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에디스는 약간 비척거리면서도 꿋꿋하게 몇 걸음 물러났다. 신선한 새벽 공기로 기분을 환기하니 한결 몸 상태가 나아졌다.
“나온 김에 몇 발만 쏘고 갈래요.”
총사 대회는 끝났지만 어느새 사격이 취미로 자리 잡았다.
재미있어 보여서 쏘기 시작한 이후, 이제는 명사수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 되었다. 대회의 준우승자이기까지 하니 당연하다.
어차피 새벽에 클라이드가 억지로 깨우는 바람에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기왕 하는 운동, 지루한 조깅보다는 승마와 사격이 훨씬 나았다. 매일 다른 코스를 따라 말을 달린 후 사격터에서 총을 들었다.
에디스는 장비를 실은 수레에서 화약과 탄환을 집어 들었다. 이제는 총을 손질하고 장전하는 것까지 손수 했다.
손가락만 한 화약통을 총구에 붓고 꽂을대로 찌를 때면 매번 손에 화약이 묻었다. 궁에 돌아가서 손을 박박 닦아야 냄새가 지워졌다. 그런 단점 말고는 남의 도움이 없이 총을 다루니까 한결 편했다.
사냥터에는 에디스를 위해 세밀한 과녁판이 새로 설치됐다.
그녀는 동심원 중앙에 다닥다닥 점이 찍히도록 총을 쏜 후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리 봐도 나 너무 잘하잖아.
현실로 돌아가면 올림픽에 도전해 볼까?
* * *
축제 이후로 처음 열리는 국정 회의.
오늘따라 하이에나 떼처럼 덤벼드는 귀족의 기세가 맹렬했다. 축제가 클라이드의 의도대로 성황리에 막을 내린 게 못마땅한 자들은 일부러 그의 심사를 비틀리게 할 얘기만 골라서 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황태자의 결혼 문제였다.
아드리안과 잘 풀리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탓이었다.
“전하, 레이먼드 백작과 자주 시간을 갖는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진지하게 만나고 계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런 건수는 페이튼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 남의 속을 긁는 데 재주가 있는 디트리안 백작이 절반쯤 벗어진 머리를 내밀었다.
“사적인 부분까지 그대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군.”
“황실의 운명이 어떻게 사적인 부분이 될 수 있겠습니까. 레이먼드 백작은 출신이 좋지 않습니다. 전하의 귀한 혈통에 바람직하지 못한 피가 섞인 후사를 보려 하시다니요.”
클라이드는 바로 곁에서 에디스가 듣고 있는 게 불편했다.
귀족파에게 화젯거리로 던져 주느라고 아드리안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자신의 짝으로 그녀가 아닌 다른 이를 들먹여야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디스가 듣지 말았으면 싶었다.
“아무래도 회의가 길어지겠군. 케츠모리스 경, 먼저 나가서 아드리안에게 얘기 좀 전해 주겠나? 조금 기다려 달라고.”
아드리안은 회의를 마칠 시각에 맞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 전하.”
에디스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인 후, 좌우로 늘어선 사람들 틈을 지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억지를 부리는 디트리안 백작과 화를 꾹 누른 채 대응하는 황태자의 말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저렇게 싸우다간 종일이 걸려도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클라이드, 오늘 된통 잘못 걸렸네. 마음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깐 채 걸음을 서둘렀다. 저도 몰래 콧잔등을 찌푸린 걸 주변에서 볼까 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탓에, 에디스는 주변 분위기를 놓치고 말았다.
격렬하게 싸우는 디트리안 백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관리와 귀족이 그녀를 주시하는 것을.
곁을 스쳐 지난 알파들이 향기를 맡아 버렸다. 역력한 오메가의 향기였다. 감출 줄을 몰라 제법 멀리 퍼진 페로몬 때문에 몇 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 손짓, 눈짓을 주고받았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메가 페로몬을 뒤덮을 만큼 진한 알파 페로몬이 그녀에게서 풍겼다.
알파 페로몬을 인지할 수 있는 오메가 대신들도 냄새를 맡고 깜짝 놀랐다.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청량한 숲과 단 꿀의 냄새가 섞인 향은 분명히 황태자의 것이었다.
