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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63)화 (63/129)

63화

그의 걱정은 대부분 실제와 같았다. 에디스가 집에서 작성해 온 봉투가 코트 안주머니에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긴 망설임 끝에, 에디스는 결심한 것이 있었다.

소심한 한 발을 내디디기로.

클라이드의 큰 산과 같은 마음을 받아서 지탱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또한, 그보다 앞서서 선택권을 그에게 줘야 했다.

클라이드가 치부를 드러내면서 솔직하게 나왔으니 자신도 절대 비밀로 해 왔던 약점을 스스로 밝히자고 생각했다. 그는 에디스를 붙잡기 위해 황제의 시신을 보여 줬을 것이다. 반대로 에디스는 그의 마음이 도리어 제게서 떠날 각오를 하며 그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클라이드, 나 할 말이 있어요.”

산책하던 두 사람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오솔길 저편을 바라보는 그가 부득부득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작별의 순간을 예상하는 중일까.

하지만 에디스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사실은 나……. 감추던 게 있어요.”

“그게 뭔데?”

“그…….”

털어놓으려고 제대로 작정했지만 정작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이나 더듬거린 끝에 서두를 꺼냈다.

“클라이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

“난 에디스가 아니에요.”

“뭐?”

몇 뼘이나 차이가 나는 장신의 신장이 바람처럼 돌아섰다.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에디스를 관찰했다.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그녀의 표정에서 단순한 얘기가 아님을 직감하는 듯했다. 날렵한 굴곡의 미간을 찡그리며 시선을 집중했다.

“혹시 황제궁에 있는 폐하의 대역 같은 거야? 진짜 에디스는 따로 있고 그녀를 대신하는 건가?”

“그런 것과는 개념이 아예 달라요.”

“하긴 얼굴이 비슷한 사람은 찾을 수 있어도 네 천재성은 세상에서 유일할 테니까. 아니지, 에디스는 얼굴 역시 절대 누구와도 비슷할 수 없어.”

조금 머리가 좋은 것으로 지나친 칭찬을 받았지만 에디스는 일단 듣고 넘겼다. 뚫어지게 제 이목구비를 탐색하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저질러 놓은 얘기에 해명해야 했다.

“클라이드,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요.”

“말해 봐.”

“이곳은 그러니까……. 말하자면 소설 속이에요. 내가 살던 세계에서 어떤 작가가 썼던 글의 내용이에요.”

“글? 여기가?”

믿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에디스의 몸에 들어오게 됐어요. 대략 4년 전쯤에요.”

“하지만 넌 어딜 봐도 진짜 에디스 같은데.”

“소설에서 이 세계의 설정을 읽은 덕분이 커요. 그리고 에디스의 몸에서 감정이 얽힌 기억은 지워졌지만 단순한 경험이나 학습은 그대로 물려받았거든요. 5개 국어를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이유가 그거예요.”

그에게서 의심스러운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단박에 믿기는 힘든 얘기겠지.

“설마 나 때문에 이런 얘기를 지어낸 건가? 내가 많이 부담을 줘서?”

“아니에요. 이건 진실이에요. 적어도 나한테는요.”

에디스는 심호흡한 후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찬찬히 풀어냈다.

“육신은 원래의 에디스와 똑같아요. 천재급 두뇌는 몸이 지니고 있던 장점이거든요. 반대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내가 빙의했을 때 남아 있지 않았어요. 과거의 기억 대부분은 떠오르지만 감정이 깃들어 있는 기억은 할 수 없었어요.”

“네가 진짜 에디스가 아니라는 증거라도 있을까?”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어요. 다만…….”

“다만?”

“아버지가 얼마 전에 알려 준 적이 있어요. 어린 시절 내가 자주 궁에 들렀다고요. 그때 클라이드를 만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기 때 걸음마 한 기억까지 있지만, 궁에 왔던 기억은 감정이 섞여 있어서인지 떠오르지 않거든요.”

“나를 만났던 경험을 잊은 거야? 너무 어려서 잊었나 싶었더니.”

“역시……. 그럼 내가 아닌 진짜 에디스는 당신과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나 봐요.”

차츰 그에게서 혼란스러운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조금씩 믿어 가는 기색이었다.

믿든 안 믿든, 어차피 있는 그대로를 밝히는 중이라 에디스는 눈매를 올려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클라이드는 소설에서 주인공이었어요. 나는 황태자를 모시는 단역 시종이고요.”

“나는 주인공이고 넌 단역이면, 우리는 소설에서 맺어지지 않았겠군.”

“내가 읽은 내용에서 당신은 아드리안을 사랑했어요.”

“내가?”

“네, 모든 걸 바칠 만큼 지독하게요.”

“그거야말로 진짜 소설이군.”

그가 코웃음 쳤다. 남에게 보여 주는 전시용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서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관계를 들먹이는 게 못마땅한 듯했다.

“이참에 까놓고 말하지. 난 아드리안이 싫어. 그놈의 인위적인 향수 같은 오메가 냄새도 짜증 나. 그 냄새를 맡으면 코가 문드러지는 기분이야.”

“확실히 지금은 아드리안과의 사이가 별로인 것 같아요. 소설과 이 세계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거든요.”

“어떻게 어긋나고 있지?”

“원작의 클라이드는 나와 이만큼 가깝지 않았어요. 곁에 두고 부리는 시종에 불과했죠.”

