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58)화 (58/129)

58화

에디스는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워낙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많았다. 관객은 물론이거니와 귀족석의 노친네들이 수시로 선수 대기석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참가 선수와 함부로 얘기를 나누기는 곤란했다. 그녀를 따라온 궁인이나 주변을 둘러싼 호위와 심심풀이 잡담이나 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때웠다.

엉망진창의 경기를 몇 차례 지켜본 끝에 드디어 닉슨이 사로에 올랐다.

‘부디 내 얘기대로 따라 주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닉슨이 페이튼의 지시를 어기고 그녀가 꼬드긴 대로 해 줬으면 하고 기도했다.

곰처럼 둥근 덩치에 무지렁이 같은 눈망울의 닉슨은 페이튼과 에디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총을 들었다.

최저점 경쟁에 걸맞게 바닥 점수를 맞으며 박빙의 승부를 이뤘다. 마지막에 가서는 상대 선수와 아슬아슬한 차이로 닉슨이 승리를 거뒀다.

‘다행이야…….’

8강에 돌입하자 에디스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젠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로얄석의 클라이드도, 적대적인 시선을 던지는 귀족석의 인사들도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과녁판이었다.

집중하다 보면 손톱만큼 작은 과녁판이 손바닥 크기까지 보였다. 점과 동심원을 모조리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먼 거리를 조금이나마 극복한 기분이었다.

지금 에디스는 홀로 다른 차원에 들어선 것처럼 경기에 집중했다.

영문을 모르는 관객은 냉랭한 시선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기묘한 분위기의 경기장에 뜬금없이 우렁찬 사회자의 안내가 퍼졌다.

“8강 1경기는 케츠모리스 공작님이 출전하십니다!”

사격만 잘하면 되는 경기에서 이토록 공작을 운운할 이유는 없건만, 사회자도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했다.

에디스는 손을 높이 들었다. 남을 신경 써서가 아니라 스스로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치켜든 손으로 총을 잡았다. 옅게 밴 땀을 바지에 문지르고 목표물을 조준했다.

타앙— 탕—

두 발의 총알이 과녁을 뚫었다. 사회자가 흥분해서 외쳤다.

“10점! 또 10점!”

대회에서 처음으로 나온 10점이었다. 그때부터 경기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에디스는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옆에서 싸우는 선수도 필사적이었다. 아무리 적어 봤자 8점을 맞추는 가운데 각자 목표물을 향해 숨 막히게 총을 쐈다.

갑자기 성능이 훌륭해진 황실 총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에디스와 옆 선수가 든 것만 운 좋게 잘 제작되었다고 넘겨짚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여지도 없이 사격에 집중했다.

운영진에서 최종 합계를 매길 때, 에디스는 주먹을 쥐어 높이 치켜들었다. 사회자가 짜랑짜랑하게 외치던 점수를 전부 기억한 탓에 발표되기 전부터 최종 승자가 누군지 이미 알게 되었다.

“8강 1경기의 승자는 케츠모리스 공작님입니다!”

유일하게 박진감 넘쳤던 경기 결과를 발표하면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왠지 울먹이는 듯했다.

반면에 다른 경기는 이전과 똑같이 흘러갔다. 선수들은 총의 조작부를 만지작거리면서 무기력하게 승부를 가름했다. 장비 탓이나 하며 우승을 향한 일말의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의 휴식 후 4강이 시작됐다.

에디스는 이전보다 집중력이 높아졌다. 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 이번에도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관중들은 열광했다. 총을 쥘 줄도 모를 것처럼 생긴 작은 레이디가 내로라하는 명사수를 제치고 결승까지 올라간 것이다. 에디스 외의 선수들은 지나치게 형편없는 실력을 보여 줬기 때문에 그녀에게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관객석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선수 대기석까지 들렸다.

“뭐야, 다른 놈들은 왜 저렇게 못 해? 공작님만 잘하잖아.”

“난 묘한 느낌을 받았어. 공작님과 조금 전에 싸웠던 선수가 좀 많이 수상해.”

“수상하다니?”

“그 선수가 아까는 거의 다 빗맞히지 않았어? 그런데 이번에는 확 달라져서 잘 쐈잖아. 비록 공작님한테 지기는 했지만 말이야.”

“어라,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아까는 쫄아서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나?”

누군가가 비아냥거리자 다른 사람도 맞장구쳤다.

“아니면 똥이라도 마려웠나?”

서서히 선수 자질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는 분위기였다.

연이어 벌어진 닉슨의 경기도 실망스러운 점수였다. 하지만 그가 어찌어찌 승리를 차지했다.

에디스의 눈에는 닉슨이 조금 더 나은 점수를 얻은 상황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귀띔해 준 대로 눈치껏 승리해서 결승으로 올라온 듯했다.

결승전만을 앞두고 조금 더 긴 휴식 시간을 가졌다.

장내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귀족석도 바빠졌다. 페이튼과 빅토르 백작, 디트리안 백작이 머리를 맞대고 쑤군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에디스가 유명한 사수들을 줄줄이 이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듯했다.

시합이 벌어지는 경기장은 외부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에 선수를 돕는 시중꾼은 안팎을 들락거릴 수 있었다. 원래 닉슨에게는 시중꾼이 없었지만 누군가가 출입 허가를 받고 닉슨에게 뛰어왔다.

시중꾼이 닉슨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지시했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보는 눈이 많으니 닉슨과 긴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눈치만으로 때려 맞혀야 했다.

에디스는 저들의 입장이 되어 곰곰이 생각했다.

