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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71)화 (71/129)

71화

페이튼은 줄곧 정문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주목하고 있었다. 반대편 골목 어귀에 서 있는 마차도 눈여겨봤다. 망원경으로 확인하니 마차 창문을 여닫는 손이 여자 손이었다.

‘에디스가 직접 왔군. 아마 황태자도 같이 있을 테지.’

점성술사를 빼돌린 데 대한 파장이 생각보다 커서 페이튼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사복을 입은 근위병까지 동원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에디스를 실은 마차가 줄곧 머물러 있는 것도 뜻밖이었다.

‘한낱 점성술사한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원래 페이튼의 속셈은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황태자가 점을 보지 못하면 그냥 돌아가겠거니 싶었다. 살짝 깽판 놓는 것. 그게 페이튼이 의도한 전부였다.

별점을 치는 점성술사와는 그동안 한 번 더 만난 적이 있었다. 에디스와의 궁합을 본 이후에 페이튼의 집에 술사가 찾아왔다. 술사를 그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무심히 공작 신분을 흘린 모양이었다.

술사는 에디스를 꼭 만나고 싶다며 간곡히 페이튼에게 부탁했다.

얘기하는 사이사이 점성술사가 에디스를 굉장히 대단한 사람인 양 추켜세워서, 그는 듣기가 좀 껄끄러웠다. 몇 마디 나누다가 금세 그자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우연히 새로운 소식을 접했다. 황태자 클라이드도 같은 점성술사에게 예약했다는 내용이었다. 원래는 황궁의 일이 외부로 새어 나오는 경우가 드문데 이번만은 운이 좀 따랐다. 소개인인 천문학자가 클라이드에게도 똑같이 소개해 준 것이다.

내버려 둘 수도 있었지만, 점성술사가 에디스에게 너무 열렬히 반응을 보이는 게 싫었다.

상황상 황태자가 점성술사에게 예약하면서 에디스를 데려온 듯했다. 그들 둘이 사귀는 사이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으니, 에디스도 함께 점을 볼 가능성이 컸다.

페이튼은 에디스가 구국의 영웅이네, 세계를 바로 세울 위인이네 떠들던 술사를 떠올렸다. 점을 보고 그녀의 콧대가 높아지면 혼담은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날짜에 맞춰 점성술사를 빼돌렸다.

‘황태자는 없어진 사람을 대신 찾아 주려는 자비를 베풀었나? 아니면 반드시 점성술사를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도 있나?’

술사를 하룻밤만 구금해 놨다가 풀어 줄 요량이었는데, 이쯤 되니 당분간 집에서 내보내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제국에서 가장 용하게 별점을 친다는 점성술사다. 하늘이 내려 주신 신기라던가. 다른 술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고 호평이 자자했다.

그래도 황태자가 아쉬우면 다른 점성술사를 찾겠지. 다른 놈은 에디스를 그만큼 띄워 주지 않을 테니까.

* * *

불법 노예에 관한 근황 보고서가 부쩍 늘고 있었다.

정무부에서 올리는 기획서에도 이 내용이 자주 담겨 있었다. 더 큰 부작용이 생기기 전에 황실 차원에서 조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압을 받기 쉬운 정무부 문건은 자주 황태자의 의도와 어긋났다. 애초에 수발 시종의 자리가 생긴 이유가 그것이니, 에디스가 피로하게 중복 작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 노예 문제만 해도 그랬다. 상황을 파악하는 흐름은 비슷하지만 대책에 관해서는 에디스와 정무부의 판단이 달랐다. 정무부에서는 불법으로 외국인 노예를 부리는 소유자를 적발할 때 무거운 벌금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유입 경로를 찾아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했다.

클라이드는 별실 책상에서 갓 작성한 에디스의 의견서를 읽고 손끝으로 툭툭 튕겼다.

“역시 너는 내 분신.”

“마음에 든다는 얘기죠?”

“다소 과격하게 해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에디스가 딱 그렇게 적어 줬네.”

“그럼 오늘은 진짜로 퇴근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또, 또 붙잡으려고 그런다.

클라이드의 얄팍한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이번엔 무슨 일인지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길들여진 짐승처럼 홀리고 있었다. 이다음의 얘기가 야수 앞에 당나귀 넓적다리 살을 흔드는 격이 될 것을 예상했다.

아니니 다를까 그가 못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직속 정보책이 가져온 얘기가 있는데 말이야.”

에디스는 속셈이 뻔한 그의 속살거림에 홀라당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알면서도 당한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내일 대규모 노예 시장이 열릴 예정이라는군. 그것도 정기적으로 열리는 모양이야.”

