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공작님, 이제 가셔야지요.”
닉슨이 걱정스레 그녀를 살폈다.
당장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었다. 다만 지금 에디스에게 유일하게 활용 가능한 카드는 닉슨뿐이었다.
이 사내가 제게 어떤 도움을 줄지는 모르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덥석 그의 팔뚝을 잡았다.
“닉슨.”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빙 둘러싼 호위들의 벽에 막혀 외부까지 퍼지지 않았다. 닉슨의 동료는 무슨 일인지 몰라 이쪽을 기웃거리면서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닉슨, 초반에 탈락하기보다 결승에서 탈락하는 편이 멋있지 않겠나.”
“하지만 그건 명을 어기는 것이라서.”
“페이튼이 그러는데 넌 정말 잘 쏜다며? 그러면…… 상대 선수보다 아슬아슬하게 적은 점수 차로 이기면 어때.”
“공작님.”
“성공하면 내가 네게 큰 상을 주마. 페이튼이 준 돈의 두 배. 아니 세 배를 주지.”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솔직히 에디스도 대책이 없었다. 참가 선수 중 오로지 닉슨만이 꼬임에 넘어갔기 때문에 무작정 붙든 것이다.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자보다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는 자가 이기고 올라가는 편이 낫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돈을 주려는 이유를 당장 생각해 내야 했다. 닉슨이 수월히 받아들일 만한 이유여야 했다.
“지금 보니까 페이튼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네. 그를 살짝 꺾어 주면 기분이 풀릴 것 같아.”
“자존심……이요?”
“페이튼은 내가 16강에서 간단히 떨어질 거라고 예상하는 거잖아. 물론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그가 응원해 주지 않아서 짜증 나.”
“경기는 해 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제가 공작님을 응원하겠습니다.”
“고마워. 그럼 네가 낮은 점수를 계속 쏘면서 결승까지 올라가더라도, 딱히 페이튼의 지시를 어기는 건 아니지?”
“하긴 그렇죠.”
고수머리를 긁적이는 닉슨은 그녀를 전혀 의심치 않는 듯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거짓말에 모조리 속아 넘어갔고, 이젠 에디스를 장래의 공작 부인으로 굳게 믿는 눈치였다.
또다시 진행 요원이 활기차게 외쳤다.
“공작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선수단 줄의 마지막에 붙어 경기장으로 나가는 동안, 에디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 * *
제국의 번영을 널리 알리는 목적으로 열리는 총사 대회.
최종장인 결선 시합이 갖가지 볼거리와 함께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
실제로 경기장 가운데에 선 에디스는 넘치는 활기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이날을 위해 피땀 흘려 준비한 클라이드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서민부터 황족에 이르기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관객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귀빈석도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 우리나라에 이렇게 귀족이 많았던가 놀라울 정도였다.
선수단이 입장하는 문의 반대편으로 광대와 악단 패거리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경기에 앞서 흥을 돋운 모양이었다.
이 외에도 관객을 위해 준비한 게 많았다. 응원 도구도 나눠 주고 소소하게나마 간식도 돌렸다. 경기 규칙을 모르는 서민을 위해 상황을 크게 외쳐 알려 주는 진행 요원도 배치했다.
지난 본선에서는 에디스가 경기에만 집중하느라고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워낙 함성도 크고 장내가 화려해서 모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경기장 중앙으로 나가기 전, 그녀는 귀빈석 가까이에 세워진 전시대를 발견했다.
황실 총이 전시대에 멋있게 세워져 있었다. 수십 개에 이르는 총이 나란히 진열되어 검게 반짝이는 무기들이 멀리서도 근사하게 보였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황실 총기류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에디스는 문득 떠오르는 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결선은 참가 선수 전원이 황실 총을 사용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어.’
에디스도 이번만은 맞춤 제작한 총이 아니라 묵직한 황실 총을 다뤄야 했다.
기억을 더듬어 닉슨이 무슨 총을 써 왔는지 생각해 냈다. 본선까지는 원래 쓰던 사냥용 총을 들었고, 페이튼의 집에서는 황실 총으로 연습했다.
그녀의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황실 총으로 모조리 빗맞히려는 거구나!’
형편없는 사격 실력으로 이곳에 온 관중을 실망시키려는 비열한 수로도 모자라, 황실 총의 품질이 수준 이하라고 알리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지? 지금이라도 클라이드에게 알려 경기 진행을 막아 볼까?
에디스는 로얄석을 바라봤다. 때마침 클라이드는 외국의 귀빈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얘기가 있는지 몰라도 그들이 잠시 자리를 떠나 뒤편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클라이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장내에서는 이제 막 선수 소개가 끝났다.
절망감을 못 이겨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하지만 진행을 멈추라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증거가 전혀 없었다. 오로지 눈치로만 진실을 알아냈을 뿐이다.
베일에 싸여 있던 토너먼트 대진표가 공개됐다.
사회자가 종이를 둘둘 만 확성기를 입가에 댔다. 열의에 가득 찬 음성이 멀리 퍼졌다.
“유감스럽지만 결선에 오르고도 불참한 선수가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을 얘기하려나 보다. 에디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한 명은 경기에 대한 부담감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또 한 명은 사고로 마차에 치였습니다. 그리고 두 명은 무단으로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 명이나 죽었다니. 세상에.
이 얘기를 듣고 그녀는 곧바로 페이튼을 의심했다. 음모를 꾸민 정황을 포착했으니 선수들에게도 마수를 뻗쳤으리라 예상하게 됐다.
