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주름 한 점 없이 판판하게 정리된 시트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잠을 자면서 조금도 뒤척이지 않은 것 같았다.
불길한 느낌에 그녀는 멈칫거렸다.
클라이드가 휘장을 완전히 걷어 기둥 고리에 걸었다. 고요하던 황제의 침대에 오전의 햇빛이 여과 없이 들이닥쳤다.
“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너무 놀라 탄성이 튀어나왔다. 뜻하지 않게 흘린 목소리를 감추려고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다.
말끔하게 펴진 시트의 끝자락이 황제의 머리를 덮고 있었다.
황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전신을 하얀 시트로 가린 채 죽은 자가 되어 누운 모습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돌아가신 지는 오래됐어. 독살 사건 이후로 얼마 버티지 못하셨지.”
“지난 총사 대회의 개회식에 오신 분은요? 폐하께서 잠깐 얼굴을 비치고 가셨잖아요.”
“그 사람은 내가 관리하는 자야. 황제궁의 시종 중 한 명이지.”
그가 침대 머리맡에 놓인 향에 불을 붙였다. 향대 위로 한 가닥의 연기가 하얗게 올라왔다.
납골당처럼 조용한 공간에서 클라이드는 지난 사건을 조곤조곤 털어놓았다.
이전 황태자였던 누님은 손쓸 틈도 없이 명을 달리했다는 것, 황제인 아버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한 달 남짓 만에 돌아가셨다는 것, 당시에 자신이 권신 세력에게 핍박받았던 것.
사령관으로서 변경에서 근무하던 클라이드는 중앙 권력에 지지기반이 약했다. 누님이 워낙 출중한 인재였던지라 그는 부담 없이 군 생활만을 누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황실을 이끌게 되었을 때 클라이드는 너무나 무력했다. 가진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황제의 죽음을 감추느라 그가 가진 역량을 모두 써야 할 정도였다.
그는 건조 방부 처리를 해 바싹 말라붙은 황제에게 별 탈이 없는지 확인했다.
시트를 들치는 동안 에디스에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녀는 사각지대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깊이 잠긴 음성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두고 봐.”
에디스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아버지와 누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턱을 단단하게 세우며 이를 가는 클라이드를 망연히 지켜봤다.
그녀는 귀족들과 대립하고 매번 날을 세우는 그의 행동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원작 소설의 개연성을 눈으로 본 기분이었다.
권신 가문과 황실 사이에 타협은 불가능하겠구나.
이대로라면 훗날 피의 숙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로맨스의 흐름은 변화했지만 메인 스토리의 흐름은 비슷한 이유가 이 침실에 있었다. 클라이드의 가슴속에 맺힌 한이 매한가지인 탓이었다.
빙의하기 전에 그녀가 읽은 소설의 분량에서는 미라가 된 황제의 사정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 홀로그램으로 뜬 최신 연재분에서 에디스가 이미 겪은 일이 묘사되어 있는 걸 보고 당황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 듯했다. 현실의 시간이 소설보다 앞서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또 최신편을 보게 된다면 죽은 황제가 등장하려나.
클라이드가 휘장을 원래대로 되돌리자 그녀는 황제를 애도하며 고개를 숙여 묵례했다. 황제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심란해진 기분으로 뒤돌아섰다.
시신을 보여 준 그의 속뜻이 에디스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아주 큰 효과를 발휘했다.
황궁을 떠나겠노라고 그토록 모질게 마음을 먹었건만, 에디스는 연연하는 마음을 클라이드에게서 떼어 내지 못했다.
* * *
본가의 서재에서 에디스는 빈 종이와 한참이나 눈싸움했다.
발치에는 연습지가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사직의 의사를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문구를 적어 봤는데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다 옹색한 변명 같고, 도망가기 위한 핑계 같았다.
그게 진실이라서 더욱 글을 짜 맞추기가 어려웠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해서 겨우 퇴직 희망서를 작성했다.
부옇게 밝아 오는 동녘을 바라보자니 황실 사격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침 운동에 나갈 시간이었다. 지금쯤 클라이드는 말을 달리고 있을까? 대회와 상관없이 몸 쓰는 일을 참 좋아하는 남자니까 아마도 뭔가를 부지런히 하고 있겠지.
책상에 올려진 하얀 봉투에 시선을 던지다가, 휑한 정원의 담장 위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감상했다.
‘그가 황제의 시신을 보여 준 건, 나에게 손을 내민 거나 다름없어.’
이건 연인이나 황태자비 같은 관계라기보다 생사고락을 함께할 상대로서 제안받았다고 봐야 했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믿는다고 행동으로 보여 줬다. 최대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건 아마도 도와 달라는 뜻이겠지. 권신을 척살하도록 힘을 보태 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힘들어. 쉽지 않은 길이 될 거야.’
귀족이 힘을 합치면 황실을 능가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에디스가 아무리 클라이드를 지원해도 고난의 가시밭길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로지 군신 관계로만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클라이드는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그의 열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감정의 흐름이다.
‘내가 그의 마음을 따라갈 수 있을까?’
소설 캐릭터에서 이제 막 벗어나 한 명의 남자로 깨닫게 된 클라이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까 싶었다. 한없이 가볍게만 보이던 이 세계가 점점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개인의 창작물인 세계가 진짜처럼 여겨졌다.
클라이드와 힘을 합쳐 좀체 변화하지 못할 것만 같은 미래를 바꾸도록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원래 아드리안의 자리였던 황태자비, 실제로는 황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좋아해도 될까?’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과정은 대충 그 정도겠지. 조금 설레고, 괜히 멋있어 보이고. 그러면 손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거다.
아주 푹 빠지지 않아도 될지 몰라.
