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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60)화 (60/129)

60화

에디스는 블라우스 단추를 목 아래까지 채웠다. 여느 때처럼 코트와 스커트로 구성된 시종용 복장을 차려입고 낮은 굽 구두를 신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다.

목덜미에 열꽃이 울긋불긋하게 올라와 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고집 좀 부리지 말고, 제발 에디스.”

이런 그녀의 모습을 안타까이 지켜보는 클라이드는 잔뜩 어두운 낯빛을 했다. 조만간 지엄한 명령을 운운하며 강제로라도 침대에 눕힐 기세였다.

“시종이 황태자의 침대에서 진료를 받을 수는 없잖아요.”

“괜찮다니까. 내가 허락해.”

“난 싫어요.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에디스!”

“진료를 마치고 나면 병가를 낼게요. 집에 돌아가서 당분간 푹 쉬고 싶어요.”

팔을 잡아 부축하려던 손이 멈칫했다. 클라이드도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있었다.

에디스는 진작부터 시종직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혀 뒀다. 한동안 휴가를 보낸 후, 그대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궁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몸살이 심하게 든 것 같네요. 의사는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죠?”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화제를 돌렸다.

클라이드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러다가 결심을 한 듯, 다가오기를 멈췄던 손을 뻗어 열 오른 그녀의 손을 느슨하게 잡았다.

“네가 집에 돌아가 있겠다면.”

아담한 손등을 따라 미끄러져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꼈다.

“내가 돌봐 주러 갈게.”

“아니에요. 클라이드는 할 일도 많을 텐데.”

“러트 사이클마다 네가 매번 지켜 줬으니, 네게 히트 사이클이 온다면 내가 함께하고 싶어.”

“히트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단순한 몸살이라도 그래. 직접 간호할 거야.”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고 그가 에디스를 잡아끌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듣든 대꾸하지 않았다. 손만 꽉 쥔 채 나란히 침실을 나섰다.

그는 화가 난 듯했지만 분통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서글퍼 보이지만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리석처럼 앞만 바라보는 얼굴이 서늘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실 주치의를 만났다. 클라이드는 어젯밤부터 달랐던 그녀의 상태를 꼼꼼히 설명했다.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지극히 냉정한 말투였다.

“에디스는 어제저녁부터 미열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열이 높아졌더군. 오메가 페로몬이 이성을 유혹할 때만큼 진하게 풍기고 있어. 몸살 기운도 아주 심해. 어제 에디스가 경기를 치르며 심하게 무리했으니, 그 점을 감안해서 봐주길 바라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의사는 조심스럽게 에디스를 진료했다.

가지고 온 진단 키트로 페로몬의 양과 상태를 확인했다. 결과는 역시 클라이드가 얘기한 대로였다.

“케츠모리스 경, 축하드립니다. 이제 발현할 준비가 된 것 같군요.”

“발현…… 인가요?”

“혹시 지금 약간의 실험을 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어떤 실험인지.”

“전하께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아 보십시오. 알파나 오메가는 흔히들 페로몬을 뿜어내지 않을 때라도 특유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거든요. 향수를 뿌린 후 잔향이 오랫동안 남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에디스는 당황해 버렸다. 한창 기분이 상한 클라이드에게 코를 대고 킁킁거리기는 곤란할 것 같았다.

“가까이 가기에는 좀…….”

하지만 클라이드는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움직임을 보였다. 의자를 당겨 오더니 그녀의 곁에 바짝 붙었다. 의사 앞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적극적인 태도였다.

“에디스는 가만히만 있어. 내가 대 줄 테니.”

코트를 젖히더니 안에 받쳐 입은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었다.

레이스 달린 깃을 벌리고 나서 그녀에게 제 목을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나?”

의사에게 물을 때, 클라이드의 기다란 목이 일렁였다. 평소에는 보일 듯 말 듯 하던 목울대가 일순간 톡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근육질의 어깨와 선명하게 선을 이룬 빗장뼈가 그녀의 눈앞에 진수성찬처럼 들이닥쳤다.

