 제임스의 부하들이 육탄전을 벌이는 와중에 그는 점점 느려지는 다리를 안간힘 써서 휘저었다. 조금만 더 가면 골목으로 숨게 될 듯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소란을 들은 클라이드가 아직 우시장을 가로질러 정문까지 달려오지도 못했다.

단 몇 초였다. 제임스를 잡을 기회는.

“내가 할게요.”

에디스가 총대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막 쏘기 직전이었던 군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두꺼운 베일이 달린 모자가 바닥에 떨어지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케츠모리스 공작님이셨군요.”

총사 대회의 준우승자인 에디스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군대 내에서는 슈퍼스타였다.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레이디가 신의 솜씨로 총을 쏜다며 명성이 드높았다.

다들 앞다퉈 자신의 총을 내어 주려고 했다. 여기요. 이쪽. 손짓과 눈짓을 하며 공손하게 총대를 넘겼다.

그녀는 시간이 없어서 제일 가까운 총을 잡았다.

총을 잡아 자세를 취하고, 목표물을 조준하고, 호흡을 가다듬어 쏠 준비를 하는 일련의 과정이 빛처럼 빨랐다.

가늠자 너머로 제임스의 퉁퉁한 허벅지를 바라봤다. 널찍한 등판도 노려봤다.

하지만 총구 너머로 사람을 조준하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는 자체가 에디스의 양심에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우선은 팔다리를 쏴 쓰러뜨릴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빗맞힐 확률이 높았다.

‘빨리. 당장 정해야 해.’

조준점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제임스가 달리는 길 끝에 레스토랑 간판이 튀어나와 있었다.

에디스는 벽에 고정된 간판 프레임을 조준했다. 제임스를 노릴 때보다 한결 침착해질 수 있었다.

긴장을 풀고 무심한 듯이 툭,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발포 후에도 사격 자세를 유지하며 총신 너머로 제임스의 모습을 주시했다.

간판이 대롱거리다가 놈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어깨를 부여잡은 그가 한 걸음을 더 뛰었다. 곧이어 옆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려 했다.

실패인가?

하긴 너무 변수가 많았어.

쫓아가는 군인들, 중간에서 몸싸움하며 구르는 자들, 팔다리를 흔들며 뛰는 목표물.

“억!”

비명이 들렸다. 다음 순간, 제임스가 고꾸라지며 길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추격하는 군인들이 순식간에 놈을 에워쌌다. 그자를 따르던 부하를 제압하고 전원의 무기를 빼앗은 후 우시장으로 끌고 왔다. 제임스는 맥없이 한쪽 어깨를 늘어뜨린 채였다.

그동안 클라이드가 급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 그녀의 곁에 섰다.

“에디스가 잡았군.”

“그러게요. 운이 좀 따랐네요.”

속으로는 많이 졸렸던 터라 그녀는 홀가분하게 손을 털었다.

군인들도 에디스에게 열렬히 찬사를 보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거의 우러러보듯이 요란을 떨어 댔다. 클라이드의 정체가 황태자인지도 모르고, 예의를 차리지 않으며 저희끼리 광분해 버렸다.

뒤늦게 쫓아 나온 사령관이 엄하게 군기를 잡았다. 다시 각을 잡고 선 군인들은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클라이드가 모자를 집어 제 옷소매로 먼지를 말끔하게 닦았다. 그녀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가지런하게 정리해 준 후 모자를 원래대로 씌웠다.

“하여간 예쁜 짓만 하지.”

귓가에 작게 속삭임이 지나갔다.

“운이라니까요. 별거 아니에요.”

“그러면 포상금은 필요 없나?”

“실력이에요! 백 퍼센트! 완전히! 이 순간을 위해 매일 연습했지요.”

클라이드의 스카프 안쪽으로 살갑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요즘은 운동 삼아 함께 승마와 사격을 절반씩 즐기곤 했는데, 다행히 대회용 특훈을 했던 실력이 녹슬지 않은 것 같았다.

예상보다 수확이 풍성해진 덕에 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가벼웠다.

* * *

세계 각국의 보물과 골동품이 즐비해 호화로움을 자랑하는 페이튼의 서재가 늦은 밤의 음울한 기운에 억눌려 마치 미물이 사는 굴 같았다.

밖에 추적추적 비까지 오는 바람에 창을 타고 습한 한기가 전해졌다. 뱀이 사는 굴이라면 딱 어울릴 법한 서늘함이 최고급 가죽 의자 주위를 맴돌았다.

“잡혔다고?”

그가 크리스털 술잔이 부서지라 세게 내려놨다. 잔에 남은 술이 튀어 테이블을 더럽혔다.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그레이브즈 공작.”

다빌 자작이 머리를 조아렸다.

“유감이라고?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죄송합니다.”

다빌은 명색이 귀족이지만 사실상 페이튼의 가신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집안이 대대로 그레이브즈 가문을 모셔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페이튼이 은밀히 시킨 일을 하는 것, 대신 손을 더럽히는 것이 다빌의 역할이었다.

세월이 변해 작위에 따른 차별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현실은 달랐다. 다빌 자작은 경제적으로 페이튼에게 속해 있었고 자칫 밉보였다가는 먹고살 일조차 깜깜해지는 처지였다.

페이튼이 손가락을 가위 모양으로 들었다.

허리를 숙인 채 재빨리 다가간 다빌은 테이블 위 금장 장식의 상자에서 시가를 꺼냈다. 캡 부분을 커팅한 후 풋에 깔끔하고 고르게 불을 붙였다. 페이튼의 손가락에 정중히 시가를 끼워 주는 과정이 지극히 익숙했다.

다빌이 페이튼의 시종으로 있을 때부터 늘 해 오던 행동이었다.