“노예 시장이요? 말도 안 돼. 버젓이 경시청이 있고 범죄를 막는 경찰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그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렇게 시끄러운 것 아니겠어?”

악마의 유혹에 팔랑팔랑 귀가 얇아졌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불법 노예를 거래하는 시장의 전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시게요?”

“내가 손님으로 위장하고 몰래 다녀올까 해.”

“앗,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가서 상황만 살피고 올 거야. 증거로 노예 한 명쯤 거래하고.”

“그래도요. 누가 클라이드를 해치면 어떡하려고요.”

계획을 듣자마자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찡긋 눈썹을 치켜들며 웃는 그의 얼굴은 태평하기만 했다.

“나한테 잠행은 익숙해. 늘 다니곤 했는걸. 내가 쓰는 위장 신분도 여러 개 있어.”

클라이드가 숙련된 잠행 전문가라는 건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남의 이목을 피해 궁을 빠져나온 모습을 에디스가 본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

입은 옷에 맞춰 분위기도 금세 바꾸고, 바깥을 돌아다닐 때도 어리숙하게 행동하는 법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에디스가 근심 어린 눈빛을 지우지 못하자 어깨 위로 그의 다독이는 손길이 올라왔다.

“너무 걱정 마. 근위병을 넉넉히 대동하고 조심해서 잘 다녀올게. ”

하긴 철모르는 황족이 멋대로 날뛰는 상황과는 다르니, 신중한 클라이드가 괜한 호승심을 발휘하며 사고를 치진 않을 거야.

그런데 그의 얘기 중 한마디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만요. 지금 ‘다녀올게’라고 한 거예요? 나는요?”

“집에 간다며.”

지금 자신을 떼어 놓고 다녀오겠다는 건가. 장난해?

발끈한 에디스가 주먹을 쥐었다.

“노예 시장이 열리는 건 내일이라면서요. 그때까지는 당연히 돌아오죠. 아침 일찍 출근할게요.”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는걸.”

“무슨 문제요?”

그가 공연히 뻗대려는 수작인 줄 알고 대차게 들이댔다.

“에디스는 아직 오메가 페로몬을 컨트롤하지 못하잖아. 사방에 향기를 날리며 다닐 셈이야? 노예 시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오페라 하우스처럼 단독 테라스가 있다면 에디스의 페로몬을 숨길 수 있겠지만, 그런 요행을 바라기엔 너무 위험이 크지 않나?”

“하지만…….”

불끈 쥐었던 주먹을 풀 수밖에 없었다. 둘러댈 핑계를 찾았지만 오메가 페로몬 얘기는 전부 맞는 말뿐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기껏 떠올린 게 불쌍한 척하기 작전이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검지 손끝을 서로 콕콕 찍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최대한 안쓰럽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보고서 기안을 내가 했는데.”

“고마워. 에디스 제안대로 따라가려고 해.”

“아예 처음부터 내가 노예 시장 동향을 읽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정작 현장 상황을 살필 때 나만 쏙 빼놓는 건…….”

“하긴 그렇지만.”

그를 흘끔흘끔 올려다봤다. 설마 혼자 가진 않겠지. 같이 가기 전에 일부러 군기 잡으려고 이러는 거잖아. 조건을 까다롭게 건다든가.

“게다가 노예 상인의 배후 조직이 누군지 한창 조사하는 중이었잖아요. 이제 와서 나 없이 다녀오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책상 모서리에 기대어 서 있던 클라이드가 그녀의 올망졸망한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정 그렇다면 특훈을 할까?”

“어떻게요?”

“오늘 밤새도록 너와 내 페로몬을 주고받으면서 연습해 보자.”

“줄곧 쉽지 않았던 게 갑자기 될까요?”

“가만히만 있으면 넌 그리 진하게 페로몬을 흘리지 않거든. 지금도 별로 짙지 않아. 이따금 불규칙하게 뿜어져 나올 때가 문제지. 그리고 알파 페로몬이 옆에서 자극하면, 오메가 페로몬이 통제되지 못해서 네가 쉽게 반응하는 것도 문제고.”

“내 페로몬을 인지하지 못해서 진척이 느린가 봐요.”

“절실하게 원하는 게 생기면 달라지지 않을까? 페로몬 조절을 못 하면 에디스는 노예 시장에 못 가겠지.”

곤란한 조건이었다. 도통 자신 없는 걸 하룻밤 만에 해내라니.

“못됐어, 클라이드.”

