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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56)화 (56/129)

56화

크리스털 글라스의 잔에 반사된 페이튼의 얼굴은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태양의 신처럼 빛났다. 붉은 기가 도는 블론드에 큰 키도 외모를 부각시켰다.

매끄러운 말투로 그가 자신의 신붓감을 입에 올렸다.

“다빌 자작, 에디스는 건드리지 않으셨지요?”

“예, 우리가 미리 논의했던 대로 했습니다. 경이 배우자감으로 점찍으셨으니까요.”

“양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따지고 보면 케츠모리스 공작을 건드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어차피 황실 사격터에서 조금 연습한 것으로 운 좋게 올라온 듯하니까요. 사격 솜씨가 꽤 괜찮긴 하지만 결선까지 올라올 실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빌 자작은 제 얘기가 페이튼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봐 불안해하며 흘끔거렸다. 여전히 화사한 모습을 유지한 페이튼이 답했다.

“옳은 지적입니다. 귀족 여성이 총을 쏠 줄 아는 것 자체가 대단할 정도인걸요. 그러니까 에디스는 결선 초반에 탈락시키면 간단히 해결되겠지요.”

페이튼도 에디스를 깎아내리는 다빌 자작의 말을 듣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평가라고 생각한 탓에 딱히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동반자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구 귀족들은 소위 늙은 너구리였다.

그들은 젊은 황태자가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을 파고들 줄 알았다.

바로 선수들이 거의 다 평민이라는 약점 말이다.

총사 대회에 나오는 자 중에 부자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좋은 집안 출신으로서 고급 군사 교육을 받은 자는 따로 시험을 치러 황실 근위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선에 오른 평민 선수가 시합 직전에 비명횡사하더라도 공론화될 가능성은 없었다. 형식적인 수사가 이루어지다가 금세 흐지부지될 것이다.

페이튼은 이곳에 모인 자들의 힘이 황실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협력하면 황태자의 오만한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놓는 일도 어렵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그럼 다 된 겁니까? 나머지는 내일 있을 대회를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는 것뿐이군요.”

“아주 볼만할 겁니다. 아예 광대놀음이 펼쳐질 테니까요.”

“대회가 국제적으로 망신당하고 나면, 황태자도 정신을 좀 차리면 좋겠습니다.”

열한 명은 각 가문에서 내보낸 사람이고, 네 명은 암살자를 보내 처리했다. 초보자 에디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16강에 진출한 선수 모두가 우리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 * *

결선이 벌어지는 날은 날씨가 끝내줬다.

에디스는 매번 이곳 세계의 천문 관측술에 놀라곤 했다. 어떨 때는 현실의 기상청보다 나았다. 경기 날짜를 이렇듯 기가 막히게 정해 놓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간간이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쾌청했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아 총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제 실력 발휘만 하면 된다.

‘실력이 바닥인 게 문제지.’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 낀 채 에디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졌다.

본선 성적이 제일 좋았던 선수는 무슨 해전에서 엄청난 공훈을 세운 전쟁 영웅이란다. 그 옆에 있는 선수는 이웃 나라에서 열린 총사 대회의 우승자란다.

지난번에 이어 다시 만난 닉슨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혼자서 곰을 잡는 명사수 사냥꾼이었다. 두꺼운 곰 가죽을 뚫고 총알을 박아 넣으려면 정확히 급소에 명중해야 할 텐데, 순박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엄청 살벌한 솜씨를 가진 실력자였다.

대기실에서 호위에 둘러싸여 한창 긴장하고 있으려니 마침 닉슨이 나타났다.

“닉슨, 여기.”

“안녕하세요, 공작님.”

“조금 늦었군.”

“같은 팀과 얘기를 좀 하고 오느라고요.”

에디스는 내심 닉슨을 경계하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자리를 권했다.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나 주시하기 위해서였다.