‘망신살이 뻗친 대회를 만들려면 어떤 방법을 쓸까?’

그때 에디스에게도 시중꾼을 통해 연락이 왔다. 로얄석의 클라이드가 보낸 메시지였다.

“전하께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뭐라 하셨지?”

“그들이 저지른 짓의 증거를 잡았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거 정말 다행이군.”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공작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라면서, 반드시 이길 필요는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안전하게, 무리하지 않고…….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려.”

시중꾼은 허리를 숙여 에디스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죽였다.

“마지막으로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

“내 인장을 네게 맡기겠다…… 라고요.”

에디스는 멀리 떨어진 로얄석에서 클라이드를 찾았다. 그가 제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결정을 에디스에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말을 전해 받으니 그의 심정이 와닿는 느낌이었다. 저절로 씨익 웃음이 튀어나왔는데 그가 봤을지는 모르겠다.

“알았다고 전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시중꾼의 발걸음이 급했다. 새벽의 사격터에서 늘 호흡을 맞추던 믿음직한 자였다. 시중꾼은 얼른 황태자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돌아와 에디스의 장비 시중을 들었다.

이제 결승 경기를 시작하려는지 진행 요원이 두 선수를 데리러 왔다.

쉬는 동안에는 닉슨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탓에 에디스는 상황 파악만 하고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기를 치르러 나가기 위해 둘은 나란히 서게 되었다.

에디스는 경기에 대한 긴장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부담감은 따로 있었다. 대회를 성황리에 치르는 게 훨씬 중요했다.

작게 심호흡을 했다.

주어진 기회는 아주 잠깐이었다. 닉슨에게 장황하게 얘기할 시간이나 분위기가 주어지지 못했다. 기껏해야 맞서는 선수끼리 서로 격려의 말 한마디나 할 수 있는 정도뿐이었다.

그녀는 닉슨에게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닉슨.”

그가 흠칫 놀랐다.

“예, 공작님.”

“네 실력을 보여 줘.”

“…….”

대꾸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행동으로 미루어, 아까 페이튼이 내린 지시가 뭔지 대충 짐작했다. 아마도 빗맞히라는 얘기였겠지.

에디스 혼자만 성적을 내고 닉슨은 못 쏘는 그림을 만들려는 것이다. 멋진 승부를 연출하느니 그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아마 귀족 무리들은 그녀가 진작 질 거라고 예상했을 듯하다. 8강과 4강의 막강한 선수와 맞서 이긴 후 결승까지 올라온 건 그녀 자신마저도 뜻밖이니, 지금 저들의 기분은 훨씬 처참할 것이다.

진행 요원이 두 사람을 인도해 경기장 가운데로 향하려 했다.

이젠 정말 마지막 기회다.

“닉슨.”

사색이 된 얼굴의 닉슨은 정면만 쳐다봤다.

“이건 황명이다. 닉슨은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승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라.”

그가 비로소 돌아봤다.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황명이란 게 뭔지 아나?”

“아, 압니다.”

“그러면 따르라.”

에디스는 먼저 진행 요원을 따라갔다. 뒤에 남겨진 닉슨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운명에 맡겼다.

그녀는 조금 대화를 나눠 본 것만으로 그의 됨됨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페이튼이 데려와 총사 대회에 출전시킨 것도 닉슨의 의지가 얼마나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매수되면서 그가 기꺼워했는지, 아니면 멋모르고 어리숙하게 따랐는지.

부디 닉슨이 황명의 지엄함을 두려워하기를 바랐다. 황실 안팎의 알력을 모르는 그가 황제의 명을 무겁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페이튼을 비롯한 귀족 세력이 황실을 만만히 보고 있음을 닉슨은 몰라야 했다.

흔히 일반인들이 아는 대로, 황명이란 굉장히 대단한 것이며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절대성을 지녔다고 닉슨도 생각하기를 기원했다.

황명의 힘에 기대어 닉슨을 압박한 게 제발 효과가 있기를…….

그래도 클라이드가 인장을 맡기겠다는 메시지를 전해 와서 다행이었다. 대리청정하는 황태자는 황제를 대신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설사 닉슨이 페이튼에게 이 얘기를 고해바쳐 공론화된다고 해도 에디스가 월권행위로 문책을 당할 일은 없다.

엄청난 환호 속에 그녀는 사로에 섰다.

반응이 썰렁하기만 하던 이전의 경기와 다르게 에디스가 나타나자 관중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쳤다.

닉슨과 에디스는 같은 황실 총을 들고 먼 과녁을 응시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만이라도 잘해야지.’

고민해 봤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었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 에디스는 총대를 바로 세웠다. 가늠자 너머로 보이는 과녁판에 집중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귀가 멍멍할 정도로 시끄럽던 관중의 소리가 어느덧 들리지 않았다.

손톱만 하던 표적지가 손바닥만큼 커졌다.

호흡을 조절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시야에 표적지가 더 확대되어 이젠 A4용지만 해졌다.

귀청을 찢는 총성이 맑은 하늘에 멀리 퍼져 나갔다.

“10점!”

총을 쏜 당사자인 에디스보다 점수를 외치는 진행 요원이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다른 경기와 확연히 다른 그녀의 경기에 관계자나 관객 모두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곧이어 옆자리의 닉슨도 첫 발을 쐈다.

“9점!”

중앙에서 아슬아슬하게 비껴 맞은 상태를 보고 이번에는 에디스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신이 첫발을 이겼다는 사실보다 닉슨의 변화한 태도가 훨씬 좋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