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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64)화 (64/129)

64화

지난번의 고백 때문에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화려하게 성장한 에디스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뜯어보는 동안 그의 입이 손톱만큼 벌어졌다.

턱에 힘을 푼 채 마냥 넋을 놓고 쳐다봤다.

“왜 그래요?”

한순간 늦게 그가 묵직한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에디스 역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둘 사이의 불안정했던 느낌이 어느 정도 나아졌다.

“에디스가 이런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군.”

“어지간해서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거든요.”

연회에 어울릴 만한 드레스가 집에 없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값이 나가는 드레스는 아버지가 진작 팔아 버려서 일상복밖에 없다고 설명하기가 좀 구차했다.

드물게 연회에 참석했다는 말도 거짓이었다.

실은 연회가 처음이었다.

진짜 에디스는 경험이 있지만 빙의한 자신은 대규모 파티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에 남은 기억을 더듬어 익숙한 척하면서도 내심 굉장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실크 장갑을 낀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클라이드를 따르는 다른 시종이 말씀을 올렸다.

“전하, 레이먼드 백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황태자의 손을 잡을 사람은 아드리안이었다.

애초에 이런 자리에서 활용할 목적으로 클라이드가 아드리안을 끌어들였으니, 그가 파트너가 되는 건 당연했다. 연회에서 뭇 귀족의 시선을 받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한 안배였다.

“에디스, 이만 갈까?”

클라이드가 에스코트할 손을 내밀려고 했다.

그러다가 턱선을 굳히며 팔뚝을 내렸다. 어둑한 눈빛으로 지그시 그녀를 응시하더니 먼저 앞장섰다.

시간이 촉박해서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기다리던 아드리안이 에디스를 보고 반가이 인사하려 했다. 하지만 클라이드가 재촉하는 바람에 말 한마디 해 보지 못하고 음악 소리가 들리는 홀로 향했다.

황궁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웅장한 그레이트 홀은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클라이드가 아드리안과 중앙 계단의 꼭대기에 나란히 등장했다. 곧이어 병색이 짙은 황제가 2층의 발코니에 앉았다. 저 황제가 가짜라는 걸 아는 에디스는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신경 썼다.

초대객들의 시선은 황태자 커플의 그림 같은 모습에 쏠렸다.

갖가지 미사여구를 동원한 인사말이 이어진 후, 잠시 멈췄던 음악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클라이드는 정해진 수순대로 아드리안과 첫 번째 춤을 췄다. 홀 중앙을 비워 단둘만이 춤을 추는 동안 수백 명의 사람이 숨을 죽이고 아름다운 춤 광경을 목도했다.

클라이드는 할 일을 마친 후 황태자를 위한 발코니로 향했다. 뒤돌아 계단을 오르는 순간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오직 에디스만 알아봤다. 옷차림은 근사하지만 얼굴은 국정 회의에서 서류를 들출 때와 똑같았다.

그동안 가짜 황제는 벌써 돌아가 버렸다. 아드리안과 인사말, 황제, 춤이 모조리 짜여진 각본이었다.

“오래 기다렸지?”

클라이드가 발코니로 들어오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둘 사이에 줄곧 서먹한 기류가 흐르다가 연회에 오니 흥청거리는 분위기에 묻히는 느낌이었다.

“아니에요. 굉장히 멋있는 춤을 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멋있기는……. 형식적인 거지 뭐.”

여러 귀족과 관리가 황태자에게 문안을 올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아드리안을 옆에 앉혀 둔 채 꼭 인사를 받아야 하는 사람의 명단을 확인했다.

연회는 귀족을 위한 행사일 뿐 그에게는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에디스, 다른 시종도 많으니 수행 임무는 그만해도 돼. 내려가서 연회를 즐기도록 해.”

“전 괜찮습니다.”

“내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

“하지만…….”

“여기에서 그대가 계속 벌서듯이 있으면 다들 나를 흉볼걸. 총사 대회의 준우승자이기까지 한 사람을 연회에서 또 혹사시킨다고 말이야.”

