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경기장은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다음 발, 또 그다음 발을 쏠 때마다 끓는 가마솥처럼 모두가 들썩거렸다.
거의 대부분이 에디스를 응원했다.
“공작님—.”
“파이팅, 공작님.”
“공작님 예뻐요! 멋있어요!”
그녀는 뜻밖의 사격 슈퍼 스타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두 선수 사이에 점수 차이가 거의 나지 않으며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는 점이었다. 이전의 무력하던 경기는 관객의 뇌리에서 잊혀질 만큼 박진감 넘치는 결승이었다.
초반에는 에디스가 조금 앞섰다. 그러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닉슨이 실력을 발휘했다.
마지막 한 발을 남겨 뒀을 때 닉슨이 1점을 리드했다. 누구든 마무리를 잘하는 선수가 승리하는 상황이었다.
클라이드는 자주 에디스를 놀리곤 했다. 너무 일에 몰입하는 성격을 출세욕이라고 했고, 그녀는 그냥 승부욕일 뿐이라고 맞받아쳤다.
에디스는 승부욕 하나는 남부럽지 않다고 자부했다.
정말 지고 싶지 않아서, 초집중하며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8점!”
장내에 아쉬운 탄성이 터졌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보다. 긴장도 많이 했고 조준하는 시간도 길었던 탓이다.
닉슨이 최후의 사격을 했다. 그는 에디스보다 빠른 타이밍에 발사했다.
“10점!”
우승자로 닉슨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진행 요원들이 준비해 뒀던 꽃 종이를 마구 날렸다. 관객들은 응원하던 에디스가 졌지만 닉슨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비로소 시야가 넓어졌다. 총쏘기에만 몰입해 있다가 주변 상황을 뒤늦게 깨달았다. 닉슨은 꽃 종이 범벅이 되어 어벙하게 서 있었고, 경기장 전체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결승에서 패배한 것이 그다지 마음 상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는 오히려 깔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준우승이네.”
게다가 훨씬 중요한 부분에서 그녀가 승리했다.
이 정도면 총사 대회가 성황리에 치러졌다고 볼 수 있었다.
멀리 보이는 클라이드는 일어서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지 로얄석 앞쪽 난간까지 나왔다.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켜보는 클라이드의 모습에 초조함이 역력해 보였다. 에디스와 눈이 마주치자 대기석 쪽으로 손가락질했다. 얼른 경기장 중앙에서 물러나 안전을 확보하라는 뜻 같았다.
경기는 끝이 났지만 클라이드의 싸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의 손짓을 보고 에디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석에 있던 자들은 승부가 나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는 행동이 심하게 무례했다.
경기장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본 에디스의 시선이 가까운 닉슨에게 되돌아왔다.
그녀는 상큼한 걸음으로 다가가 닉슨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승 축하해.”
이런 큰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환희에 차 날뛰어도 모자랄 텐데, 닉슨은 등을 구부리며 쩔쩔맸다.
“예에…….”
“왜 그러지?”
“이래도 괜찮은 건지 몰라서요.”
의기소침한 닉슨의 모습을 보니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보상은 할 생각이었지만 당장 조치할 필요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편을 바꾼 셈이었다. 페이튼에서 에디스로 갈아탄 상황이었다. 시골 사냥꾼이 황실과 귀족의 물밑 다툼을 일일이 따져서 선택했을 리는 없지만, 이제부터는 그녀가 닉슨을 책임지는 게 옳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지켜 주시다니요?”
닉슨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는 듯했다. 시합에 불참한 네 명의 선수가 죽거나 행방불명이라는 사실도 전해 듣지 못했겠지.
“혹시 돌봐야 하는 가족이 있나?”
“아니요, 전 혼자입니다.”
“그럼 너만 조심하면 되겠군. 이제부터 내가 정해 주는 호위와 늘 함께 다니도록 해.”
“네? 무슨 일이길래 이러시는지…….”
“일단 내 말대로 하고, 황실 총사대에 입대할 때까지는 몸을 사려야 해. 그리고 보상은 조만간 섭섭하지 않게 전달될 거야.”
이 자리에서 더 얘기가 길어지면 곤란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아직 경기장에 머물러 있었고 곧 시상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대기석으로 물러 나온 에디스는 자신의 호위들 중 한 명에게 닉슨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닉슨은 어렵사리 마음을 돌려 그녀의 뜻을 따랐으니, 앞으로는 무사히 제 갈 길로 가기를 바랐다. 또한 귀족파와 클라이드가 대회의 승부 조작과 관련해 싸우게 된다면 그가 중요한 증인이 될지도 몰랐다.
< 7장. 꽃, 피어나다 >
주인이 없는 황태자의 침실에 에디스는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클라이드는 총사 대회의 성대한 폐막식을 돌보느라고 늦게 환궁할 예정이었다. 일찌감치 돌아온 사람은 에디스뿐이었다.
여기에 돌아올 필요 없이 본가로 귀가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실은 마차가 당연하다는 듯 궁 앞에 멈춰서자 에디스도 무의식적으로 이곳으로 와 버렸다.
궁인들은 간단한 축하 인사와 함께 환복 시중을 들었다. 마치 침실의 주인이 돌아온 것처럼 여상한 행동이었다.