진한 알파 페로몬이 오메가 냄새가 나는 에디스를 덮었다니. 그것도 전신에 걸쳐 잔뜩 범벅을 해 놨다.
마치 영역 표시를 해 놓듯이.
짐승 수컷이 암컷을 점찍어 놓듯이.
“뒤쪽에 무슨 일인가? 왜 이리 집중을 못 하고 있지?”
클라이드가 목소리를 키웠다. 그사이 에디스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허둥대는 사람들 틈에서 페이튼이 나서서 대답했다.
“황송합니다, 전하. 케츠모리스 경이 지나가는 바람에 잠시 눈길이 갔습니다.”
“눈길?”
“별것 아닙니다. 워낙 아름다운 분이라서요.”
두 사람이 잠시 눈싸움하면서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때 클라이드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자는 코를 쓱쓱 문질렀고, 또 어떤 자는 무언가를 떨치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아드리안과의 결혼 안건으로 골치를 썩인 탓에 주의력을 잃고 만 것이다. 에디스를 저들 가까이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잘못해서 가운데 통로를 지나가게 해 버렸다.
썰렁한 한기가 회의실을 맴돌았다.
“괜한 데 신경 쓰지 말고 나머지 안건이나 서둘러 논의하도록 하지.”
한 박자 늦게 클라이드가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동안 디트리안 백작도 약간의 귀띔을 받았던지 더는 아드리안을 들먹이며 달려들지 않았다.
어차피 알려질 일이기는 했다.
오메가 형질을 감추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힘들었다. 일상생활에서 타인과 수시로 마주치기 때문이다. 반경 몇 야드 내로 누구의 접근도 불허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에디스는 바쁜 사람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또한 개인의 기질이란 숨겨야 할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드러내고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되도록 늦게 알려지는 편이 나았을 텐데.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한차례 모진 폭풍을 겪게 될 게 뻔했다. 다들 아드리안과 에디스를 들먹이겠지.
황태자의 주변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매번 빠르게 퍼지곤 했다. 에디스가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정보가 아직은 황궁 밖을 넘지 않았지만, 아마 회의가 끝나고 머지않아 대부분의 대신들이 알게 될 것이다.
‘초점이 에디스에게 쏠리지 않도록 해야 해.’
“전하, 듣고 계십니까?”
에디스 걱정에 몰두하느라 앞에서 떠드는 자에게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듣고 있네. 불법 노예의 수가 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클라이드는 전혀 딴생각하지 않은 양 근엄하게 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서둘러 회의를 끝낼 생각밖에 없었다.
* * *
같은 시각, 에디스는 아드리안과 자리를 옮겼다.
나란히 걷다가 말고 아드리안이 문득 코를 찡긋거렸다.
“에디스, 요즘에 전하와 가까이 있을 일이 많아?”
“늘 그렇지 뭐. 왜?”
“너한테서 전하의 페로몬이 진하게 느껴져.”
화들짝 놀란 에디스가 게걸음으로 재빨리 간격을 벌렸다.
“앗, 미안. 새벽 운동을 하면서 전하와 부딪힐 일이 있었거든.”
“운동?”
“응, 사격터에서 말이야.”
그녀는 페로몬이 묻게 된 상황을 조금 털어놨다. 아드리안과 새로이 삼각관계를 만들려는 생각은 없지만, 공연히 오해받는 것도 싫었다.
두 사람은 남의 눈을 의식한 화려한 장소 대신에 그녀가 자주 가는 곳에 조용히 숨었다.
궁인용 카페테리아를 통해 테라스로 나갔다. 몇 걸음밖에 걷지 않았는데 정원수에 둘러싸인 아늑한 벤치가 나타났다. 보물찾기의 1등 카드처럼 제일 까다롭게 꼭꼭 숨겨진 장소였다.
“편히 앉아.”
“와, 이런 데가 다 있었네.”
“여기를 아는 사람은 나랑 내 동기들 몇 명뿐이야.”
“정말 찾아내기 힘들겠다. 일하기 싫을 때 여기에 처박혀 있으면 최고겠는걸.”
“어떻게 알았지? 바로 그런 용도야.”
에디스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입술 위로 손가락을 세웠다. 쉿, 소리를 내자 아드리안도 똑같이 따라했다.
