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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67)화 (67/129)

67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페이튼도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얘기는 노골적인 역모이기 때문에 집에서 화풀이 삼아 혼자 투덜거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인과도 그런 생각을 공유했다니. 위험한 발언이었을 텐데 서로 비밀을 지켰다는 점도 굉장히 의외였다.

“지금 진심이십니까? 독립이라고 하신 거 맞습니까?”

알딸딸하니 혀가 꼬인 빅토르 백작에게 확인차 물었다.

“예, 독립이요.”

술에 취했는지 도리어 본심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도 기세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는 은근슬쩍 페이튼의 눈치를 보는 자도 있었다. 귀족파의 핵심인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피다가, 딱히 질색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잘됐다 싶어서 찬동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너도나도 속에 담아 뒀던 포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저는 지도를 펴고 면적을 재 본 적도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분들과 확실히 우리 편에 설 가문만 합해도 라그란드 제국의 삼 분의 일은 됩니다.”

“삼 분의 일이라니요. 너무 적게 셈하셨군요. 나라 땅의 절반은 우리 것입니다.”

“확실한 부분만 그 정도라는 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광활한 신대륙까지 있지 않습니까. 황실 주도로 신대륙에 진출한 건 미미하니까요.”

황실 소유의 신대륙 면적도 만만치 않게 넓지만, 페이튼은 라그란드 제국을 깎아내리는 얘기들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대부분이 확실히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귀족파가 뭉치면 황실의 힘을 넘을 수도 있었다.

물론 정작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면 서로 이권 다툼을 하느라 분열할 게 문제이지만.

제일 먼저 황제를 누구로 추대할지부터 결정하기 힘들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들의 주장은 술자리에서 하는 넋두리에 불과했다.

“그레이브즈 공작, 진지하게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결혼만 잘하시면 이건 허튼 꿈만은 아닙니다.”

빅토르 백작이 집요하게 부추겼다. 그러자 옆에서 다빌 자작이 맞장구쳤다.

“암요. 케츠모리스 가의 영지가 만만치 않지요. 지리적인 위치가 아주 좋지 않습니까.”

“항구도 보유한 데다가 여러 물자가 오가는 길목이라고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수도에서 가까우니까요. 만약 독립 전쟁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 있습니다.”

“혼담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지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빌 자작은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준수하고 완벽한 우리 그레이브즈 공작이 혼사를 그르칠 리 있겠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당연한 얘기를 물었습니다.”

페이튼은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 적당히 말꼬리를 흐렸다.

딱히 그들의 술주정을 받아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에디스와의 관계에 진전이 없다는 사실을 구태여 털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그가 교양미가 철철 넘치는 얼굴로 잔을 입에 대며, 내심 에디스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미래의 부부가 될 사이에 성격이 꽤 다른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황실의 개 노릇을 하길 좋아하는 듯했다. 그를 암암리에 껄끄러워하고 결혼 문제에도 시큰둥했다.

하지만 혼사에는 큰돈이 걸렸다.

돈으로 에디스의 환심을 사는 방법은 여전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금전 앞에서 정치적 견해 따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다만 계산상으로 에디스보다 페이튼이 훨씬 이득이라는 점은 비밀이었다.

긴 초록 뿔의 영지에 공장을 짓겠다는 게 혼담 조건이었다. 땅은 오롯하게 에디스의 소유이지만 그 위에 공장을 한번 지으면 절대 헐어 내지 못한다. 박힌 못을 빼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깟 대지 이용료는 푼돈에 불과하다. 수십, 수백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까.

페이튼은 에디스에게 거짓말하거나 사기 친 적이 없었다. 정당하게 지대를 내고 땅을 이용하며 그곳을 번성하게 만들 계획이다.

다만 에디스는 적은 액수나 받고 말 뿐이지.

일생 갚아야 할 빚을 조금씩 갚으면서.

* * *

에디스는 마법 수련에 한창이었다.

체내에 숨은 마력을 끌어올려 요리조리 뭉치면 자신의 뜻대로 마법을 쓰거나 갈무리할 수 있다는, 허황되고 세계관에 맞지 않는 설명을 클라이드한테 거하게 들었다.

물론 여기서 마법을 페로몬이라는 용어로 바꾸긴 했다.

“자, 한번 해 봐. 에디스는 몸 안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끄응…….”

저 봐, 저 봐. 마법 수련하는 방법이랑 똑같잖아.

“패로몬을 숨기는 게 어려우면, 반대로 마음껏 발산해 볼래? 어떻게든 네가 통제하는 법만 배우면 되니까. 꺼내기부터 익힌 후에 숨기기를 해도 돼.”

“끄으…… 으응.”

괴상한 용트림을 하면서 양팔을 좌우 45도 각도로 뻗었다. 흡사 영화에서 보던 마법사의 자세와 비슷했다.

“얍!”

이제 파이어볼이 가슴 앞으로 뭉치면서 발사하면 되……는 게 아니라, 뭉게뭉게 페로몬이 피어나야 했다.

“…….”

“…….”

“한 거 맞아?”

“젖 먹던 힘까지 썼는데요.”

“…….”

귀신이 지나간 것처럼 썰렁한 침묵이 사격터를 메웠다.

“풉.”

새벽의 고요함을 깬 사람은 저만치에서 구경하던 시종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어지간히도 시선을 사로잡았나 보다.

주변의 모든 이가 에디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중에서 이를 꽉 깨물고 웃음을 참는 표정은 좀 너무하지 않나.