클라이드와 좋은 시간을 거듭하다 보면 제 입에서 저절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
이따금 그와 잘해 보고 싶었다. 먹먹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던 클라이드를 안아 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좋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보듬는 것쯤은 해도 되지 않나 갈등했다.
세계관에 혼란이 있던 시기에는 함부로 그에게 접근했다가 원작과 어긋날까 봐 걱정했다. 어차피 원작과 심하게 틀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나서는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에 바빴다.
지금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보인다. 농민과 장사치와 어린아이들이 살아 있다.
그 중심에 외롭고 넓은 어깨의 클라이드가 있다.
“하아…….”
고민은 꼬리를 물고 계속됐다.
하루 해가 꼭대기까지 오르도록, 그녀는 밤새워 고뇌한 머리를 산발한 채 어떤 미래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 * *
에디스에게 휴가로 주어진 기간이 그리 길지 못했다.
아예 복귀하지 않을 셈이면 상관없지만 들썩들썩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편히 쉬지 못했다. 총사 대회가 마무리된 후부터 황실 연회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수년 만에 황실이 주도한 축제라서 모든 계층을 망라해 이벤트가 준비되었다. 서민을 위해서는 음식 나눔과 노점 거리 축제, 황실의 권위를 위해서는 총사 대회, 귀족을 위해서는 연회가 열린 것이다.
이 중에서 연회는 황궁의 그레이트 홀이 아주 오랜만에 개방되는 중요한 행사였다. 물론 황태자의 수발 시종인 에디스도 빠질 수 없었다.
클라이드가 공무를 시작할 시각에 맞춰 출근한 그녀는 익숙한 복도를 지나 집무실에 들어섰다.
드넓은 황태자 집무실에서 일하는 면면도 익숙했다. 기록 담당 시종과 일정 관리 시종, 잔무 시종 등이 에디스에게 가볍게 눈인사했다.
클라이드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멈칫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벌써 출근한 게 뜻밖이었나 보다.
원래 에디스에게 주어진 휴가 기간은 훨씬 길고 그녀는 황실 연회와 관련해 맡은 일도 없었다. 총사 대회에만 집중하기로 약속한 덕분에 연회는 속 시원히 즐기기만 하면 됐다.
“아, 잠시만.”
그가 손끝을 들어 책상 건너편에 선 사람에게 얘기를 멈추게 했다.
“나중에 다시 보고를 받겠네.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지.”
“예, 전하. 그럼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주게.”
보고를 받다가 만 내용도 마침 연회에 관해서였다. 정무 장관이 예산과 관련해 설명하던 중이었다.
지금 한창 홀을 장식하는 중이고 내일이면 연회가 시작한다.
나중으로 미룰 시간이 없을 텐데.
그렇다고 황태자의 결정에 에디스가 따지고 들지는 못했다. 측근들에게만 둘러싸여 있을 때 서로 이름을 부르고 말도 편하게 할 뿐, 정무 장관만 돼도 클라이드와 에디스의 친구 같은 대화를 본 적이 없었다.
정무 장관이 물러가자 에디스가 당장 다가들어 한 소리 했다.
“이대로 보내면 어떡해요. 언뜻 들으니까 연회가 예산을 넘어서서 곤란한 상황 같던데.”
“이따가 들르라 하면 돼.”
“그럴 거면 지금…….”
“에디스, 잠깐만 정원 산책이나 할까?”
클라이드가 대뜸 물었다. 다른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완강한 태도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라 걱정은 혼자 다 한 셈이 된 에디스는 공연히 어색해졌다. 그가 이끄는 대로 쭈뼛쭈뼛 밖으로 향했다.
코앞에 있지만 자주 나올 시간은 없는 황궁 정원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나무와 잔디에 물을 뿌린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잎사귀마다 촉촉하게 물기가 맺혔다. 작은 토끼가 화단 구석에서 겁 없이 뛰쳐나왔다가 두 사람을 보고 놀라 달아났다.
은근슬쩍 그가 팔꿈치를 내밀었다.
에디스는 잡아도 될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저 흔한 에스코트로 받아들여도 될 듯해서 조심히 그의 팔에 제 손을 얹었다.
조금 부풀었다가 내려앉는 클라이드의 가슴팍에 안도하는 듯한 기분이 엿보였다.
“더 쉬고 올 줄 알았어.”
“혹시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요.”
“전혀. 에디스가 할 것이라곤 내일 궁에서 준비해 둔 드레스를 입는 일뿐이야.”
“집에 있는 옷을 입어도 되는데.”
“이미 다 맞춰 놨는걸. 여러 벌 중에서 네 눈에 차는 옷 하나쯤은 있겠지.”
총사 대회 준비로 분주하던 기간에 에디스는 클라이드가 부른 드레스 재단사를 억지로 만난 적이 있었다. 몇 권에 걸친 포트폴리오를 봐야 했는데, 당시에는 사격에만 정신이 팔려 꼼꼼히 선택하지 못했다.
게다가 시종에게 어울릴 만한 업무 복장이 아니라 황실 연회에서 입을 화려한 드레스여서 냉큼 골라잡기가 뭣했다.
“여러 벌씩이나……. 그렇게는 필요 없을 텐데요.”
“닷새 동안 연회를 여니까 최소한 다섯 벌은 필요할 거 아냐. 거기에 여유분을 더하고, 네 마음에 들지 않는 디자인도 있을 것을 감안해서 준비했어.”
“닷새 내내 연회에 참석해야 해요?”
클라이드가 눈썹을 찡긋 올렸다.
“내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때는 첫날 시작 시간이라서, 그때는 에디스도 곁에 서 줬으면 해. 그 외에는 원하는 만큼 즐겨도 돼.”
에디스는 그의 말투에서 굉장히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제 그녀가 퇴직 희망서를 제출할지 몰라 조마조마해하는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