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72)화 (72/129)

72화

다음 날, 에디스는 만약을 대비해 페로몬 억제제를 먹었다.

혹시나 해서 클라이드가 수시로 곁에 와 킁킁거렸다. 코로 음미하듯이 한참이나 냄새를 맡은 후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훌륭해. 드디어 조절법을 터득했군.”

에디스는 그를 사납게 째려봤다. 험난한 행군을 마친 병사가 대장에게 울분을 드러내는 장면과 비슷했다.

“클라이드 너무한 거 알죠?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어. 완전히 날 궁지로 몰아넣고 해내라는데 어떻게……. 하아.”

“궁지라니. 깔끔하게 잠행을 포기하면 되는 문제였잖아.”

“싫거든요! 같이 갈 건데요!”

버럭 성을 내 버렸다. 사실은 시위를 겸해서 삐진 척한 거지만.

삐죽거리는 입술의 어디가 그의 마음에 들었던지, 클라이드는 살갑게 올린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려고 했다.

에디스는 밀어내듯이 툭 쳐 냈다. 클라이드의 부드러운 눈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미소를 띠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페로몬 조절은 말을 타는 것과 비슷해. 한번 터득하면 좀체 잊히지 않는 습관이 되거든. 사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칠 일도 아니었는데, 에디스는 특이한 케이스니까 더 훈련이 필요했던 거지.”

“훈련을 차분차분 진행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흘겨보는 눈가에 기어코 클라이드의 입술이 살짝 찍혔다.

“에디스는 목표가 뚜렷하면 성과가 잘 나는 스타일이잖아.”

이 남자, 자꾸 집적거리고 스킨십을 시도하려 한다. 에디스는 두 손을 휘휘 저어 악마의 유혹을 애써 떨쳐 냈다.

잠행에 나서면서 클라이드는 하루 일정을 통째로 비웠다.

두 사람은 제법 이른 시각에 시내로 향했다. 큰맘 먹고 시간을 낸 거라서 나온 김에 여기저기 돌아다닐 셈이었다.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요즘 도시의 분위기는 어떤지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몇 군데의 번화가를 차례대로 돌았다. 마차를 탄 채 거리 분위기만 살피며 지난 곳도 있고, 잠시 내려서 차분히 길을 걸은 곳도 있었다.

평범한 부유층의 복장을 한 그들은 어딜 가도 무난하게 행동한 덕에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길 폭이 좁은 거리를 지나던 중, 서점을 발견했다. 책을 주 종목으로 다루는 곳인지 책방이 골목마다 쭉 늘어서 있었다.

“클라이드, 저기 봐 봐요. 책이 가득해요.”

“여긴 유명한 책 골목이야. 에디스는 한 번도 안 와 봤어?”

“아, 여기구나.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책을 사러 올 기회는 없었지만요.”

용돈이 부족해 아카데미 도서관만 이용했으니 책 골목에 나온 적도 없었다. 에디스가 창밖으로 얼굴이 나갈 정도로 열심히 구경하자 그가 마차를 멈췄다.

“내친김에 골목을 한 바퀴 돌아볼까?”

“좋죠.”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먼저 거리로 나섰다.

클라이드가 딱 붙어서 걸으며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을 사이사이 끼우고 손등까지 눌러 감싸듯이 잡았다.

“길 잃어버리겠다. 손을 잘 잡고 다녀야지.”

살가운 말을 참 잘도 하는 남자다. 길이 꼬불꼬불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붙어 다닐 정도는 아닐 텐데.

어이없어서 쳐다보니, 그는 얼굴까지 두꺼운지 천연덕스럽게 씨익 웃었다.

“내가 미아가 될 만큼 어린애는 아닌데요.”

“어른도 헤맬 수 있어.”

그냥 손잡고 싶다고 말하면 안 될까. 조금 우기다시피 하는 대화였지만, 클라이드가 손을 조몰락거리는 짓이 귀여워서 봐줬다.