재차 권고를 듣는 바람에 에디스는 못 이기는 척하고 물러났다. 매우 지루한 인사를 반복할 클라이드에게 마음으로 애도를 보냈다.

홀에 발을 내딛자 기분이 싹 바뀌었다.

리드미컬한 춤곡이 울리는 가운데 꽃과 나비 같은 남녀가 우아하게 춤을 췄다. 부채를 흔들며 환담을 나누는 이들은 연신 즐거운 눈웃음을 지었다.

에디스에게도 친한 척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종으로 일하는 동안 만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 또래의 레이디는 흔히들 비슷한 연령대의 남녀와 어울리는데 에디스만 엉뚱하게 늙수그레하고 배 나온 부류 틈에 끼고 말았다.

은근슬쩍 그녀를 추어주면서 뭐라도 하나 얻을 게 있나 견주는 눈치들이었다.

“케츠모리스 공작, 오늘따라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허어, 로네스 자작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케츠모리스 공작은 평소에도 미모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입니다. 클라이드 전하의 뒤에 있어도 전혀 꿀리지 않지요. 전하의 준수함에 견줘도 아름다운 분입니다.”

타인의 각도에서는 그렇게 보였나? 클라이드의 대단한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한 프레임에 잡혔다는 의미라서 에디스는 내심 아찔했다. 모두들 속으로는 저를 오징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아첨과 같은 립서비스가 기차놀이처럼 계속됐다.

“이번 총사 대회에 공작이 출전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공작을 응원하느라고 제 목이 쉴 지경이었지요. 취미라고 하더니, 어쩌면 그렇게 총을 잘 쏘시는지.”

“케츠모리스 공작의 천재성이 빛난 덕이 아니겠습니까.”

“국정 회의에서도 늘 클라이드 전하를 완벽히 보필한다고 들었습니다.”

“암요, 암요.”

“그러고 보니 요즘 불법 노예를 단속하려고 한다던데요. 그것도 공작이 조사해 보고한 겁니까?”

빙빙 에둘러서 칭찬 샤워를 한 다음에 한 사람이 은근슬쩍 다른 얘기를 끼워 넣었다.

이것이구나. 최근에 핫한 이슈가 노예 단속이 맞기는 하다. 그걸 에디스에게 물어보고 힌트라도 얻으려고 다들 이렇게 혀에 기름을 바른 듯했다.

에디스는 일부러 불편한 티를 냈다. 대외비를 지켜야 하는 부분이라 말조심했다.

“누가 제안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지요. 부디 전하의 뜻대로 일이 추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별다른 정보를 내주지 않으며 화제의 중심에서 물러났다.

연회가 별로 재미없었다. 남들은 즐거워 보이는데 제게는 이런 물음을 던지는 자들이나 꼬이다니.

에디스는 같이 놀 만한 사람을 찾았다.

저만치에 언뜻 페이튼이 보였다. 남들보다 반 뼘은 큰 키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는 재빨리 인파에 몸을 숨겼다. 서둘러 몸을 움직여 그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홀 반대편까지 빙 돌았다.

‘페이튼에게 걸리면 연회가 더 재미없어질 거야.’

조만간 혼담을 결렬하겠다고 통보할 셈이었다. 되도록 조건만 따지는 자리를 마련하면 좋을 듯했다.

페이튼과는 잡담을 길게 나누고 싶지 않아서 연회에서 마주치기가 꺼려졌다.

시종과 궁인이 들락거리는 후미진 출입구에 몸을 숨기며 연회장을 기웃거렸다. 저기에 아카데미에서 친했던 친구가 보였다. 페이튼에게 들키지 않게 저기까지 갈 수 있으려나.

그녀는 수풀에 숨어 귀만 내민 토끼처럼 빼꼼히 고개를 빼 두리번거렸다.

“에디스, 뭐 해?”

“앗!”

뒷등을 톡 건드리는 느낌에 깜짝 놀랐다. 클라이드였다.

“숨어 있던 중이었어?”

