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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74)화 (74/129)

74화

인정에 이끌려 유독 친절을 베풀려는 에디스를 지켜보며 클라이드가 물었다.

“에디스, 어쩔 셈이지? 저 노예는 중병에 걸렸을 수도 있어.”

“많이 아파 보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가도록 내버려 두자니 마음이 불편하네요. 내 눈에 띈 것도 인연인 듯하니까 데려와서 치료해 주고 싶어요.”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편히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보람이 있겠지요.”

경매가 계속 진행됐다. 나중으로 갈수록 상태가 좋은 노예가 많이 등장했다. 어떤 노예는 3개 국어를 할 줄 알았고, 또 어떤 노예는 춤과 노래의 특기가 있었다.

문서 수발을 한 경험이 풍부하다는 노예에 이르러 그녀가 눈을 빛내자, 클라이드가 곧장 번호판을 들었다.

“어라, 클라이드도 경매하게요?”

“증거로 한 명 사기로 했잖아. 에디스가 산 노예는 죽을지도 몰라서 말이야.”

제법 비싼 값에 노예가 클라이드에게 낙찰됐다.

노예상에게 끌려온 노예들이 차례대로 주인을 만나 뿔뿔이 흩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에디스 일행은 내내 경매장의 자리를 지켰다.

경매가 막바지로 흘러갔다.

손님 중에 먼저 우시장 정문을 빠져나가는 이는 없었다. 마지막 상품으로 얼마나 대단한 노예가 나올지 기대하며 단상 위로 시선을 집중했다.

장내는 한창 경매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평범한 남녀로 보이는 클라이드와 에디스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이 상황으로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그들은 앞 순서로 단상에 올랐다가 팔리지 못한 노예가 매질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경매 진행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팔리지 않은 노예는 어떻게 되는 걸까?

관리인이 꼬챙이 같은 물건으로 노예를 쿡쿡 쑤시며 괴롭혔다. 그러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노예를 찔렀다.

“클라이드.”

“응, 봤어.”

우시장 내부가 경매 인파로 북적이면서도 인근에 한 부대의 군대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극비리에 부쳐진 채였다.

원래는 조용히 잠행만 할 예정이었다. 노예 상인의 조직을 한창 조사하는 중이었고, 그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일망타진하기까지는 아직 자료가 부족했다.

그래도 황태자가 직접 행차하는 탓에 군대가 움직였다. 만약의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클라이드가 에디스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지금 할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팔려 가거나 죽는 노예와 희희낙락하며 그들을 사들이는 손님을 지켜보며, 클라이드도 인내만 하기는 어려웠다.

“지금 하죠.”

흔쾌한 말투와 함께 그녀가 느슨했던 허리를 곧게 폈다.

증거가 부족하면 다른 요건을 찾으면 되지. 어차피 노예상의 배후는 페이튼을 비롯한 신대륙 개척 가문들이다.

그들에게 죄를 묻는다 하더라도 세력 전체를 망하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가장 희망적인 결과라 하더라도, 귀족과 황실 간의 팽팽한 세력 균형을 차츰 황실 쪽으로 기울게 하는 정도였다.

클라이드가 손가락을 다각 튕겼다.

뒤에서 지키고 있던 근위 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명하십시오.”

“지금 되겠는가?”

“예, 가능합니다.”

턱을 들어 우시장에 가득한 손님과 노예 상인을 훑어본 클라이드는 숨을 토하듯이 입을 열었다.

“황명으로 전한다. 노예 상인과 불법 거래에 참여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뒷걸음질 쳐 물러난 근위 대장이 군중들 틈을 빠져나갔다. 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어 하늘을 향해 당겼다. 빨간 연기의 신호탄이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늘에 타원형의 궤적을 만드는 연기의 꼬리를 바라봤다. 노예 상인 중 몇 명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부산한 몸놀림으로 허둥거렸다.

다음 순간, 우시장 정문의 허름한 나무 문짝이 와그작 부서졌다.

터진 둑처럼 군인이 쏟아져 들어왔다. 짙푸른 군복의 황제 군대는 그 자체로 위용이 넘쳤다. 좁은 도랑에 퍼부어지는 바닷물처럼, 검을 차고 총을 든 군인의 무리는 귀족과 상인, 노예들을 한꺼번에 에워쌌다.