닉슨의 뒤를 이어 동료로 보이는 선수도 뒤따라 들어왔다. 에디스가 닉슨에게 알은체하며 얘기를 건네자 다른 이들은 꾸벅 묵례만 하며 멀찍이 대기했다.

“같은 팀이면 그레이브즈 가에서 내보낸 사람들 말인가?”

“예, 열 명이 출전해서 다섯 명이 결선에 올라왔거든요.”

“혹시 전략이라도 짰나?”

농담처럼 가볍게 얘기를 던졌더니 닉슨에게 미세하게 놀라는 기미가 생겼다.

“우, 우리 중에 우승자를 만들자는 그냥…… 보통 얘기였습니다. 함께 파이팅을 외치면서요.”

그는 당황해서 말조차 더듬을 지경이었지만, 에디스의 시선은 허점을 노리기 위해 부지런히 닉슨과 동료들을 흘끔거렸다.

겉보기에 닉슨은 순진한 사냥꾼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 됨됨이가 어떤지는 알기 힘들었다. 만약에 정말 닉슨에게 악의가 없다면, 자신이 벌일 일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몰라서일 것이다.

에디스는 약간의 과장을 섞어 닉슨을 꼬드겼다.

“나도 한배를 탄 입장이니 함께 파이팅해야 하지 않나?”

“……네?”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내가 페이튼과 혼담이 오가는 사이라는 것 말이야.”

“모, 몰랐습니다.”

“머지않아 난 그레이브즈 가의 안주인이 될 거야. 닉슨을 처음 만난 날도 혼인 얘기를 나누느라고 그곳에 들른 거였어. 그러니까 파이팅에 나도 끼워 줘.”

닉슨의 동공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같은 무리 중 센드릭이라는 자의 눈치를 봤다. 페이튼의 먼 친척이라더니, 센드릭이 이들을 이끄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호위들에게 은밀히 눈짓했다. 내내 곁에서 그녀의 대화를 들은 호위가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별일 아닌 척 어슬렁거리며 센드릭으로 향하는 닉슨의 시야를 가렸다.

“이봐, 닉슨? 네가 우승하면 황실 총사대가 되겠지?”

“네? 그, 그건.”

“이 도시에 집을 새로 구해야 할 텐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뭐 있나. 내가 그레이브즈 저택에 방을 한 개 비워 주지. 이렇게 대회에 함께 참가한 인연도 있으니까.”

닉슨이 안절부절못할수록 그녀는 심혈을 기울여 꼬드겼다.

“아, 맞아. 지난번에 나를 시중들던 하녀가 아주 귀엽고 참하더군. 네게 짝을 지어 주면 딱 어울리겠어.”

“그게…….”

“닉슨, 혹시 벌써 결혼했나? 그렇다면 아쉽군.”

“결혼은 안 했지만…….”

거의 울 듯한 표정의 닉슨은 속마음이 쉽게 들여다보이는 사람이었다. 설득에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죄송하지만 공작님이 우리와 한편이라는 건 듣지 못했습니다.”

한편이라니. 명확히 적군과 아군을 가르는 표현이었다. 개인 자격으로 참가해 총을 쏘는 대회에 편을 가를 일이 뭐 있길래?

에디스는 순발력을 발휘해 둘러댔다.

“페이튼이 나를 지독히 아낀다는 거, 닉슨은 모르나?”

“사격터에서 뵈었을 때 어느 정도 그래 보이긴 했습니다.”

“나한테 험한 일을 시키지 않으려는 장래 남편의 배려라고나 할까. 재미로 사격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는 상황이지.”

“그런 거였군요.”

“뭐 얼마나 대단한 작전이길래 너희끼리 쑥덕거리나. 이런 일이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페이튼에게 직접 물어볼 걸 그랬어.”

그녀는 조금 언짢은 기색까지 내비쳤다. 여태 모르고 있다가 혼자 왕따 됐다는 듯 기분 나쁜 티를 냈다.

역력히 동요한 눈빛의 닉슨이 쩔쩔매며 입을 열었다.

