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소설들은 꽤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건 여주인공 서지우가 옆집 친구와 치고받고 하면서 미운 정이 고운 정으로 바뀌는 줄거리였다. 또 어떤 건 갑자기 만난 재벌 3세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소설에서 현실과 연관된 실마리가 조금씩 엿보였다.
“휴우, 대체 이 상황을 누구에게 도움받아야 할까요.”
클라이드는 지우의 이름이 들어간 책을 특히 신경 써서 읽었다.
여태껏 그는 에디스의 얘기를 믿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설마 하는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버젓이 책이라는 증거가 나타나는 바람에 마지막 남은 의심도 털어 내게 됐다.
최근 발간된 소설을 에디스가 읽었을 리도 만무했다. 발간일을 기준으로 봤을 때 그녀는 황궁을 나간 적이 없고 줄곧 클라이드와 붙어 다녔다.
“초현상을 연구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아서…….”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에 안타까워 그의 말꼬리가 차츰 흐려졌다.
“그 점성술사는 아직 페이튼의 집에 있다고 했죠?”
“응, 딱히 핍박받은 기미는 없었어.”
“불행 중 다행이에요.”
“술사가 앞을 못 보는 사람이니 스스로 탈출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그럭저럭 잘 대접받는 모양이더군. 식객처럼 머물면서 가끔 저택에 손님이 오면 유흥거리로 점을 봐준다고 해.”
“그런 목적으로 데려갔다면 제대로 계약을 할 것이지. 아이도 같이 갔어야 맞고요.”
“단순하게 점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겠지. 그건 분명히 납치였잖아.”
“정말, 페이튼의 속을 도통 모르겠네요.”
페이튼을 향한 에디스의 호감도가 최대치에서부터 수직 하락해 이젠 마이너스 수치까지 찍고 있었다. 얼굴만 반질반질하니 환했지 나머지는 죄다 쓰레기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간 건 분명히 범죄다.
반면에 클라이드는 이것저것 뒷수습하며 주변 사람까지 챙기는 면을 보여 줬다.
“손녀라고 하던 아이는 우리 쪽에서 안전하게 데리고 있어.”
“그러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점성술사와 만나게 해 주고 싶어도, 상황이 너무 괴상해서 탈이라도 날까 봐 걱정돼요.”
“에디스, 네 문제에 관해서는 우선 다른 점성술사를 알아볼까?”
마음 같아서는 저도 그러고 싶지만,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려웠다. 언덕을 오르던 도중에 원작이 보였다는 건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뜻 같았다.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요.”
긴 푸념과 함께 두 사람은 계속해서 책을 뒤졌다.
방대한 분량 속에서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찾기란 좀체 쉽지 않았다. 남의 손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두 사람은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부지런히 책장을 넘겼다.
얼마 후 클라이드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이만 노예 시장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멀리서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에디스는 깊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넌 여기에 계속 있을래?”
“아뇨, 같이 갈래요.”
그동안 근위 대장이 사람과 마차를 더 불러왔다. 뒤에 도착한 마차에 책이 차곡차곡 실렸다.
클라이드는 제 턱을 짚으며 잠시 고심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책을 찾는 건 레이먼드 경을 시키면 되겠군.”
“아티한테요?”
“경이 벌인 사업 중에서 출판사도 있지 않나?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어. 그곳을 통해 에디스가 필요한 책을 구하게 하면 좋을 것 같네.”
아드리안이라면 틀림없이 도와줄 것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 비밀도 꼭 지키겠지.
이런 부류의 책을 수집하려는 이유를 그가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만 않는다면 구태여 감출 필요는 없다.
“그런데 클라이드는 언제까지 아티를 성으로 부를 셈이에요?”
“그야 뭐……. 경으로 부르는 게 편한걸.”
“아티는 당신이랑 사귄다고 소문난 오메가잖아요.”
“보는 눈이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
“눈속임만 하다간 언젠가 들통날걸요. 입에 착착 붙게 평소에도 아드리안이라고 해야지요.”
부루퉁하게 클라이드의 턱이 튀어나왔다. 마뜩잖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가, 그녀가 한 번 더 재촉하며 옆구리를 찌르자 마지못해 아드리안이라고 중얼거렸다.
“에디스는 어지간히도 나와 아드리안을 붙여 주고 싶은가 봐.”
“좋은 친구예요. 사람 됨됨이도 훌륭하고요.”
“아직도 내가 아드리안과 특별한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정말 허튼 기대일 텐데.”
“원작과 너무 많이 어긋나서 이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아티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어요. 클라이드도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해 봐요. 황태자로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은 장사를 접은 상점처럼 휑해진 서가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장소를 옮기는 동안 함께 소설 얘기를 나눴다.
이번에 발견한 현상을 굉장히 의미 있게 받아들였지만 소설의 설정만으로 뭔가를 유추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황궁에 방을 하나 비워서 로맨스 소설만 채우기로 했다. 기왕 판을 벌이려면 오늘 수집한 것 외에 다른 배경의 소설도 두루 알아보자고 했다.
빙의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어쩌다 보니 에디스 전용의 로맨스 소설 도서관이 생길 것 같았다.
* * *
문을 닫은 우시장에 은밀히 사람이 몰려들었다.
구시가지에 자리 잡은 옛날 우시장은 장소가 협소했다. 시의 주도 아래에 더 넓고 목이 좋은 곳에 새 우시장을 차리게 되자 이곳은 자연스럽게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
폐쇄된 장소에 다른 시장이 들어설 예정이지만 아직은 휑뎅그렁하게 남겨진 땅에 불과했다.