사람들이 토끼몰이 당하듯 기겁하면서 포위당했다. 물러나 봤자 시장 한복판이었고, 다들 둥그렇게 원형을 이룬 채 두 손을 모아 덜덜 떨었다.

단상 뒤편으로는 난리가 났다. 대부분의 노예 상인이 달아나려고 난리를 치는 와중에 몇몇 과격분자가 칼부림을 서슴지 않았다.

저항하는 자에게 자비는 없었다. 짧은 경고 이후로 곧바로 총소리가 들렸다.

군대가 우시장 전체를 장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노예 상인들은 머리 위로 손을 짚은 채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다루던 노예와 똑같은 꼴이 되어 흙바닥을 굴렀다.

공터에 모인 손님의 무리는 그보다 온건한 대우를 받았다. 계급이 높은 군인이 소리 높여 외쳤다.

“이쪽에 모인 분들, 모두 제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저항하지 않겠다는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노예를 사들인 것도 죄가 있습니다. 먼저 각자의 신분과 이름을 저희에게 제출해 주셔야 하고, 유죄를 인정하는 서류에 사인하시면 귀가하실 수 있습니다. 나중에 댁으로 경찰이 찾아갈 겁니다.”

엄중한 음성으로 군인의 설명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안도하는 기색을 띠었다. 노예를 거래한 죄목으로 어떤 벌을 받는지는 다들 대충 알고 있었다. 제법 무거운 벌금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신변에 위협을 받지는 않으니 다행이라는 눈치였다.

원래 앉았던 나무 의자를 끌어다가 앉는 사람이 하나둘 늘었다. 체면 때문에 굽히는 태도를 망설이는 자도 있었지만, 서슬 퍼런 군대의 기세에 눌려 머지않아 다들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선 자가 있었다.

얼굴을 가린 남녀 커플이었다.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흘끔거렸다. 커플을 따르던 호위가 군대의 대장에게 뛰어가 속닥거렸다. 대장은 뻣뻣한 자세로 비켜서고, 커플은 조용히 손님들 틈을 벗어나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멀어졌다.

누군가가 속닥거렸다.

“되게 끗발 있는 사람인가 보네. 먼저 서류를 작성하고 집에 가나 봐.”

옆 사람은 아예 성질을 부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근위 대장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을 듯이 제 손을 휘저어댔다.

“이봐, 내가 누군지 알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했다가는 너희 다 옷 벗을 줄 알아.”

“저는 황실 근위대를 총괄하는 대장 가렌드 해밀턴입니다. 경께서는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경을 몇 차례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무적으로 응수하는 근위 대장의 태도에 남자가 급작스럽게 태도를 바꿨다.

“나, 나를 아는가?”

“제이론 자작님 맞으시지요? 전하께서는 누구도 차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려 주십시오.”

근위 대장의 냉정한 말투에 전의를 상실한 자작이 웅얼거리며 물러섰다.

지위를 내세워 나섰던 자작으로서는 기가 죽는 순간이었다. 결정적으로 황실 근위 대장은 작위가 백작이었다. 게다가 황태자의 명령을 직접 받았다고 하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 명씩 신분 조사를 하려면 꽤 시간이 오래 걸리리라는 걸 예상한 사람들은 이제 되도록 빨리 이 과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군사령관의 안내를 받아 빠져나온 클라이드와 에디스는 끝까지 얼굴을 노출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위신이며, 안전 문제며, 여러모로 말이 많아질 게 뻔했다. 또한 훗날 잠행을 다니는 데도 지장이 생길 터였다.

에디스는 아까 날카로운 것에 찔린 노예를 근위대 군인이 살펴보고 있는 걸 확인했다. 자신은 잠깐 짬을 내어 닉슨이 데리고 있는 노예에게 다가갔다.

오물이 잔뜩 묻은 머리칼은 무슨 색인지도 알아볼 수 없게 더러웠고, 꺼멓게 죽어 가는 얼굴색은 인종조차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노예의 건강 상태가 더 나빠 보였다.

“닉슨, 날 따라 돌아오지 말고 우선 이 사람을 돌봐 줘. 내 집으로 데려가되, 중병이 들었을지 모르니까 의사를 바로 불러.”

“알겠습니다, 공작님.”

“막 다루지 마. 난 그런 거 싫어해.”

“네? 아, 네.”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젊은 사내를 눈여겨봤는데, 얻어맞은 자국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에 손수건을 건네줬다.