“하지만 경기는 기대하셔도 됩니다. 대진표가 아주 흥미롭게 짜였거든요!”
진행 요원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서로 맞붙을 상대를 지목했다. 차례차례 선수의 이름을 부르며 분위기를 북돋웠다.
곧바로 에디스가 호명되었다.
“2경기에 긴 초록 뿔의 에디스 케츠모리스, 페들턴 공작 4세!”
이름 전체가 길게 이어졌다. 대회의 권위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부른 듯했다.
그녀에게 고민하거나 좌절할 틈은 없었다. 관중의 박수 소리에 고개를 들자, 사방으로 함성이 크게 터졌다.
“추첨을 통해 대진을 정했는데 공작님은 운이 좋으셨습니다. 16강에서는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되셨군요.”
네 명이 불의의 사고로 불참했으니 부전승으로 올라가는 선수도 네 명이었다. 에디스는 요행히 부전승 대진을 골라잡은 덕분에 첫 시합을 힘들이지 않고 넘기게 되었다.
닉슨은 5경기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녀와는 정반대 편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부터는 피할 곳이 없었다.
에디스는 8강을 기다리는 동안 경기장 한쪽에 마련된 대기석에 있어야 했다. 사방이 뚫려 있고 수많은 관중의 시선이 닿는 자리였다.
다들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봤다. 젊은 귀족 여성이 웬일로 결선까지 올라왔는지 의아해하는 듯했고, 얼마나 잘 쏘는지 궁금해하는 표정도 보였다.
대기하는 동안 다시 호위가 따라붙었다. 에디스에게만 한정해 안전을 강화하는 분위기였지만, 지위가 있는 선수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관객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선수 소개에서 이름을 장황하게 발표한 덕분이었다.
첫 경기가 시작됐다. 엄청난 환호 속에 두 명의 선수가 첫 발을 쐈다.
멀리에서는 표적지에 뚫린 작은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행 요원이 역력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결선은 흥미진진한 시합을 위해 한 발마다 점수를 공개하는데, 점수를 기록한 사람이 사회자와 함께 제법 오래 쑥덕거렸다.
“선수들이 긴장했나 봅니다. 두 발이 다 0점입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다음 사격은 3점, 그다음 사격은 2점이었다. 아예 표적지를 벗어나 점수를 얻지 못할 때도 있었다.
선수들은 총에 이상이 있다는 듯 이리저리 조작하는 연기를 했다. 진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사격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20발을 쏴도 총합이 30점대에서 머물렀다.
웅성거리던 관객석은 이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일반인의 눈에는 황실 총을 들고 나온 선수가, 그것도 라그란드 제국에서 명성이 높은 사수가 말도 안 되는 실력을 보여 주는 상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클라이드는 로얄석에서 이 파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었군. 작당해서 낮은 점수를 내는 거였어.’
그는 외국 귀빈을 접대하는 한편으로 싸늘한 분위기의 경기장을 살폈다.
어렴풋이 귀족파의 계획을 짐작한 적도 있지만, 설마 현실로 닥칠 줄은 몰랐다. 열여섯 명이나 되는 인원을 전부 그들이 포섭하지는 못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클라이드는 빠듯하게 짜여진 대회 일정 중에서 미처 본선을 거쳐 결선까지 진출한 자의 배경을 조사하지 못했다. 집무실에 올라온 보고서는 그들의 이름과 주소, 주요 경력 등이 담겨 있었다. 어느 가문에 매수되었느냐는 알 수 없었다.
‘에디스가 나를 도와줬다면 허점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
일상은 허술한 매력이 넘치지만 국정 업무에 있어서만은 벼린 날처럼 예리한 그녀라면 약간이나마 낌새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내가 조심해야 했는데…….’
생각을 되돌리며 클라이드는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어느새 심적으로 그녀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경기장에 오지 못한 선수들도 신경 쓰였다. 사회자가 관객에게 널리 알리기 전에 클라이드가 먼저 보고를 받았다. 아무래도 그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듯했다.
‘매수하거나, 없애 버리거나.’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귀족들을 떠올리며 그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전하.”
옆자리를 차지한 외국 귀빈이 클라이드의 손목을 건드렸다.
“아랫것들이 즐기도록 대회를 개최하는 것만으로도 전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은혜를 베풀었으니까요.”
귀빈은 이웃 나라의 황녀였다. 황녀는 얄팍하게 눈매를 접으며 그의 호감을 얻으려고 애썼다. 저의가 너무나 뻔히 보여서 모른 척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황녀는 심지어 빈 좌석이 없도록 빽빽한 로얄석에서 오메가 페로몬을 흘리며 그를 유혹했다. 진작부터 오메가 악취 때문에 괴로운 데다가, 다른 이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행동이 견디기 힘들었다.
“내 제국민입니다. 모두가 즐거워하면 나 역시 즐겁습니다.”
“어머, 우아한 말씀이시군요.”
제발 이 황녀와 맞닥뜨려야 하는 게 이번 한 번뿐이기를 빌었다. 가식적으로 부채를 흔들며 그의 몸을 훑는 눈길이 역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클라이드는 집중을 흩뜨리는 황녀를 옆에 둔 채 골머리를 썩였다. 가까운 귀족석에서 누가 누구와 속닥거리는지 확인해야 했다. 더불어 선수들이 누구에게 매수당했는지 눈여겨 봐야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선수들이 죄다 적 진영의 수하였다.
황실을 따르는 이는 오직 에디스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