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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66)화 (66/129)

66화

육중한 마호가니 문에 에디스가 기대어 서자, 그가 팔을 짚으면서 몸을 둘러쌌다.

“에디스, 이러고 여기까지 온 거야?”

“네? 무슨 얘기예요?”

그가 곤란한 듯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의식하지 못하나 보군. 지금 너한테 오메가 페로몬이 굉장히 짙게 풍기고 있어.”

전혀 몰랐다. 오메가 페로몬이라니.

에디스는 당황해서 제 목덜미를 급히 부여잡았다. 그런다고 해도 기체 형태로 공중이 뿌려지는 페로몬을 막을 수는 없건만, 무의식중에 페로몬 분비가 많은 귀 뒤와 목을 감싸고 말았다.

“어, 어떡하죠? 나는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르고.”

“페로몬 컨트롤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지. 위험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이 길로 곧장 별실에 가 있어.”

“네에.”

“시중드는 궁인 중에 알파는 물리도록 해. 베타나 오메가만 곁에 두는 편이 안전해. 난 급한 용무만 마치고 올라갈게.”

잘해 보려던 아침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에디스는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입을 삐죽였다.

“클라이드는 서두르지 말고 할 일 해요. 난 괜찮으니까.”

그가 시선을 맞추기 힘들어했다. 이리저리 기웃대다가 그녀의 고개를 받쳐 들려고 했다. 에디스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얼굴 좀 보여 줘, 에디스.”

“싫어요.”

“실은 네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어. 참을 수 있게 잠깐만 날 봐 줘.”

클라이드가 불시에 다가왔다. 불퉁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입가에 갑자기 쳐들어온 게릴라처럼 입을 맞췄다.

보드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

잠깐 스쳐 지나간 접촉이지만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만큼 감각적이고 짜릿했다. 에디스는 놀라서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나른하게 숨을 내뱉었다.

“너……. 죄다 예뻐서 어떡하냐.”

“갑자기 훅 들어오기 있나요?”

“갑자기 아닌데. 수시로 짬 날 때마다 너한테 지분거리는걸.”

하긴 클라이드의 애정 공세는 때를 가리지 않곤 했다. 그녀가 허점을 드러낼 때면 여지없이 찔러 대는 송곳 같은 남자였다.

얄미워서 그에게 눈꼬리를 세웠다.

그러고 보니 클라이드의 낯빛이 갈수록 달라지고 있었다. 귀 끝이 빨개지고 눈자위가 또렷해졌다. 본능적으로 목덜미 냄새를 맡으려는 행동을 보이자 에디스는 그의 코를 가볍게 쥐었다가 놨다.

“이러기 없기요.”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왠지 그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잡혔던 코를 찡긋 구기며 근사하게 웃었다.

“나 클라이드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자꾸 만지면 곤란하다고요.”

“무슨 할 말인데?”

“오늘 출근한 거 있죠…….”

그가 웃는 표정 그대로 정지한 채 관심을 기울였다.

“솔직히…… 우리 사이는 정확히 무엇으로 결정을 내릴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이 세계와 사람에게 어느 순간 애착이 생긴 것 같아요.”

“좋은 방향이군.”

“고리타분한 나랏일이 나한테는 재미있는 것도 같고요. 이럴 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공무원이 적성에 맞았네요.”

음식 나눔 행사를 하면서 빵 한 덩이에 기뻐하던 아이, 총사 대회에서 연호하던 관중들.

그 외에도 에디스가 생생하게 겪었던 인간 군상이 뇌리에 깊이 남았다.

“그러니까 시종직을 계속해도 될까요?”

당차게 사표를 써 놓고 이제 와서 제자리로 돌아가려니 굉장히 쑥스러웠다.

“대환영이야. 당연히! 애초에 보내려 한 적도 없어. 타협은 안 할 생각이었는걸.”

진작에 퇴직 희망서를 찢어 버렸다는 클라이드는 벅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좌우로 살살 흔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성으로서의 모호한 상황은 한편으로 미뤄 뒀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전혀 불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 잊기 전에 얘기해 둘 게 있어.”

“뭔데요?”

“에디스 승진했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에디스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굴리며 반문했다.

“누가요? 제가요?”

“응, 너.”

황실의 인사는 그리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단계 승진하려면 최소 몇 년은 걸린다.

“이상하네요.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이상해?”

“원작에서는 2년 뒤에 특급 승진한다고 했거든요.”

“여기는 소설이 아니라니까. 에디스는 2년까지 갈 것도 없이 벌써 승진할 만한 공훈을 세웠고.”

클라이드는 자신이 소설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라 에디스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원작의 에디스가 총사 대회에 나갔다는 대목은 없었다.