“씻고 바로 쉴게요.”
에디스 전담 궁인이 머리를 뽀송뽀송하게 말려 주고 방의 조명을 낮춰줬다. 두어 개의 촛불만 남은 실내는 은은하게 밤의 기운이 내려앉았다.
꼼짝도 못 할 만큼 피곤했다.
완전히 방전된 전지 같았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들었다.
지나치게 열정을 쏟아부어 번아웃이 온 기분이었다. 클라이드가 오든 말든 침대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 지친 몸을 눕혔다.
‘으아, 수명이 1년은 줄어든 것 같아.’
영혼까지 너덜너덜해진 채 오리털 베개에 뺨을 담뿍 파묻으며 오늘의 일을 되새겼다.
최선을 다했지만 더 잘할 수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지막 발을 실수하지 않았다면 더 박빙의 승부를 연출할 수 있었을 텐데. 총사 대회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 한 몸 불살라 쇼맨십도 해 볼걸.
이런저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앞으로의 일도 챙겨야 할 게 많았다. 내일은 닉슨의 안전을 확인해야지. 대회 결선에 오지 않은 선수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야지. 귀족파의 동태도 체크해야지…….
자신은 절대로 출세주의자가 아니지만 귀족 놈들한테 지는 건 싫었다. 이런저런 계획을 짜내는 동안 어느새 꿈의 세계로 넘어갔다.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이었다.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 안은 빛이 희미했다.
에디스는 길쭉하고 늘씬한 인영이 조용히 다가오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슬쩍 휘장을 걷어 안으로 들어왔다.
강렬한 금안이 에디스에게 집중하다가 금세 미간에 희미한 실주름을 잡았다.
“후으……. 향기가.”
클라이드는 폐를 부풀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비강의 점막을 자극하는 향기는 역력한 오메가였다. 들에 핀 꽃을 연상시키는 생동감이 그의 본능을 일깨웠다.
여태껏 그녀에게서 풍긴 적 없는 농도의 향이었다.
“에디스?”
앙증맞은 굴곡을 이룬 그녀의 눈두덩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많이도 노곤했겠지.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던 오늘의 에디스를 떠올리면 도중에 지쳐 쓰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경기를 관전하는 동안 클라이드는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자신이 벌여 놓은 총사 대회를 수습하느라 그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는 귀족 진영에서 선수들 전부에게 마수를 뻗친 상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적은 수도 아니고 결선에 올라온 사람들 전원을 매수하거나 암살하려 하다니. 그런 간 큰 행동은 쉽게 클라이드의 감시망에 포착되는 탓에, 그들이 섣불리 굴지는 않으리라고 여겼던 게 오산이었다.
적대적인 의도를 노출하길 꺼리지 않는 게 분명했다. 페이튼이 합류한 귀족 진영은 이전보다 한결 호전성이 강해졌다.
그 와중에 하마터면 에디스가 다칠 뻔한 위기도 있었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녀 대신에 자신이 총탄을 맞은 순간이 떠올랐다. 제가 달려가지 못하고 에디스가 그대로 저격당했으면 어땠을지를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치도록 끔찍했다.
에디스를 위협한 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디트리안 백작, 받은 만큼 갚아 주겠어.”
결선 경기장에서도 클라이드는 그녀가 다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가능한 한 많이 호위의 벽을 세웠지만 경기 도중에 저격 사건이 벌어지면 손 쓸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 관중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고 관계자도 철저히 통제했다. 삼엄하게 통제한 덕분인지 디트리안 백작의 속셈이 달라진 탓인지, 대회는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치러질 수 있었다.
클라이드는 봉긋하게 이불을 덮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은 듯했다.
“으응…….”
에디스가 뒤척였다. 숙면 중이라 이 정도의 감촉을 느낄 리가 없는데, 우연인 걸까?
“미안.”
깨울까 봐 소리를 죽이며 입 안으로만 이야기를 건넸다.
시선은 줄곧 에디스의 동그란 뺨과 오밀조밀한 귓바퀴에 머물러 있었다. 잠든 모습을 보는 건 그에게 있어서 일상의 큰 즐거움이었다.
아무래도 오메가 페로몬이 너무 짙었다.
정상적인 오메가가 의도적으로 향을 뿜어내는 수준이었다.
알파를 만난 오메가의 자연스러운 반사 작용처럼 향긋한 그녀의 냄새가 그를 유혹했다. 참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본능의 이끌림을 마냥 버텨 내지는 못했다.
알파 페로몬이 저절로 운무처럼 피어났다.
“하, 안 되겠군.”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닫고 클라이드는 몸을 물렸다. 자석처럼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려는 알파 페로몬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괜히 에디스의 육체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허락받지 못했으니 제가 함부로 덤벼서는 곤란했다. 오메가로 발현하도록 돕고 싶지만, 그녀가 원하기 전에는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에디스의 이마에 약간 땀이 배어 있었다. 체온도 살짝 높았던 걸 보면, 경기를 치르느라 지나치게 무리한 여파 같았다. 그것이 페로몬 변화에 영향을 미쳤으려나.
“내일 일찍 의사를 불러야겠어. 곤히 자는 걸 깨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유독 진하게 피어나는 오메가 향이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