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풍경 감상이나 하면서 내내 주목하지 않던 얼굴이지만 그녀는 더 이상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클라이드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검은 머리칼의 그림자가 이마에 드리웠다.
“에디스.”
“…….”
“돌아와 줘서 고마워.”
“무슨……?”
“휴가받아서 귀가한 이후로 아예 안 돌아올 줄 알았거든. 그래서 어제 너를 만난 게 뜻밖이었어.”
정곡을 찔려 버렸다. 돌아오지 않으려는 속셈이 들통났던가.
에디스는 입술을 깨물며 우물우물 적당히 대꾸했다.
“축제의 마지막 장이 시작되려 했으니까요. 연회……. 화려한 막을 내리는 현장에 나도 빠질 수는 없지요.”
조금 전 지나간 바람만큼 옅은 입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가 조금 웃었다.
“그래. 마침 연회 시작이었지. 다행스럽게도.”
둘이 숨은 호수에서는 홀에서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제법 멀리 나온 데다가 나무가 촘촘히 가로막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 수면만이 초저녁의 푸른 빛을 받아 반짝였다.
“에디스는 춤을 추지 않더군. 혼자 보내면 잘 놀 줄 알았더니.”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서요.”
“서로 너에게 접근하려고 경쟁하는 바람에 도리어 실속이 없었나 보네.”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요.”
“내가 신청해도 될까?”
클라이드가 일어나 그녀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첫인사를 하는 사람처럼 정중한 태도로 인사한 후, 익숙하게 큰 손을 친절히 내밀었다.
“공작님,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장난스러운 호칭에 에디스의 시선은 그의 손에서 얼굴로 옮아갔다. 짓궂은 표정일 줄 알았더니, 그가 긴장하고 있었다.
아직 움직이지 않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지켜보며, 혹시나 거절당하지 않을까 고심하는 듯했다.
이 정도면 대답을 들었다고 봐야 할까.
빙의한 자신이라도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다정하고 따뜻한 손만은 좋았다.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자 폭 안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음악이 없는데 어쩌죠?”
그가 손을 당겨 에디스를 일으켰다.
“음악이 없어도 춤추는 데 지장은 없어.”
“클라이드야 잘하니까 그렇겠지만, 난 이쪽으로 별로 소질이 없는걸요.”
호수의 물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춤춰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춤 모양새야 엉망이 되겠지만, 아무도 보지 않을 테니까.
둘이서 팔꿈치를 올려 마주 섰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쑥스러운 듯이 맞잡은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내가 노래로 불러 줄까?”
“노래요?”
“멜로디만 흥얼거리면 어때?”
“나야 너무 좋지만…….”
클라이드가 노래를 부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에디스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 음악은 귀족의 고상한 취미 중 하나라지만 클라이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안 하던 노래까지 시도하다니. 그가 꽤 무리하는 듯도 싶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리지는 않았다.
사실은 듣고 싶었다. 나직한 음성으로 부르는 노래를.
“해 볼게. 듣기 싫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발꿈치를 들썩여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곧이어 흉통을 울려 내는 소리가 부드럽게 퍼져 나왔다.
듣기 좋은 음색이다.
공명한 탓인지 그녀의 귀 끝이 간질거렸다.
구두 앞코를 마주하며 함께 첫발을 떼었다. 그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가자 자연스럽게 에디스의 몸도 움직였다. 의식적으로 춤추지 않아도 발끝이 저절로 날아올랐다.
어떨 때는 허밍으로 악기를 연주하듯이 노래했고, 또 어떨 때는 의미 모를 가사를 곁들였다.
그녀는 그의 도톰하게 벌린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별 그림자가 진 눈매와 날렵한 굴곡의 턱도.
곡이 전부 끝난 줄도 모르고 클라이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스텝이 멈췄는데도 구두 뒤축을 조금 들었다.
이 남자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안 할 걸 그랬나. 말문이 막힐 만큼 형편없었나 보군.”
몽롱한 여운을 오해한 그가 멋대로 자책했다.
“앗, 아니에요. 너무 환상적이어서요.”
“아니야. 괜히 위로할 필요는 없어.”
“아니에요! 정말, 정말로 좋았어요. 클라이드가 이렇게나 근사하게 노래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에디스는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피력했다.
커다란 현악기의 연주를 듣는 듯 가슴이 진동하는 소리와, 손만 잡고 있었을 뿐인데 저절로 날아갈 듯하던 춤을 이야기했다.
장황하게 긴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그의 우수에 젖은 눈매가 지그시 내려갔다. 눈 아래에 올올이 눈썹 가닥의 그림자가 생겼다.
“에디스.”
노래처럼 아름답게 울리는 음색이었다.
“어찌 보면……. 미련스럽게 붙들고 있던 과거의 끈을 네가 끊어 준 것 같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에디스와 좋은 추억이 있나 보지요?”
“그냥 어린 시절 일이야. 흔한 경험이고.”
“…….”
“하지만 네가 내게로 올 날을 기다린 건 분명해. 너희 집이 휘청였을 때나, 아카데미에서 수석 졸업자의 이름을 접했을 때. 나는 항상 에디스를 떠올렸거든.”
“당신이 떠올린 사람이 내가 아닐 수도 있어요. 난 고작해야 4년 전에 이 몸으로 들어왔거든요.”
“제일 혼란스러운 점이 그거야.”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큰 한숨을 쉬었다.
“너는 이전의 에디스와 다른 존재라고 말지만, 나는 절반쯤 같다고 생각해. 육신이 똑같으니까.”