단역이라 내용이 통삭제되었다 쳐도, 중요한 사건이니 한마디쯤 언급해야 스토리 진행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에디스는 총사 대회와 관련해 원작과 다르게 행동했음이 분명하다.

대회를 성황리에 진행한 공로는 에디스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 제가 잘하긴 했다.

“승진하면 급여도 오르죠? 많이 오르나요?”

그가 입매를 늘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얼마나 오르는지까진 모르겠군. 하지만 포상금을 따로 지급하려고 해.”

“감사합니다!”

주는 돈은 절대 사양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빚이 얼마나 많은데, 조금이라도 갚아야지.

“계급은 두 계급 위로 올렸어. 이제 에디스는 사무관이야.”

“그래도 되는 거예요? 두 계급 오른 전례가 있나요?”

“내가 승진시켜 주겠다는데 누가 뭐랄 거야.”

서기에서 수석 서기를 건너뛰고 곧바로 사무관이라니, 실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궁에 들어온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에디스의 임관 동기들은 거의 다 수습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자잘하게 문서 수발을 들거나 다른 궁을 오가는 연락책이었다.

개중에는 일이 힘들어 관두는 자도 있고, 능력 부족으로 잘리는 자도 있었다.

반면에 권세 높은 가문으로서 의전할 때만 나타나는 시종은 여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이를테면 빅토르 백작은 시종으로 이름만 올려놓고 실무를 보지 않았다. 지난번에 빈민가 음식 나눔 행사를 할 때 황태자를 따른 게 전부였다.

에디스 승진 인사가 예상보다 웃도는 수준이긴 하지만, 주변의 이런 사정을 비교한다면 받아 마땅했다.

그녀의 뾰족하던 시선이 뭉근하게 누그러졌다. 급여를 얼마나 받게 될지 계산하면서 은근슬쩍 물었다.

“혹시…… 승진시키고 나 빡세게 굴리려는 심보이신지?”

“출세주의자 에디스라면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겠군.”

“출세 아니라니까요.”

“나도 업무에 부담 주려는 거 아니야. 에디스는 그냥 하던 대로 해. 지금도 지나치게 잘하고 있으니까.”

좋았어. 느닷없이 덤터기 쓰게 되지는 않겠네.

“한 가지 더. 총사 대회 우승자인 닉슨을 에디스의 전담 호위로 둘까 해.”

“어라, 왜요? 닉슨은 정말 실력이 괜찮던데 더 중요한 곳에 쓰시지 않고요.”

“정식으로 황실 총사대에 들어오려면 절차상 시일이 걸려. 그런데 안전 문제 때문에 급한 대로 근위병을 그자에게 붙여 뒀지. 너무 소모적이지 않나? 차라리 궁에 들여 에디스가 써먹는 편이 낫지.”

“듣고 보니 일리 있네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닉슨은 아무것도 모르고 페이튼의 지시를 따른 거였다. 어수룩한 시골 사냥꾼이라 자신이 받은 돈이 저지르는 일에 비해 턱없이 적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 한 채 대회에 참가했다.

그자가 페이튼의 뜻을 어기고 에디스를 따랐으니, 그녀 역시 마땅한 보답을 해야 했다.

약속한 대로 황실의 이름으로 넉넉한 보수가 지급됐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페이튼 진영이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닉슨은 총사대로 입대해 궁에서 숙식하게 될 때까지 꼼짝없이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였다.

아직 황실 총사가 되지 못해 애매한 시기였다. 에디스가 사적인 호위로 두는 게 최선이었다.

“개인 호위가 궁에서 돌아다니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허락한다는데 누가 뭐라겠어.”

클라이드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에디스에게 각종 특혜를 쏟아붓고 있었다.

두 계급 승진에 개인 호위라니. 입 가벼운 자들의 주목을 받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제가 조금 민망합니다만.”

“전혀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닉슨은 살려 둬야 도리에 맞으니 받아들일게요.”

둘이 문을 닫고 속닥거리는 동안 응접실 밖에는 황태자와 접견할 자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에디스는 오메가 페로몬이 풍길까 봐 신경 쓰여서 복도 벽에 바짝 붙어 사람들 틈을 빠져나갔다.

* * *

페이튼은 귀족 가문 간의 회동이 늘 지루했다.

심지어 그와 연령대가 맞는 사람도 없었다. 빅토르 백작은 노년이 가까웠고 디트리안 백작은 반쯤 머리가 벗어진 중년이었다.

그만큼 하는 얘기들도 꼰대스러웠다. 입만 벌리면 죄다 헛소리였다.

“그레이브즈 공작이 장담하지 않았습니까. 케츠모리스 공작을 책임지겠다고요. 그런데 결과를 보세요. 그 여자 한 명 때문에 일을 그르쳤습니다.”