책 골목은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상점마다 책을 밖에 내다 놓고 팔았다. 어떤 건 볕에 말리기 위해 펼쳐 놓은 책도 있었다. 온갖 종류의 책을 가리지 않고 구비해 놓은 상점이 있는가 하면, 특정한 종류의 책만 모아 놓은 상점도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는 소설책을 골라 가격을 물었다. 현실 세계만큼 쉽게 살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웬만한 책은 서민의 주머니 사정으로도 가능한 값이었다. 그래서 책이 이렇게 많은 걸까. 행인 중에는 손에 포장한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인쇄 상태가 조잡한 책을 들고 흥정하는 손님과 장사치를 구경했다. 그 책방은 연애소설만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었다.

“오, 여기다.”

로맨스 소설 덕후 N 년 차 에디스,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클라이드가 쥐고 있던 손을 야박하게 떼어 낸 후 켜켜이 쌓인 책에 덤벼들었다. 제목만 쭉 훑어도 벌써 독서 에너지가 넘치려고 했다. 이 중에서 뭐 읽을까? 마음에 드는 게 너무 많다.

발이 저절로 상점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고른 책을 옆구리에 착착 끼우면서 다른 책은 또 뭐가 있나 열심히 훑는 동안, 어느새 영혼이 절반쯤 빠져나간 몸은 책방 깊숙한 서가를 휘적휘적 헤매고 있었다.

뒤통수에 대고 클라이드가 한숨을 흘리든 말든 책을 뽑아 드는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이 책방이 마음에 들어?”

“네, 정말요.”

“원하는 만큼 사 줄게. 천천히 골라.”

이 표현은 어디선가 많이 읽어 본 듯했다. 바로 남주가 여주한테 펑펑 돈을 써 댈 때 나오는 멘트다. 보통 옷 고르면 ‘행거 끝에서 끝까지 전부’ 이러면서 블랙 카드 딱 내밀지 않나?

“그럼 난 책장 끝에서 끝까지.”

“뭐?”

“이쪽의 신간 책장이 아주 핫하네요. 끝에서 끝까지 사 줘요.”

그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허리까지 구부리며 폭소한 후, 여전히 미소가 남아 다물지 못한 입을 손등으로 막았다.

“좋아, 이 책장을 통째로 사지.”

뒤따르는 근위 대장에게 눈짓하자, 대장이 책방 주인과 가격을 흥정했다. 주인은 통 크게 쏘는 손님 덕분에 좋아 어쩔 줄 모르면서 할인을 팍팍 해 드리겠다고 장사 수완을 펼쳤다.

에디스가 계속 책을 꺼내 들고 클라이드가 기계적으로 받아 드는 행동이 반복되자, 주인장이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였다.

주인은 댁까지 날라다 드리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공짜 배송 서비스는 사양했다. 글래스터 궁전 황태자 궁 5층 별실이라고 주소를 적어 줄 수는 없으니.

반대편 서가로 넘어가니 신간 책장이 또 있었다. 이번에는 사 달라고 말도 하지 않았는데 클라이드가 알아서 결제했다.

이쯤 되면 남주 자격이 있다. 인정.

“그런데 잠깐만요.”

책 중에서 유독 에디스의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았다.

<미래형 피폐물 속 엑스트라로 빙의했다>

“미래형? 요즘은 SF가 유행인가?”

그 옆의 책도 제목이 특이했다. <역하렘으로 굴려지는 소시민 J양>

“소시민?”

<팀장님, 말 타 보셨어요?> 이건 또 뭐야.

“이 세계에서 팀장이라는 직책이 있나?”

물음표가 꼬리를 물었다. 말을 타는 건 아마도 야릇한 신을 암시하겠지만 하필 팀장이라니.

그녀는 다른 책을 다 내려 두고 이상한 느낌이 드는 세 권을 팔뚝 위에 올렸다. 먼저 미래형 피폐물 설정의 책을 들춰 봤다.