페이튼의 입에서 뱀 혀와 같은 담배 연기가 구물구물 뿜어져 나왔다.

“놈들을 어떻게든 빼돌릴 방법은 없나?”

“황실 근위대의 취조실에 있다고 합니다. 방법이 도저히 없습니다.”

“암살자를 보낼 수는?”

“그것도 좀……. 그쪽 보안이 철저해서요.”

금값에 버금가는 시가가 타들어 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페이튼이 생각에 골몰했다. 뾰족한 수가 없음을 그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겠군. 꼬리를 쳐 내도록 해.”

“손해가 꽤 심할 겁니다.”

“제임스를 대신할 놈은 많아. 사업을 접는다면야 손해가 크겠지만, 잠깐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참에 아랫것들 물갈이도 하면서 말이야.”

다빌이 페이튼의 팔꿈치 아래에 재떨이를 갖다 놓았다.

“그럼 다음에 올 배는 어떻게 할까요?”

“언제 오기로 되어 있지?”

“2주 후입니다.”

그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를 떠올리고 저울질했다.

2주면 소란이 정리되기 힘든 기간이다. 황태자는 선을 넘을 정도로 날뛰고 있고, 시장 상황은 꽁꽁 얼어붙었다. 배가 들어오더라도 노예 상품을 진열하고 팔 만한 분위기가 잡히지 못할 것이다.

“아깝지만 물건들은 처분해.”

“처분하라는 건…… 돌려보내라는 말씀입니까?”

페이튼이 다빌을 가늘게 쏘아봤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전부 죽이라는 소리다.”

흠칫거리던 다빌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줏대 없이 네네 대꾸하는 말에는 본인의 의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페이튼은 멀쩡한 상품을 버리게 된 일에 속이 쓰렸다. 황태자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꼴도 보기 싫었다. 보다 중요한 건 그와 지인들의 사업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새삼스럽게 빅토르 백작이 독립을 운운하던 날이 떠올랐다.

라그란드 제국을 반으로 나눠 독립국을 세우는 게 따지고 보면 그다지 막연한 계획만은 아니었다. 황제가 될 자와 공신이 될 자를 정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이대로 차츰 황실의 힘이 커지고 귀족파의 입지가 좁아지다 보면, 머지않아 독립하는 편이 낫다고 계산되는 시점이 올 게 분명하다.

“독립하는 쪽으로 한번 판을 벌여 볼까?”

페이튼이 득실을 따져 셈했다.

그동안 옆에서 시중들던 다빌은 나름의 고뇌에 빠져 있었다. 총사 대회의 선수를 죽일 때도 굉장히 찝찝했는데 이번에는 수백 명의 노예를 한꺼번에 죽여야 할 상황이었다.

지시가 떨어졌으니 피할 길은 없었다. 다빌은 꼼짝없이 노예를 몰살하는 작업을 지휘하게 생겼다.

“다빌 생각은 어떤가?”

페이튼이 묻자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몸이 차가워졌다.

“새로운 나라의 황제로는 당연히 공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만한 자격과 능력이 되는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글쎄. 그럴까?”

“동의할 사람이 현재 기준으로도 절반은 될 겁니다. 하루빨리 추진하실수록 공작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빌은 페이튼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굴면서 원하는 답을 내어 줬다.

하지만 거짓으로 꾸며낸 말만은 아니었다. 정말 독립하게 된다면 다빌이 보기에도 황제로 페이튼이 추대될 것 같았다.

* * *

황태자의 집무실에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노예 시장에서 체포된 상인들, 그중에서도 가장 구린내가 풍기는 제임스를 집중적으로 심문했더니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고 했다.

근위대장이 다급한 행색으로 집무실로 찾아왔다. 설명하는 태도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전하, 제임스가 자백한 내용 중에서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서면 보고도 생략할 만큼 급한 일인가?”

정자세로 클라이드에게 보고해야 할 근위 대장이 웬일인지 방 건너편 책상의 에디스를 곁눈질했다. 곧이어 시선이 다시 황태자에게 되돌아왔다.

“확인해 보니 제임스는 사업체를 여럿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산을 불린 과정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도박장을 추궁했더니…….”

에디스가 벌떡 일어났다.

제임스의 도박장 얘기를 듣자마자 귀가 번쩍 뜨였다.

다른 업무를 보느라 여태껏 근위 대장의 보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갑자기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드르륵 의자를 바닥에 긁으며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서요? 얼른 얘기해 봐요.’ 하고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얼굴로 표현했다. 그녀는 클라이드를 향해 동그랗게 눈을 부릅떴다가 찡긋찡긋 윙크했다.

“도박장에 어떤 문제라도?”

클라이드가 무던하게 근위 대장에게 물었다. 그녀는 숨넘어가게 궁금한 심정이라 차분한 그의 태도에 약이 오를 정도였다.

“제임스는 도박장을 클럽이라고 부르더군요. 그 클럽은 나름대로 즐길만한 곳으로 정평이 났다고 합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라서 귀족의 사교 장소로도 이용된다고 하더군.”

“그런데 클럽에서 게임을 할 때 조작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에디스가 저도 모르게 책상을 쾅 내리쳤다.

얘기를 듣자마자 울화가 치밀어 저절로 손이 헛나갔다.

“아,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제임스가 승률을 조작하는 수법을 몇 가지 털어놨습니다. 극비리에 심문한 후 제가 곧바로 달려온 거라 달리 아는 사람은 없는 상황입니다.”

근위 대장은 클라이드에게 보고하면서도 사실상 에디스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황태자 궁에서 한솥밥을 먹는 처지이다 보니 대장도 그녀의 채권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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