“회의가 끝나면 동기가 알려 주러 오기로 했어. 짬 나는 동안 낮잠이나 잘까?”
아드리안은 푸른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눈매를 접으며 곱게 웃었다.
“낮잠 자기에는 벤치가 너무 불편하지 않아?”
“그런가? 혼자 드러누우면 딱인데 둘이 있으니 누울 수는 없겠네.”
“그럼 내가 비켜 줄게.”
“아냐. 너 숨기려고 여기로 데려온 건데 뭐.”
그녀는 공연히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드리안이 덩달아 입꼬리를 올려 줘서 다행이었다.
이건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자칫하면 서먹서먹한 사이로 남게 될까 봐 신경 썼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황궁 연회였는데 제대로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이전의 만남에서는 에디스가 아드리안의 마음을 거절했다. 친구로 선을 그으면서 기어코 그의 눈에 눈물이 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여지를 남겨두는 행동이 더 못된 거니까.
어장 관리나 문어발. 그런 건 에디스가 원하는 쪽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드리안과 함께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만끽하며 잠시나마 한가한 시간을 즐겼다. 드문드문 얘기를 나눌 때는 사소한 주제만 꺼냈다.
사귀려다가 만 관계 같은 느낌이 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벤치 다리에 기대어 하얀 풀꽃이 피어 있었다. 에디스는 조잘거리다가 말고 꽃을 한 송이 꺾었다. 고작해야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것이었다. 정원사가 보면 잡초 뽑듯이 뽑아내기에 바쁜 종류였다.
“작은 놈이 야무지게 생겼네.”
공연한 칭찬과 함께 에디스는 꽃잎을 한 가닥 뽑았다.
“꽃점 쳐 보게?”
“꽃점? 어떻게 하는 건데?”
“소원하는 걸 생각하고 ‘된다’와 ‘안 된다’를 차례차례 세는 거야.”
“아하, 간단하구나.”
현실 세계에서 했던 방식과 똑같았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에디스는 어렸을 때 공부하느라고 꽃점 따위 치지 않았는지 두뇌에 이와 관련한 정보가 없었다.
“그럼 내가 들고 있는 것도 셈해야 해?”
“글쎄. 그건 에디스가 알아서 결정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음으로 소원 한 가지를 떠올렸다.
“먼저 뽑은 것까지 쳐서 희망 사항 1번으로 할래. 요건 2번, 다시 1번, 2번…….”
소원이 뭔지는 비밀로 하면서 숫자만 읊었다.
아드리안이 어깨를 기울이며 관심 있게 지켜봤다. 스커트에 하얀 꽃잎이 눈처럼 흩어졌다가 그녀가 다리를 들썩이자 잔디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꽃술에 붙은 꽃잎은 아주 작았다. 이것도 셈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됐다.
“아티, 이것도 뽑아도 돼?”
거의 돌기라고 불러도 될 만큼 작은 꽃잎이 하나 남았다. 너무 조그매서 손톱으로 긁어야 할 지경이었다.
잠자코 관찰만 하던 그는 결국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귀여워…….”
웃음에 묻혀 말소리가 분명하지 않았다.
“뭐?”
“아니야. 너 알아서 해. 작은 꽃잎도 네 운명일 테니까.”
줄기만 남은 꽃을 유심히 보던 에디스가 그대로 치마폭에 내려놨다.
“이건 꽃잎이 아니라고 할래.”
“맞아. 내 눈에도 꽃잎으로 보이지 않았어.”
“그렇지? 역시 그랬던 거야.”
에디스는 그가 일부러 맞장구쳐 준다는 걸 알았지만 선선히 받아들였다.
함께 꽃점을 치며 노닥거리는 게 서먹해졌던 사이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느낌이었다.
아드리안이 꽃을 몇 송이 더 꺾어다가 그녀의 치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그리고 자기도 한 개 들어서 바깥의 시든 꽃잎만 뗐다.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미인이 꽃의 제일 예쁜 잎만 남겨 두고 빙그르르 돌리며 노는 모양새가 사뭇 에디스와 달랐다.
“에디스, 무슨 소원 빌었는지 물어봐도 돼?”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