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에디스는 소설 속 메인 스토리가 바뀔 것인가에 대해 꽃점을 쳤지만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걸 급히 떠올려서 둘러댔다.
“오후의 차 시간에 어떤 케이크가 나올지를 점쳐 봤어. 1번은 초콜릿 딸기 무스 케이크, 2번은 당근 케이크.”
“마지막에 1번으로 끝나지 않았나?”
“맞아.”
“설마 에디스, 당근 케이크 싫어해?”
“설마 너…… 좋아해?”
“얼마나 맛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케이크인걸,”
그때부터 둘이 격렬한 논쟁을 펼쳤다.
오랜만에 단둘이 보낸 시간이 꽃점과 케이크 덕분에 활기를 띤 채 마무리되었다. 서로를 대하는 게 이 정도면 나아진 듯 이따금 함께 웃기도 했다.
<8장. 점 보는 것 좋아하세요?>
요즘 들어 페이튼이 바빠 보였다.
그를 만나 할 얘기가 있던 에디스는 우연찮게도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지난번 국정 회의가 끝나고 나서는 그가 일찌감치 귀가하는 바람에 길이 어긋났다. 에디스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 그를 만나기 위해 따로 외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페이튼이 궁에 올 기회를 노렸다.
황태자의 개인 접견이 잡힌 날, 그녀는 접견실에 들어가려는 페이튼을 붙잡았다.
“페이튼, 이따가 나한테 시간 좀 내줄래요?”
그는 에디스가 반가워 죽겠다는 듯이 온갖 인사와 안부를 늘어놨다.
“오랜만입니다, 에디스. 오늘따라 눈부시게 아름다우시군요.”
주변에 사람도 많은데 사무적인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주춤주춤 다가오기까지 했다. 부담스럽지 않게 그녀의 팔목을 살짝 잡으며 친근함을 표했다.
분명히 그에게서 격한 호감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에디스가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난감하다는 태도가 돌아왔다.
“접견을 마치고 급한 일이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다음에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아, 바쁘세요?”
“정말 미안합니다. 에디스를 최우선으로 쳐야 하지만 어겨서는 안 되는 약속이라서……. 제가 나중에 꼭, 반드시 에디스를 초대하겠습니다. 이번의 실례를 사죄하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과의 표현에는 어떤 허점도 엿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요. 저도 여유롭게 외출할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네요.”
“그럼 제가 시간을 내겠습니다. 에디스를 만나러 궁에 다시 오도록 하지요.”
이렇게 정중히 사과했다면 날짜를 대충이라도 알려 줘야 맞지 않나? 하지만 페이튼은 에디스와 시간을 가질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말만 반복할 뿐, 언제 다시 보자고는 정하지 않았다.
마치 ‘언젠가 밥 한번 먹자’라는 빈말을 던지는 듯했다. 페이튼이 빙빙 돌리는 얘기가 실속 없는 느낌을 풍겼다.
저만치에서 클라이드가 두 사람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페이튼이 서둘러 접견실로 따라 들어가는 바람에 아무런 기약도 없이 대화가 끝이 났다.
접견 도중에는 짬짬이 황태자의 뒤에 선 에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페이튼에게서 아쉬움이 역력히 느껴졌다.
그의 행동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말 바빠서인가?
클라이드는 페이튼의 시선이 딴 데로 흐르는 걸 볼 때마다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그레이브즈 경, 그대의 상회에서 제국에 들여오는 사탕수수의 물량이 지나치게 많다고 보지 않나?”
“황송합니다, 전하. 제가 다루는 것은 대부분 수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물가가 날뛰지? 그대의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영향이 없다고 하기엔 어렵지 않나.”
“잠시 항구에 선적해 둘 때 빼돌리는 자들이 있는가 봅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태자가 까칠하게 시비를 걸어 와도 페이튼은 고분고분 용서를 빌며 얘기를 받아넘겼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재차 에디스를 흘끔거렸다.
오늘 페이튼이 궁에 온 목적은 황태자 접견이 아니었다.
주된 목적은 에디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저를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걸 진작부터 눈치챘다. 첫 만남에서는 제법 호감을 드러내길래 페이튼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며, 에디스의 관심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페이튼은 여전히 그녀와 결혼할 계획이었다.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에디스는 가장 큰 흑자를 얻을 아내감이었다. 제국 안팎을 모조리 뒤져서 따져 봐도 마찬가지였다.
귀족파의 노인네들조차 이 점을 인정했다. 독립이라는 헛소리를 해 대긴 했지만 케츠모리스 가의 영지가 지리적인 장점을 가졌다고 입을 모았다.
심지어 대수롭지 않게 점을 쳤던 결과조차 같았다. 별점을 치는 점성술사는 에디스를 극찬하기에 바빴다. 제국을 구할 인재라고 했던가, 아니면 영웅이라고 했던가.
또한, 에디스는 이제 확실한 오메가였다. 조금 전에 마주쳤을 때 페로몬을 선명하게 맡을 수 있었다.
에디스는 줄곧 오메가 성향을 숨기다가 뒤늦게 드러내려는 걸까? 황태자의 페로몬도 함께 풍겼는데 둘이 깊은 사이인가? 사정이 복잡해 보이고, 그녀에게 페로몬을 묻힌 황태자에게 불쾌감도 생겼다.