어서 냄새를 맡으라는 듯 클라이드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날렵한 턱선 끝에 달린 귓불이 말끔했다.

에디스가 머뭇거리면서 코를 가까이했다. 그의 선명한 시선이 제 이마에 내리꽂혔다. 뚫어질 듯 쳐다보는 눈빛 때문에 안 그래도 열이 나는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스읏, 들이마시는 호흡을 따라 특별한 향을 느껴 보려고 노력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작게 도리질 쳤다. 클라이드가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는 걸 셔츠 사이의 목선과 가슴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의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케츠모리스 경, 그동안 약은 꼬박꼬박 챙겨 드셨지요?”

“물론이에요. 매일 시간을 정해 두고 한 알씩 먹었어요.”

“보아하니 약의 효과는 미미한 듯합니다만, 그래도 계속 드시는 편이 낫습니다. 오늘 오메가 페로몬이 쏟아지게 된 기회에 부디 경이 꼭 발현하면 좋겠는데…….”

침음성을 흘리며 고심하던 의사가 클라이드에게 부탁했다.

“전하, 알파 페로몬을 서서히 배출해 보시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아무래도 제가 같이 있으면 곤란하겠지요? 잠시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황태자가 유혹의 향을 분출하는 직접 보는 건 예의에 어긋났다. 피치 못할 사정이면 모르겠으나, 충분히 자리를 비켜 줄 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사는 차트를 챙겨 일어났다.

“조금씩 양을 늘려 가면서 뿜어 보십시오. 혹시 모르니까 시도해 보는 겁니다.”

짤막한 당부와 함께 의사가 사라진 후, 클라이드는 그녀와 간격을 더 좁혀 앉았다. 이젠 두 사람의 다리가 붙다시피 할 정도가 되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까지 끌어당겨 절반쯤 끌어안았다.

꽤 민망한 자세가 연출되는 바람에 에디스는 잡힌 허리를 바르작거렸다.

“좀 불편해요.”

“잠깐만.”

저절로 수그러드는 고개를 그가 살며시 받쳐 들었다. 그녀의 턱 아래로 손끝을 고여 올리자, 더는 클라이드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본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부터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었던 얼굴이다.

여전히 잘생기고 조금 슬픈 얼굴.

이쯤에서 그를 떠나야 한다는 에디스의 의지가 미안한 마음과 뒤엉켜, 차마 눈동자를 그에게 향하지 못했다.

“나를 봐, 에디스.”

“…….”

“나는 너 절대로 못 보내.”

“…….”

“네가 나한테 마음이 없어도 괜찮으니, 아무리 많이 차여도 상관없으니…… 가지 마.”

“클라이드.”

“가지 말라고, 제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널 곁에 둘 거야.”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놓을 듯 아찔했다. 클라이드가 페로몬을 차츰 풀어내고 있으니 그 영향인 듯싶었다.

“하아, 클라…….”

가까이에 보이는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라 의지할 만한 곳에 몸을 기댔다.

알파의 넓은 어깨에 어질어질한 이마를 눌렀다.

“괜찮아?”

클라이드는 자상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으응, 괜찮아요.”

“페로몬 실험은 여기까지만 할까? 널 무리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잠시만요.”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에디스는 그의 선이 굵은 목덜미에 얼굴을 댄 채 심호흡했다.

문득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숲을 거니는 것처럼 상쾌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

이게 뭘까? 냄새와 함께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가슴이 뚫리도록 시원한 향기에 이어 달곰한 냄새도 느낄 수 있었다. 단 냄새는 숲의 향기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혼잣말하면서 푹 숙인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도 모르게 이마를 알파 페로몬이 짙게 뿜어져 나오는 부위에 대고 비비고 있었다.

“이상하다니?”

몸도 못 가눌 만큼 몽롱해진 채 웅얼웅얼 대꾸했다.