그가 입을 주먹으로 막고 쿡쿡 웃었다. 제 꼴이 어지간히 웃겼나 보다.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풀렸다.

언제 테라스에서 내려왔는지 감쪽같이 에디스를 찾아낸 게 신기했다. 사람들은 황태자가 쪽문 너머 있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좁은 통로를 따라 음료 쟁반을 든 궁인들만 바삐 오갈 뿐이었다.

“대체 뭘 피해 숨은 거지?”

“별거 아니에요. 그냥.”

에디스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그 역시 발견했다.

“그레이브즈 공작?”

“네, 좀……. 여기에서 마주치기는 싫어서요.”

“잘 판단했어. 너를 저격하려 했던 배후에 역시 귀족파가 있더군. 공작은 이제 완전히 귀족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조심해야 해.”

“페이튼이 나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요?”

“공작은 아니고, 아마 디트리안 백작 쪽인 것 같아. 증거가 없어서 잡아들이지 못하고 있지.”

죄다 한통속인 세력이라 페이튼이 무조건 결백하다고 확신하기 힘들었다.

에디스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페이튼의 햇살 같은 이미지 속에 얼마나 음침한 그늘이 숨어 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추워?”

그녀가 팔뚝을 엇갈려 잡자 클라이드가 물었다.

“아뇨, 기분이 찝찝해서요.”

“우리…… 나갈까?”

“어딜요?”

“근처에 쉴 만한 데가 많아.”

그레이트 홀은 황태자 궁과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다. 에디스는 시종으로 몇 달이나 일하면서도 여기까지 올 용건은 없었기에 홀 안팎이 대부분 낯설었다.

좁은 통로를 거쳐 건물의 후미로 빠져나갔다. 소담한 꽃이 핀 화단을 옆에 끼고 땅거미가 지는 나무 아래를 지났다. 조약돌이 깔린 길을 가는 동안 줄지어 선 나무가 점점 굵고 커졌다.

어느 순간 사박사박 물결 소리가 들렸다. 잎이 풍성한 나무 너머로 동그란 연못이 나타났다.

“와아, 멋있어라. 물이 반짝거려요.”

“여기는 제한 구역이라 연회장의 초대객들을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편히 있어.”

연못가의 벤치에 그가 손수건을 깔아 줬다.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그냥 바람이나 쐬러 나오자고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하얀 손수건이 나풀거리는 자리에 옹크려 앉았다. 기가 잔뜩 죽어서 스커트 위로 올린 손을 꼼지락거렸다.

드레스가 아주 불편했다. 허리는 있는 힘껏 조였고 스커트는 커다랗게 부풀렸다. 옷의 폭이 워낙 넓어서 클라이드가 옷자락을 쓱 밀어 옆에 앉을 곳을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나란히 앉으니 왠지 숨이 막혔다.

몸을 조이는 속옷 때문인지, 긴장된 분위기 탓인지 모르겠다.

문득 바람이 불었다. 연못이 쏴아 소리를 내며 수면에 깃털 모양의 물결을 만들었다.

바람은 에디스에게도 미쳤다. 드레스 끝단에 달린 레이스를 파닥파닥 날리더니 곱게 빗은 머리칼도 헝클어뜨렸다.

뒤로 넘겨 헤어핀으로 고정한 머리가 몇 가닥 삐져나왔다.

마디가 굵고 긴 클라이드의 손이 뻗어 왔다.

어수선하게 날리는 귀밑머리를 손등으로 가만가만 쓸어넘겼다.

얄궂은 바람이 이에 질세라 한 차례 더 불었다. 긴 머리칼 가닥이 입술에 붙었다. 클라이드는 엄지를 펼쳐 그녀의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잘 안 떼어지는군.”

손가락으로 아랫입술 가운데를 꾸욱 눌렀다.

실제로 머리카락이 아직 붙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에디스는 간지러운 느낌 탓에 흠칫 고개를 젖혔다.

“괘, 괜찮아요. 그냥 두세요.”

흔들리는 눈매로 그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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