“실은…….”

“실은 뭐.”

“실은 제가 우승할 수 없습니다. 황실 총사도 될 수 없고요.”

“아니, 대체 왜?”

“결선부터는 최저점을 내야 합니다.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지시를 받았습니다.”

“최저점이라니.”

“대진표가 나와 봐야 상대를 알겠지만, 케츠모리스 공작님을 만나면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이기기로 했습니다.”

결선은 일대일로 싸우는 토너먼트 방식이다. 대회가 시작되면서 대진표가 공개될 예정이다. 에디스와 닉슨은 아직 누구와 싸울지 알지 못했다.

“나한테만 이기라는 거야? 나머지 선수한테는 일부러 져야 하는 것이고?”

닉슨이 처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디스는 정혼자의 연기를 계속해야 했다. 어지러운 심사를 감추며 의뭉스럽게 굴었다.

“흐음, 페이튼은 내가 우승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나 봐. 요즘 내가 사격에 너무 재미가 들려서 데이트를 미뤘더니 맘 상했나.”

“모르겠습니다. 전 제가 해야 일만 알고 있어요. 공작님과 대결하는 경우를 빼고는 무조건 최저점을 쏘라고요.”

“아까는 우리 중에서 우승자를 만들자는 의미로 파이팅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거짓말이었어?”

“……죄송합니다 공작님.”

에디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골 사냥꾼을 데려다가 결선까지 올려놓고 도로 떨어뜨리는 꿍꿍이가 뭘까?

그녀의 편치 않은 기색에 닉슨은 바짝 기가 죽어서 곰처럼 어깨를 구부렸다.

“그래도 어차피 우리 중에 우승자가 나오기는 할 겁니다.”

“무슨 수로 우승을 하지?”

“결선 선수가 전부 우리 편이거든요.”

“뭐?”

“다들 점수가 낮을 겁니다. 누가 더 낮게 나오나 경쟁해 왔으니까요. 제일 정확도가 떨어지는 사람이 우승할 듯합니다.”

“낮게…… 나오나…… 경쟁?”

뒤통수를 거대한 해머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빗맞히기 연습을 한 사람은 닉슨 혼자만이 아니란 뜻이었다. 낮은 점수 경쟁이라고 했으니, 그레이브즈 가에서 참가한 선수는 전부 표적지의 바깥만을 조준할 것이다.

에디스가 닉슨의 표적지를 훔쳐본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이는 그만큼 정확도가 떨어지든가, 빗맞히기 연습이 부족하든가 했겠지. 그리고 오늘 결선에 임하며 최저점 경쟁을 위해 파이팅을 외쳤다.

“하, 하지만.”

옷소매 안으로 숨긴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말투조차 태연함을 가장하지 못해 더듬거렸다.

“우, 우리 팀이 전부는 아니잖나. 참가 선수가 열여섯 명이나 있는데.”

“저도 잘 모릅니다만, 다 우리 팀이라고 들었습니다.”

에디스는 무의식적으로 대기실을 둘러봤다. 여러 선수가 띄엄띄엄 자리 잡고 대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선수 인원이 부족해.

눈으로 자신을 제외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열, 열하나.

네 명이 모자라다!

“결선 대회 시작합니다! 선수들은 경기장으로 나와 주십시오.”

갑자기 우렁찬 외침이 들린 탓에, 그녀는 파다닥 치를 떨며 놀라고 말았다. 진행 요원이 오늘따라 기운 넘쳤다.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행 요원을 따라나설 준비를 하며 가볍게 몸을 푸는 선수도 있었다.

어떡하지. 이걸 어쩌지.

이대로 경기를 시작하면 총사 대회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 거다. 라그란드 제국의 내로라하는 명사수가 고작 이만한 실력밖에 되지 못한다고 알려지게 된다.

클라이드가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대회는 망신살이 뻗치겠지.

안 돼.

막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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