“어때? 의욕이 넘치지 않아?”

타협은 없다는 듯, 그는 에디스가 완성한 보고서를 챙겨 들고 재빨리 별실 밖으로 사라졌다.

침대맡의 설렁줄을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들자 클라이드는 저녁 잠자리를 갖추게 했다. 2인분의 목욕물을 각각 준비시키고 특히 에디스의 시중을 서둘러 달라고 당부했다.

에디스는 책상 위로 푹 엎어졌다.

이럴 줄 알았지. 집에 못 가게 될 줄 알았어.

책상 제일 아래 칸 서랍에 고이 잠든 가방은 꺼내지도 않았다. 도리어 노예 시장 잠행에 따라가고 싶어 안달 난 자신이 있을 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옆방에서 씻고 침의로 갈아입은 후 황태자의 침실로 돌아왔다.

그녀와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클라이드와 이내 마주쳤다. 그의 약간 덜 마른 머리에 유난히 윤기가 흘렀다.

클라이드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에디스와 발끝이 닿는 거리에 멈춰 섰다.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또렷이 바라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그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곧은 눈빛에 부글부글 끓는 열기가 더해졌다.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도리어 더 뿜으면 어떡하지?”

“앗, 그러면 안 되는데.”

“내 냄새는 느껴져?”

에디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제법 클라이드의 알파 페로몬에 익숙해졌다. 그의 것을 자주 맡다 보니 요즘에는 다른 알파의 냄새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시원하면서도 달짝지근한 클라이드의 향기가 워낙 좋아서 그 외의 알파 페로몬은 맛없는 음식처럼 관심이 가지 않았다.

코 속으로 상쾌한 알파 향이 파고들었다.

“그러는 클라이드도 왠지 진해진 것 같은데요.”

“네가 유혹적이라서.”

자신이 꼬시는 중이었던가? 잘 모르겠네. 가만히 있었을 뿐인걸. 딱히 클라이드에게 불순한 의도는 없으니 괜히 하는 말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그의 숲속 같은 향이 차츰 폐에 가득 찼다.

페로몬의 영향인지 육신이 녹녹해지며 저절로 무릎에 힘이 빠졌다.

“정확히는…… 내가 널 유혹하고 싶으니까.”

에디스는 주춤주춤 앞으로 나섰다. 손과 발에 투명한 끈이 묶여 당겨진 기분이었다. 원초적인 의지에 이끌려 그에게 가까워진 후 자연스레 몸을 기댔다.

그의 쭉 뻗은 빗장뼈에 이마를 눌렀다. 순식간에 페로몬에 취해 혼미해진 머리가 넓은 어깨 위에서 건들건들 흔들렸다.

든든한 팔이 에디스의 겨드랑이를 지나 등까지 돌았다.

하지만 그는 힘을 써 부둥켜안지 않았다.

“그래, 우리…… 참아 보자.”

버팀대처럼 그녀를 부축한 채, 클라이드는 오메가 페로몬이 방만하게 뿜어져 나오는 목덜미에 입술을 지그시 찍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절제미가 도리어 그녀의 가슴속을 바싹 타들어 가게 했다.

“하아…….”

숨소리가 말라붙었다. 벌린 입 사이의 호흡도 건조했다.

동시에 두 사람이 고개를 바로 세웠다. 눈이 풀린 에디스는 뭔가를 요구하듯이 목선을 늘이며 턱을 높이 들었다.

“참아야……. 으응, 참아야 하는데.”

그녀는 마지막 남은 한 가닥 이성의 힘으로 오메가 페로몬을 느껴 보려고 했다. 타는 속을 눌러 앉히듯이 의식적으로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잘하고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딱히 오메가 페로몬을 거뒀다고 몸으로 느끼지 못했다. 대신에 클라이드는 번식기의 짐승처럼 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다가들려 했다.

가면 갈수록 분위기가 농밀해졌다.

달아오른 공기 속에서 그의 입술이 음사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돌겠다 정말. 이런 널 내가 참을 수 있을까?”

인내하기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클라이드가 등을 구부렸다.

명화같이 잘난 얼굴이 에디스를 덮쳤다.

그가 그녀의 턱을 엄지로 꾹 눌러서 입술 틈을 벌렸다. 고개를 비스듬한 각도로 기울이고 탐욕스럽게 입맞춤을 덤벼 왔다.

참을성 없는 알파 페로몬이 그녀를 절여 버릴 듯 분출됐다.

감정을 곁들여 내어놓는 알파 페로몬에 에디스는 안간힘 써서 저항했다.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렁거리는 속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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