“숲을 거닐다가 꿀을 찾았어요. 단 냄새가…….”

“냄새가 어떤데?”

“우선 맛부터 보고 싶어요.”

긴 잠에서 깨어나듯이 그녀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열에 달뜬 얼굴은 완연한 홍조를 띠었고 눈자위는 불그스름하게 충혈됐다.

클라이드를 응시하고 있으나 초점은 전혀 맞지 않았다.

목덜미 쪽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움켜쥐려 했다. 냄새를 손으로 잡으려는 듯 엉뚱한 행동이었다. 에디스의 상체가 그를 향해 기울었다. 휘청휘청 쓰러지려는 몸뚱이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허공을 짚는 에디스의 손을 당겨 제 어깨 뒤로 두르게 했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여체를 가뿐히 안아 들었다.

“그거, 내 알파 향이 맞아.”

“알파 향?”

“페로몬을 많이 뿜어내야 알아채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향을 느끼게 되어서.”

“냄새를 맡으니까 몸이…… 간지러워요.”

“히트 사이클이 시작돼서 그래.”

“지금 발현하는 건가요?”

“응, 지금.”

클라이드는 셔츠를 열어젖힌 제 목에 그녀를 기대게 하며 찬찬히 알파 페로몬을 흘렸다.

“에디스와 같이 있는 거…… 허락해 줄래?”

다정한 음성이 에디스의 귓가를 스쳐 나직하게 울렸다. 진심을 담은 고백만큼 간절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몽롱하니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이게 무슨 부탁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함께 히트 사이클을 보낸다는 뜻이었다.

“클라이드, 그건 좀.”

“같이 있기만 할게. 지금처럼 이렇게 알파 페로몬을 맡게 하면서.”

“같이 있기만?”

“그래, 같이만.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약속해.”

시야에 그가 흐릿하게 보였다. 몸에서 열이 계속 나는 바람에 눈두덩이가 뜨거웠다. 발현할 때는 열이 심하게 난다고 하던데, 몸살 기운인가 싶던 게 바로 발현열이었다.

열 때문에 멍한 상태로 생각해 봐도, 히트 사이클을 광란의 시간으로 점철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같이 있기만 하는 건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알파 페로몬의 도움을 받으면 사이클을 수월하게 넘길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고 있으려니 그가 친절히 얘기를 덧붙였다.

“에디스, 네가 나를 돌봐 줬듯이 그저 나도 돌봐 주고 싶어.”

“…….”

“힘든 시기에 남의 손을 빌리기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어? 에디스가 원치 않는데 억지로 접근하지는 않을 거야.”

유혹의 힘은 강력했다. 히트 사이클에 돌입한 상황과 치명적인 알파 페로몬이 그녀의 심리를 제법 흔들었다.

하지만 최종 결정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한 건 따로 있었다.

클라이드에게 기댄 뺨을 통해 전해지는 음성이 진중하게 느껴졌다. 앓는 아이를 돌보는 듯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열이 얼마나 나는지 이마를 짚어 보는 행동이 마냥 다정했다.

“네, 그럼…….”

긍정의 표현을 하자마자 그녀의 몸이 무너졌다.

이제는 됐어. 클라이드가 알아서 잘해 줄 거야. 팔다리에 힘을 풀고 온전히 자신을 맡겨 버렸다.

기꺼이 그녀를 받아 안는 손길은 발현열만큼 뜨거웠다.

에디스는 잠시 클라이드를 떠나려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지금은 본능이 이성을 지배하는 중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의 마음을 받아 주지도 않았으면서 폭 안아 주는 넓은 품이 좋았다.

그의 감촉과 목소리가 좋았다.

허락을 구하는 애절함이 좋았다.

여태껏 아득바득 버티며 집에 가겠다고 우겨 왔건만, 그녀는 돌봄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부터 마음이 놓였다.

마음과 함께 몸도 녹녹하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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