“이, 이건.”

첫 페이지부터 말이 없는 마차가 등장했다. 미지의 힘으로 움직이는 마차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사람들은 미지의 힘이 깃든 물건을 통해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연락할 수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황궁보다 훨씬 높은 건물이 도시를 가득 메웠다.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건물이었다.

“무슨 일이지?”

읽고 있던 페이지를 클라이드가 넘겨다봤다.

“이 설정은 내가 살던 세계와 비슷해요. 아니, 똑같아요. 표현 방식이 이곳의 개념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지, 다를 게 없어요.”

“어디 딴 것도 봐 봐.”

클라이드가 소시민 J양 책의 중간을 넘겼다.

무작위로 연 페이지를 보자마자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우?”

“네?”

“이 책의 여주인공 이름이 지우야. 에디스의 예전 이름도 서지우라고 했잖아.”

둘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로 마주 봤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라그란드 제국에서는 누구도 이름을 지우로 짓지 않는다. 소시민 J양 소설도 미래 배경의 가상세계라서 이름을 특이하게 설정한 듯했다.

마지막으로 팀장님 소설을 들춰 봤다. 남주가 여주의 직장 상사인데 이름이 유민준이었다.

“유민준도 아는 사람이야?”

“같은 팀 팀장님이에요.”

클라이드가 깊은 침음성을 터뜨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책은 단순한 소설책이라고 볼 수 없어. 분명히 에디스와 관련이 있을 거야.”

알콩달콩한 오피스 러브 스토리가 펼쳐지는 팀장님 소설은 공교롭게도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지우가 아니었다. 반면에 사무실의 설정이 너무나 현실과 흡사했다.

에디스는 망연한 심정으로 책장에 꽂힌 책 중 비슷한 종류를 죄다 꺼냈다. 먼저 고른 세 권 외에도 근미래 배경의 소설이 제법 많았다.

때마침 서점 주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다가왔다.

“손님, 지금 들고 계신 건 요즘에 잘 나가는 책입니다요.”

“그래요?”

“원래는 안 그랬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SF 느낌이 나는 소설이 인기더라고요.”

“최근 몇 년이요?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세요?”

“한 삼, 사 년 됐나. 대충 그 정도입니다.”

이곳 세계로 에디스가 온 시점이 4년 전이었다. 기이하게 겹치는 상황이 너무 많았다.

서점 주인은 심각하다가 못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두 손님을 눈치 보기에 바빴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나 전전긍긍했다. 썰렁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만한 얘기를 재빨리 떠올려 헤헤거리며 떠들었다.

“먼저 고르신 세 권이 반응이 좋고요, 나중에 집으신 건 독자 반응이 그냥 그렇더군요.”

“이쪽이 더 유명 작가의 작품인가요?”

“유명세는 그다지 대단치 않지만 조금 더 창의적으로 썼다고들 하던데요.”

에디스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며 책을 뒤적였다. 세계관 설정만 봤을 때 미래형 피폐물 소설이 가장 현실과 가까웠다. 그래서 창의적이라고들 칭찬하는 건가.

그동안 클라이드는 근위 대장에게 사람을 더 부르라고 지시했다. 서가에 있는 책을 아예 죄다 쓸어 담기 위해서였다.

“주인장, 이것과 비슷한 종류의 책이 더 있나?”

“새로 나온 건 여기에 꽂힌 책이 전부입니다.”

“삼, 사 년간 SF 장르가 유행했다면 이미 절판된 것도 있을 텐데.”

“그건 헌책방에 있겠지요.”

서점 주인에게 그만 물러가라 한 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책을 뒤졌다. 현실 세계와 이 세계, 소설의 연결고리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찾아내려고 애썼다.

라그란드 제국은 저작권이란 개념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전문을 통째로 베끼다시피 한 경우라도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고 책이 팔리지 않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소설과 거의 비슷하게 쓴 소설이 상당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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