마법사 자세를 취하기 전에 소림사에서 운기조식하는 자세도 시도하기는 했다. 동양의 심오한 무술을 알 리 없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터였다.

어렸을 때 TV에서 봤던 특촬물도 따라했다. 아이돌 히어로가 한 손으로 쏠라 빔— 하고 에너지를 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는걸. 페로몬 제어라는 중차대한 난제 앞에서 에디스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클라이드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래. 오늘만 날인가. 조만간 성공할 수 있겠지.”

“그 얘기를 어제도, 그제도 똑같이 들은 것 같네요.”

“에디스를 믿어.”

“과중한 부담입니다만.”

“정말이라니까. 정 제어를 못 하게 되면 내 궁에서만 지내도 되잖아. 이곳에서 널 해코지할 사람은 없어.”

그의 얘기가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웠다.

실제로 외출을 전혀 못 하고 황궁 안에서만 맴돌 정도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깥을 돌아다닐 때마다 전전긍긍해야 할 수밖에 없다. 낯선 알파가 그녀의 오메가 향에 이끌려 애먼 수작질을 할까 봐 늘 사방을 두리번거려야 하겠지.

그나마 황궁은 시종 에디스를 알아 모시는 사람이 대부분이라서 위험이 적었다.

어제는 어떤 궁인과 스쳐 지나가다가 의외의 경험을 했다. 그 사람이 갑자기 코를 잡아 쥐고 펄쩍 뛰며 에디스에게서 물러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흘끔거리다가, 덩치 큰 베타 호위가 손으로 검집을 잡는 걸 보고 후다닥 도망갔다.

황태자의 최측근 시종 에디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덕분이었다. 누구도 그녀가 알파를 홀리려 한다고 함부로 속단하지 않았다.

지금도 덩치 큰 닉슨은 에디스를 보호하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이 새벽에 그녀를 공격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수풀이나 황무지를 두리번거렸다. 어리숙하면서도 듬직한 호위로서 은근히 에디스와 찰떡궁합이었다. 뇌 주름은 많지만 마음은 해맑은 그녀의 허점을 보완해 줬다.

“페로몬 제어도 훈련해야 하는 건가요? 사격처럼?”

“원래는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거지만 에디스는 희귀한 사례라서.”

“맨날 이 짓을 하고 있으니 제발 차도가 있으면 좋겠네요.”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이제 내 알파 페로몬을 맡아 볼 차례지?”

클라이드가 2교시 수업 종이 울렸다는 듯이 반색했다.

별다른 저항감 없이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파 페로몬을 맡는 것 역시 그다지 잘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훈련이 필요한 듯했다.

의식적으로 진하게 알파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야외인데도 향기가 역력히 느껴졌다.

“평소의 내 냄새는 못 맡는 거야?”

“이만큼 진해야 알아챌 수 있어요.”

에디스는 열심히 코를 킁킁거렸다.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퇴폐미가 물씬 배어나는 향이 코점막을 통해 머릿속을 장악했다.

향기의 감상은 몸으로 전달됐다. 금세 심장이 뛰고 피가 뜨거워졌다.

손이 저절로 그에게 뻗어 갔다.

“하아…….”

현실 감각을 순식간에 지워 버릴 만큼 아찔한 향.

단 몇 초 만에 눈동자가 풀린 채 클라이드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가 때맞춰 에디스를 끌어당겼다.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참는 법도 배워야지.”

“클라이드.”

흥분감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더듬었다.

입술이 벌어지며 드러난 치아가 살짝 손가락을 물었다가 놨다. 피부와 다르게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자마자 금세 사라졌다.

“참아.”

“으응…….”

“알파가 유혹하면 아무한테나 널 허락할 셈이야?”

“하지만 내가 맡을 수 있는 알파 페로몬은 클라이드가 유일한걸요.”

그가 에디스의 머리칼을 쓱쓱 문질렀다. 정수리에 꾸욱 입술을 눌러 아쉬운 감정을 드러낸 후, 곧바로 몸을 뗐다.

휑하게 벌어진 가슴 앞자락이 허전해졌다.

“의사가 알려 줬잖아. 나만큼 강한 우성 알파가 흔치 않아서 먼저 인식하게 된 거라고. 에디스도 차츰 익숙해지다 보면, 머지않아 다른 알파의 페로몬도 맡을 수 있게 될 거야.”

“아, 몰라. 지금은.”

마법 주문을 외울 때처럼 두 팔을 벌리며 그에게 뛰어들었다.

“클라이드 냄새가 최고야.”

어쩔 수 없다는 듯 클라이드가 그녀를 다시 안았다. 어리광부리는 짓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 줬다.

에디스가 그의 목덜미 높이까지 고개를 올리며 숨을 들이켰다. 알파의 페로몬이 비강을 통해 폐로 흠뻑 스며들었다.

실컷 취했다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가 기다려 준 덕분에, 머지않아 스스로 두 발로 설 수 있었다. 엉겨 붙듯이 둘렀던 팔을 내리자 클라이드는 잘했다며 그녀의 뺨을 살며시 쓸었다.

“역시 영리한 에디스.”

“으아, 알딸딸하네요.”

“잘하고 있어. 내가 통제하기보다는 네가 스스로 자제한 게 아주 훌륭해.”

그는 홍조가 가시지 않은 그녀의 뺨을 연신 어루만지며 느른하게 미소지었다.

“체력 단련만큼 힘든 일을 해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남은 시간 동안 침대에서 뒹굴거려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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