오메가 페로몬을 유감없이 뿜어내게 되면서 그녀는 더 외모가 살아났다.
원래는 귀여운 쪽이었는데 이젠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그레이브즈 경이 집중을 못 하는군. 이렇게 설렁설렁한 자세로 나올 거면 자리를 끝내도록 하지.”
페이튼은 접견 태도가 불량한 자신을 탓하는 황태자가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 에디스가 훨씬 신경 쓰였다.
“송구합니다. 시중에 커피값이 싸지는 건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창고 도둑이 있는지 한번 검토하겠습니다.”
황태자는 사탕수수를 들먹였지만 자신은 커피로 대답을 받았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에디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을 쟀다.
나가는 길에 그녀에게 붙들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한창 에디스에게 자신의 비호감 수치가 높을 때라서 되도록 만남을 피하는 편이 나았다. 매력을 발산할 이벤트를 만들고 그녀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그녀가 시간 좀 내어 달라고 할 때, 무슨 용건인지 듣지 않아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파혼 얘기를 들으면 다시 혼담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기 까다로워질 것이다.
페이튼은 파혼당하지 않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다.
그녀에게 자신을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서둘러 내뺐다.
* * *
물가가 들썩이는 원인이 페이튼이라고 일러바친 사람은 사실 에디스였다.
여러 기관에서 올라온 현황 보고서를 검토하고 시청 관계자에게 따로 서신을 보내 답변도 받았다. 콕 집어서 범인을 지목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유력하게 그레이브즈 상회와 연관이 있어 보였다.
탐정 놀이 하듯이 이 사건의 뒤를 캐는 게 재미있었다.
물가 상승은 불법 노예가 늘어나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배에 노예와 사탕수수, 커피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느닷없이 페이튼만 콕 집어 닦달하면 뒤탈이 생길 수 있으니, 에둘러서 요즘의 물가부터 들먹인 것이다.
에디스는 별실에 처박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언제나 그렇듯이 귀족파는 외따로 행동하지 않았다. 페이튼의 상회 한 군데뿐만 아니라 그의 졸개들이 줄줄이 최근의 동향에 엮여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으악, 깜짝이야.”
바로 귀 옆에서 소리가 들려서 화들짝 몸서리쳤다. 클라이드다.
“돌 조각상이라고 해도 믿겠네. 엉덩이에 땀 안 차?”
“놀랐잖아요. 인기척 좀 내지.”
“이름을 세 번 불렀고 핑거 스냅은 열 번쯤 했어. 커피도 내려서 갖다 놨는데 안 마시네?”
책상 모서리에 찰방찰방하게 커피가 채워진 잔이 놓여 있었다. 그게 그 자리에 오른 줄도 모르고 펜대로 이마를 두드리며 고심했나 보다.
“아니, 이게요. 탈탈 털어야 튀어나올 것 같아요. 지난번 접견처럼 은근히 찔러 봤자 소용없어요.”
“에디스의 다음 목표는 시종장이야?”
“네?”
“사무관보다 높은 단계는 시종장밖에 없잖아. 제일 위로는 시종장관이 있지만, 그건 황제를 보필하는 자리니까 내가 내려 주지 못하지.”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또 이렇게 의욕을 불태우시나.”
지금의 시종장이 들으면 좌절해서 그 자리에서 엎어질 만한 발언이었다.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인데 자신이 제칠 생각은 한 적 없었다.
“클라이드가 만들어 준 출세주의자 설정은 언제쯤 끝나요?”
“설정이라니. 난 있는 그대로를 알려 주는 거야. 에디스가 또 귀족파의 힘을 누르는 데 한몫하게 되면, 내가 가만히 있어도 도리어 욕먹어. 포상을 해야 한다고.”
그녀의 입가에 썩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포상이 겁나서 일도 못 하겠네요. 인자하신 시종장님이 낙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요.”
아 몰라. 클라이드가 알아서 하겠지.
에디스는 여태 작성한 보고서의 마지막 장에 빠르게 의견을 추가했다. 그러고는 부채질하듯이 파닥파닥 종잇장을 흔들어 댔다.
“자, 여기요. 보고서 제출했으니 오늘은 퇴근합니다.”
총사 대회 이후로 새로 규칙을 정했다. 에디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해도 상관없다고. 다만 퇴근하려면 제대로 형식을 갖춘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약식으로 의견만 써낸 글이 중신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탓이었다. 몇 줄만으로 허를 찔리는 게 싫었던 자들이 공연히 트집을 잡았다.
에디스도 마침 느끼는 바가 있던 참이었다. 이젠 짬이 쌓였으니 남에게 책잡히지 않게 분량을 도톰히 채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클라이드에게 넘겨야 하는 보고서는 페이지 수가 넉넉해질 수밖에 없었다.
클라이드가 문서를 받아 들어 대각선으로 빠르게 훑었다.
“훌륭하군.”
“넵.”
책상에서 발딱 일어나 퇴근 준비를 하려 했다.
“그런데 말이야.”
“……?”
“내가 오늘 밤에 잠행을 나갈 예정이거든.”
“잠행이요?”
“밖에 나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이세계의 흐름을 읽는 별 점성술사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