한낮의 해가 가장 쨍쨍할 때가 개장 시간이었다.
에디스와 클라이드는 아무 관계없는 행인인 척하며 길을 걷다가 나무문이 열린 입구로 불현듯 방향을 꺾었다.
탁 트인 공터에 제법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같이 온 일행끼리 통나무로 부실하게 만든 의자에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불법 거래를 하러 왔다는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클라이드와 에디스도 손님 무리의 뒤쪽에 모여 앉았다.
행여나 아는 이를 만날까 봐 외모도 바꿨다. 칙칙한 피부톤으로 화장한 후, 클라이드는 스카프를 두르고 에디스는 베일 달린 모자를 썼다. 얼굴을 가린 손님이 꽤 많아서 둘의 복장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시작 직전이 되니 부쩍 손님 수가 늘었다. 이젠 두 사람의 뒤에도 사람이 차곡차곡 덧붙여졌다.
어떤 우락부락한 남자가 사람들에게 손바닥만 한 번호판을 나눠 주고 다녔다. 에디스는 61번, 클라이드는 62번이었다.
번호판 배부가 끝나자 사회자로 보이는 자가 단상에 올라왔다.
“이곳까지 와 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 반갑습니다. 어려운 발걸음을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훌륭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편히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장황한 인사말이 길게 이어졌다. 마치 귀금속이나 보물 경매라도 된다는 듯 점잔을 빼며 고상하게 굴었다. 싸구려 정장을 입은 사회자가 과장되게 설명하니 왠지 허풍처럼 들렸다.
“경매 방식은 일반적인 규칙을 따르겠습니다. 사고 싶은 상품에서 번호판을 드시면 됩니다. 주의해 주실 규칙이 있는데, 낙찰받고 나서 한 시간 내로 결제하지 않으면 낙찰이 취소됩니다.”
사회자가 돈에 초점을 맞춰 강조했다.
“명심하십시오. 경매가 끝나고 나서 한꺼번에 결제하려고 하시면 늦을지도 모릅니다. 낙찰받고 곧바로 계산하시길 추천합니다.”
한몫 단단히 잡으려는 속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들이었다.
곧이어 몇 명의 노예가 사슬에 연결된 채 단상에 올랐다. 채찍을 허리 뒤춤에 찬 관리인이 뒤따라 올라와 거칠게 노예들을 다뤘다.
그때부터 눈 뜨고 봐 주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관리인이 노예의 신체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예의 입을 벌려 치아를 확인했다. 곧이어 팔다리를 툭툭 쳐 몸놀림에 이상이 없음을 보여 줬다.
사람을 가축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짓을 하면서도 누구도 거리낌이 없었다. 사회자는 흥을 돋우려는지 검사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소개했다.
“집안일이며 밭일이며, 전천후로 쓸 수 있는 노예입니다. 이빨도 이 정도면 튼튼하지요.”
경매가 곧바로 시작됐다. 시작가부터 번호판을 드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액수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최종 낙찰가는 시작가보다 한참 오르게 됐다.
낙찰받은 자가 하인에게 돈주머니를 넘겨 곧바로 결제를 진행했다. 순식간에 사람을 사고파는 과정이 끝나 버렸다.
에디스는 역겨움이 치밀어오르는 목구멍을 꾹 눌렀다.
“도저히 못 봐 주겠네요.”
본심으로는 험한 욕을 하려 했지만 최대한 자제해서 투덜거렸다.
“에디스, 지저분한 건 못 보나? 조금 잔인해서 그런가?”
“그런 차원이 아니라요.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는 게 짜증 나서요.”
“음, 불편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제국에서 아무리 노예 제도가 폐지된 지 오래라 하더라도 이래저래 접하게 되니까, 에디스도 전혀 모르진 않을 텐데.”
“아는 것과 눈으로 보는 건 느낌이 다르네요.”
노예를 산 손님들이 거래하는 한편으로 다음 노예들이 올라왔다. 첫 번째 그룹보다 약간 상태가 나았지만, 여전히 꾀죄죄하고 다 죽어 가는 모습이었다.
사회자가 열변을 토하며 노예의 키가 얼마나 큰지 강조하는 건 들리지 않았다. 얼굴색이 심하게 나쁜 노예 한 명은 병에 걸린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살던 세계는 사람을 이렇게 다루지 않아요.”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클라이드가 그녀의 얘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 에디스의 세계가 어떤지 궁금하네.”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줄게요. 그보다 저기 두 번째에 선 청년이 아파 보여요.”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듯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비슷하게 보였던지 청년의 경매에는 거의 번호판이 올라오지 않았다.
에디스는 팔꿈치를 세워 자신의 번호판을 내밀었다.
조금 놀란 클라이드가 그녀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턱없이 낮은 값에 청년 노예가 에디스의 손에 낙찰될 때까지 가만히 지켜봤다.
그녀가 돈주머니를 자신의 호위인 닉슨에게 넘겨 계산을 맡겼다.
“닉슨, 될 수 있으면 저 노예를 바로 데리고 나와서 쉬게 해.”
“예, 공작님. 여기로 데려올까요?”
“그러기엔 좀 뭣하고 공터 저쪽에 있으면 될 것 같아.”
닉슨은 알아서 판단하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에디스의 명이라면 껌뻑 죽는지라, 시킨 대로 무사히 청년 노예를 구출해서 공터 구석에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