사내의 혼탁하던 눈빛이 일순간 선명해졌다.

“이걸 왜 제게……?”

신기하게도 사내가 원주민어가 아닌 라그란드 제국어로 말했다. 외국어를 할 줄 아는 노예는 사회자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듯이 홍보해서 값을 더 받곤 했는데, 이 사내는 그런 소개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일까. 에디스는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당장은 아픈 사람을 붙들고 얘기를 길게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피 좀 닦으라고.”

어벙한 표정이 된 사내에게 떠맡기듯이 손수건을 쥐여 주고 돌아섰다.

그동안 클라이드는 단상 뒤에 줄지어 꿇어앉은 노예 상인을 만나러 갔다. 그들 대부분은 뱃사람으로 보이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었고, 사회자처럼 어설프게 부유층 흉내를 내려는 자들도 있었다.

군사령관이 노예 상인의 우두머리를 찾아 데려왔다.

우두머리는 클라이드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납작 엎드려 빌었다. 간단한 심문에도 모른다는 말만 연거푸 반복했다.

“이자가 우두머리가 맞는가?”

답답한 김에 클라이드가 사령관에게 확인차 물었다.

“이곳에서는 제일 높은 놈 같았습니다.”

“진짜 보스는 오지 않았나? 왜 이리 신통치 못해.”

에디스는 클라이드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혼잡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우시장 정문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때 부서진 나무 대문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거드름 피우는 팔자걸음, 품이 넉넉한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뱃살. 퉁퉁한 턱에 툭 튀어나온 눈두덩이는 얼핏 봐도 질 나쁜 자의 인상이 풍겼다.

바로 에디스의 아버지가 큰돈을 끌어다 쓴 사람이었다.

요즘도 그녀가 매달 꼬박꼬박 이자를 내고 있는 채권자. 즉 빚쟁이였다.

“어?”

“어라. 제임스.”

쟤가 왜 여기서 나타나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는 우시장에 들어오자마자 멈칫했다. 단춧구멍만 한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에디스와 시선이 마주쳐서 놀라더니, 곧이어 시장 전체를 쭉 훑고 나서는 입을 벌리며 경악해 버렸다.

뒤따르던 무리도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서로 옷자락을 당기며 머뭇거렸다.

재빨리 상황을 판단한 제임스가 방향을 틀었다.

“야, 다들 튀어!”

제임스 일행이 우르르 뒤돌아 달아났다.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을 밀쳐 넘어뜨린 후 문기둥을 돌았다. 부산한 발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날렸다.

군인들이 황급히 쫓아나갔다. 에디스도 엉겁결에 그 뒤를 따랐다.

구시가지는 도로가 구불구불했다. 직선으로 뻗은 길이 짧고 골목이 많았다. 제임스가 느린 달리기 속도로 바로 저 앞을 도망가는데도 이내 몸을 숨기고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에디스는 제임스가 어떤 사람인지 제법 잘 알고 있었다. 유독 높은 이자를 받는 대부업자이자 술집과 도박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자랑할 만한 업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법도 아니었다. 제임스가 아버지와 쓴 계약서에 하자가 있었더라면 그녀가 먼저 덤벼들어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노예 매매와 관련이 있다면?

이건 확실한 불법 사업이자 황실에서 중점적으로 단속하는 부분이었다. 저자가 달아난다 해도 나중에 사무실에 찾아가 조사할 수 있지만, 이 자리에서 잡는 것만 못했다.

현장 검거가 무조건 최고 아니던가.

내뺄 만한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같은 이유로 노예상들도 우시장에 죄다 꿇려 놨다.

“잡아요!”

군인들이 전력으로 달려 쫓아갔다.

발을 동동 구르며 에디스가 난리 치기 전부터 군인 일부는 추격하고 다른 일부는 총을 꺼내 들었다.

훈련을 잘 받은 황실 소속 상비군은 손놀림도 빨랐다. 능숙한 솜씨로 총을 장전하고 단각대를 세웠다.

“앗, 죽이면 안 돼요.”

우시장의 노예 매매가 끝날 때쯤 등장한 제임스는 누가 봐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손님일 리가 없었다. 목숨을 앗으면 곤란했다.

“발포하지 않았다가 놓치면 저희가 큰 벌을 받습니다.”

군인들이 조준한 총을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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