“…….”
“에디스, 난 소설 주인공이 아니야. 책의 앞장을 들춰 보면 추억이 글로 적혀 있다니, 그건 정말 말이 안 되지. 난 멀쩡히 살아 있고,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어.”
“…….”
“내가 존재하듯이, 난 눈앞에 있는 에디스의 존재를 느끼고 있고.”
“클라이드…….”
“내 손을 잡고 있는 지금의 네가 좋아.”
그가 다가왔다.
지나치게 펑퍼짐한 드레스 사이로 발을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의 구두 앞코가 또각거리며 닿았다.
몸을 감싸고 흐르는 바람처럼, 든든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아 안았다.
“에디스, 달아날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아. 퇴직 희망서도 진작 폐기했어.”
“하지만 난 에디스가 아니에요.”
“넌 에디스 맞아. 내가 수발 시종으로 뽑고, 내 침대에서 재운 그 여자지.”
“게다가 언제 갑자기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지 몰라요. 올 때도 느닷없이 와서.”
“돌아가지 못하도록 내가 잡을 거야.”
“어, 어떻게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이상 현상을 연구하는 자를 수소문해 볼까 해.”
그가 그녀의 장갑 낀 손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실크의 촉감 너머로 동그란 엄지가 미끈하게 지나가며 감각을 자극했다.
“자, 이제 다른 핑곗거리는 없는 거지?”
“핑계라니요. 이 얘기는 전부 진실이에요.”
“물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하지만 그게 나를 거절할 이유는 되지 않잖아?”
이런 태도를 보니 그는 은근히 집착광공 기질이 있었다.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척하면서도 고삐를 단단히 잡고 놓지 않는 남자다.
에디스는 진지한 와중에도 조금 미소가 배어 나오려고 했다.
그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클라이드는 줄기차게 애원과 강요를 반복했다.
“내가 남자로서 싫다면…….”
치부를 내보이듯 그가 암울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시종으로서라도 곁에 있어 줘.”
“…….”
당황스러운 기분에 에디스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거절인 줄로 오해한 그는 주섬주섬 제 계획을 늘어놨다.
“가장 총애하는 시종인 에디스와 함께하면서, 황후 자리를 비워 두면 돼.”
“어떻게 그래요. 클라이드는 황실을 지탱하는 기둥인걸요.”
“제국의 8대 황제인 리카르디안은 일생 결혼을 하지 않았어. 이 나라와 결혼했다는 명성을 얻으면서 독신으로 살았지.”
“그건 드문 경우죠. 보통은 황후가 후사를 봐 대를 잇는 게 정상인데.”
“그럼 허락해 줄래? 내 청혼.”
역시 쉽사리 입술을 뗄 수 없었다.
등허리에 둘린 든든한 손길이 힘을 더해 움직였다. 팔을 굽혀 두 사람의 사이를 좁혔다.
에디스는 얼굴이 그의 코트에 파묻힐 지경이라 고개를 높이 들어야 했다. 상처받은 야수와 같은 표정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클라이드가 어둑한 음영을 그녀에게 드리우고 마른 목울대를 일렁였다.
“에디스에게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그래도 널 놓지는 못해.”
여기까지가 허용할 수 있는 한계라는 듯, 그가 가슴을 울려 낸 소리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 * *
“좋아요. 결혼해요.”
에디스가 씩씩하고 우렁하게 외쳤다.
앞에 거울이 있었다. 두 주먹을 세게 쥐고 당차게 내질렀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클라이드의 앞에서만은 끝내 이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 제 마음이 여기까지밖에 되지 못해서인가 보다. 그가 막 엄청 좋고, 또 잘해 보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역시 제 성격은 독립투사가 아니라 일제 앞잡이에 가까운 듯했다. 클라이드 곁에 있고는 싶고, 책임지기는 싫은 거지. 이 제국을 떠맡아야 하고 세계관을 뒤엎어야 하며 엔딩을 바꿔야 하는 짐이 무거웠다.
“후……. 됐어.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막 피어나려는 연애 감정이 그 외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했다.
* * *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축제가 모두 끝나자 다시 일상의 나날이 시작됐다.
에디스에게는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다. 클라이드가 바라는 대로 시종으로서라도 곁에 있느냐, 아니면 사직할 것이냐.
또 다른 선택지에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도 있었다.
고심 끝에 결국 그녀를 태운 마차가 출근 시각에 딱 맞춰 황궁 앞에 멈춰 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씩씩하게 아침 인사를 하며 대 응접실로 향했다.
황태자는 화요일 아침마다 외부 인사를 만난다. 붙박이 일정이라 따로 체크할 것도 없었다. 잠시 기다리니 일개 군단이 걷는 발소리가 우르르 들리고, 곧이어 클라이드가 시종과 관리, 근위병 등을 이끌며 나타났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마주하려니 지난 연회의 여운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려 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상큼한 인사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클라이드.”
클라이드가 선명한 굴곡의 눈매를 크게 떴다. 그래도 지난번에 집무실에서 놀라던 것보다는 약했다.
그는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박박 우기다시피 하면서 저를 못 보낸다고 난리 쳤으니 말이다. 에디스가 제 발로 오든, 그가 잡으러 오든. 우리는 결국 얽히고야 말 사이였다.
발랄하게 분위기를 띄우려던 시도가 무색하게 그가 다급하게 에디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디스, 잠시만.”
.클라이드에게 이끌려 단둘이 실내에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