“그럴 리가 있나.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눈에 띄는 존재인걸.”

“작가의 설정은 달랐나 보죠.”

그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무척이나 잘난 얼굴이 다가왔다.

에디스를 유심히 탐색하느라 클라이드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이 고백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어하는 게 분명했다.

“어쨌든…….”

한바탕 심호흡한 후, 이렇듯 장황하게 사정을 늘어놓은 이유를 털어놨다.

“나는 클라이드가 어릴 때 알던 에디스가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내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더라도, 그게 예전의 추억에서 이어졌다면 지금의 나와는 상관이 없어요.”

“에디스, 그건 좀 섣부른 듯싶은데.”

“결정은 당신에게 맡길게요.”

품에 간직했던 퇴직 희망서를 그에게 건넸다. 큼지막한 손을 펴 그 위로 봉투를 올려놨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어느덧 클라이드에게 정이 들었던가. 정보다 깊은 마음이 생겼던가.

그가 쉽사리 사직서를 수용할까 봐 겁이 났다. 봉투를 사이에 두고 손을 겹치며 쓸데없이 질척거렸다.

“클라이드가 알던 에디스가 돌아오는 편이 나을까요?”

“…….”

“뭐, 어차피 내가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 세계에 온 것도,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네가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인가?”

거의 마음을 접던 찰나 그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위를 올려다보던 에디스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마치 제가 돌아갈까 봐 두려워하는 듯한 물음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클라이드는 처음부터 에디스라는 캐릭터에게 지극히 큰 관심을 보였다. 집무실에서 문고리에 엉덩이를 찍히고, 측근 시종의 시험을 치를 때부터 남과는 다르게 에디스를 대했다.

잠시 헛생각한 머리를 털며 대꾸했다.

“언제 어떻게 돌아갈지는 알 수 없어요. 여기에서 이 몸으로 평생을 살지, 지금 당장 내 세상으로 갈지.”

“네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거짓인지 진실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어. 내가 에디스를 너무 혹사시켜서라든가 찝쩍거려서……. 그래서 핑계 대는 건가 싶기도 해.”

“클라이드의 시각에서는 그렇겠네요. 그럼 이건 어때요? 미래의 힌트를 준다면요.”

“미래?”

“당신은 귀족파와 끝내 화해하지 못할 거예요.”

“당연하지 않나. 에디스도 내 아버지를 봤잖아.”

“그리고 황실의 힘을 키워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할 거예요. 이 나라가 들썩일 만큼. 그보다 선을 넘어서 제국이 휘청이다가 멸망할 만큼이요.”

힘을 줬던 클라이드의 미간이 더욱 좁혀들었다.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계획은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원작의 소개 글에 적혀 있었거든요.”

에디스는 아쉬움을 떨치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이제는 운명이 제 손을 떠난 느낌이었다.

자주 설레다가 이젠 격렬히 펌프질하는 심장을 꾹 눌렀다. 뒷걸음질 치며 가만가만 고개를 저었다.

“여태 에디스의 행세를 해서 미안해요. 나도 원치 않게 닥친 세계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뒤로 물러설 때는 느렸지만 등을 돌린 다음에는 발이 빨라졌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돌연 밀려왔다. 남의 자리를 뺏은 기분이었다. 절대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주변인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가 있겠지.

좌우로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오솔길을 거슬러 황태자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클라이드가 저를 주목하고 있는지, 괜한 자격지심인지 알 수 없는 심정으로 목적지에 도달해 재빨리 현관의 응달에 몸을 감췄다.

* * *

온종일 날이 선 검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에디스는 부쩍 말수가 적어진 클라이드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하지만 시종으로서의 책임이 있으니 공무를 수행해야 했다. 관료와 귀족을 접견하는 자리에서는 클라이드의 등 뒤에 서서 여느 때처럼 메모지를 채웠다.

잠깐 여유 시간이 주어질 때조차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가 불길했다.

하루 앞으로 닥친 연회가 무사히 준비되고 있는지 챙기고, 각자 입을 옷도 확인했다. 클라이드가 연회용 복장을 점검할 때 에디스도 옆방에서 드레스를 입어 봤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는 거의 마음을 내려놨다. 사실 빙의 얘기를 했을 때부터 클라이드와의 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원래의 에디스가 그와 아주 인상적인 추억을 공유한 듯해서였다. 머릿속에서 그 순간이 지워진 거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클라이드도 마찬가지로 옛날의 에디스가 소중하겠지.

싸운 것도 아닌데 냉전과 비슷한 상태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에디스는 첫날만 연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웃고 즐기는 데 관심이 많지도 않았고 사교계에서 인기 있는 캐릭터도 아니었다.

그래도 예쁜 드레스를 입으니 기분은 좋았다.

치장하고 꾸미는 일에 전문가인 궁인이 몇 사람이나 에디스에게 달라붙었다. 다들 옷매무시를 다듬는 손끝이 야무졌다.

황실의 일원이라면 시녀가 곁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고작해야 시종의 신분이었던 탓에, 일반 궁인이 연회 준비를 도왔다. 케츠모리스 본가에도 에디스의 시녀는 없었다. 집사도 고용하지 못하는 판국에 급여가 꽤 센 시녀까지 둘 엄두는 내지 못했다.

씩씩하게 혼자 방을 나서려니 클라이드도 때마침 밖으로 나왔다.

그가 걸음을 멈췄다. 눈부신 금안이 에디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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