“아무리 제게 타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디트리안 백작의 방법은 무조건 틀렸으니까요.”

“틀렸다니요. 그 여자를 그때 죽였으면…….”

명색이 공작인 에디스를 백작 작위의 디트리안이 ‘그 여자’로 부르는 게 매우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디트리안 백작은 하자가 워낙 많은 사람이라서 에디스의 호칭 문제 외에도 할 말이 쌓여 있었다.

“이보세요. 저격 사건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디트리안 백작이 걱정됐습니다. 대체, 일이 실패할 경우는 생각해 보고 저지른 겁니까?”

“실패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실패했지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총을 쐈는데도 말입니다.”

“어떤 근위병이 몸을 날렸다고…….”

“그 정도면 방해가 없었던 거지요. 설마 에디스가 홑몸으로 경기장을 돌아다녔겠습니까?”

디트리안 백작이 제 분을 못 이겨 씨근거렸다.

그 옆으로는 디트리안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던지는 빅토르 백작이 있었다. 둘 다 만만치 않은 돌대가리이지만, 빅토르는 이번 사건에 나서지 않아서 그나마 나았다.

“디트리안 백작, 사고를 치기 전에 나에게 미리 말했어야지요. 그럼 요목조목 따져서 말렸을 겁니다.”

“흐음…….”

“저격범이 붙잡힌 이상 배후를 털어놓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디트리안 백작,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파멸의 길이 코앞에 있는 디트리안 백작이 연신 침음성을 흘렸다. 몇 잔째 위스키를 들이켜다가 이젠 얼굴이 벌게질 만큼 취해 버렸다.

얼마 전 저격범이 잡혔다는 소식에 페이튼도 깜짝 놀랐다.

대회장에서는 저격범이 성공적으로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다. 그런데 황태자의 정보망이 예상을 웃돌았다. 뒷골목의 부랑배 집단을 통해 수소문하더니 끝내 범인을 색출했다.

문제는 디트리안 백작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만간 승부 조작 사건이 제국을 뒤흔들 예정이었다.

우리 진영에서는 결선 16강에 올라간 선수 중 같은 편이 아닌 자를 모조리 죽여 버리려 했다. 그런데 몇 명이 살아서 도망갔다.

그들은 지금 황태자의 비호 아래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빌 자작, 요즘 어찌 지내십니까?”

선수 암살을 직접적으로 지시한 다빌 자작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듯했다. 다빌은 며칠 만에 살이 쭉 빠지고 얼굴색도 시커메졌다.

“몇 번 조사관이 다녀갔습니다. 아마 조만간 제가 직접 소환될 것 같습니다.”

“저런, 큰일이군요.”

“어쩌면 좋겠습니까?”

“끝까지 잡아떼야지요. 누군가의 모함이라고 주장하십시오. 제가 그 얘기를 뒷받침할 만한 상황을 조작해 보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레이브즈 공작만 믿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우린 한배를 탄 운명이 아닙니까.”

겸손까지 떨면서 페이튼이 둘러앉은 면면을 하나씩 쳐다봤다.

페이튼은 가문을 물려받으면서 급격히 귀족파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영리하고 젊은 그가 구태의연한 늙은이를 밟고 서는 건 금방이었다. 이젠 귀족 세력의 거의 전부가 손안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멍청한 디트리안 백작이나 꼬리를 밟힌 다빌 자작에 비해 그는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가 사주했던 선수들은 이미 해치워 버렸다. 우승자인 닉슨이 남아 있지만, 사냥꾼 한 명만으로 대 그레이브즈 공작가의 수장을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닉슨이 에디스에게 포섭된 점이 꽤 껄끄럽기는 했다. 나중에 에디스와 만나면 딱 잡아뗄 수밖에 없을 듯했다. 멍청한 사냥꾼이 그의 지시를 잘못 알아들었다고 둘러댈 셈이었다.

또한, 승부 조작 사건으로 황태자가 분개한다고 해도 제게 별다른 피해가 끼치지는 않는다.

법적으로 따져 볼 때 승부 조작이 그다지 큰 죄목이라 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황실과 단단히 사이가 틀어지는 문제가 있을 뿐이지.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빅토르 백작이 푸념했다.

“속이 터지는군요. 우리가 왜 이렇게 황실의 눈치를 봐야 합니까.”

“비위를 맞춰 줘야 나라가 굴러가겠지요.”

“이 나라의 절반이 우리 손에 있는데 대체 왜! 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한테 머리를 숙여야 하냐는 말입니다!”

“빅토르 백작,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뭐가 지나칩니까? 선대 그레이브즈 공작은 독립도 생각하셨는걸요.”

느닷없는 말이 백작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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