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황실 주치의가 클라이드의 상처를 돌보고 붕대를 새로 갈았다.
매의 눈으로 에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사는 클라이드에게 현재 상태를 설명했다.
“순조롭게 아물고 있습니다. 부상 직후에 요행히 러트 사이클이 와서 훨씬 차도가 있군요. 러트의 에너지가 육체를 활성화하는 작용도 하니까요.”
“잘됐군. 에디스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바람에 그동안 꼼짝없이 중환자 행세를 해야 했거든.”
이것 보라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옆을 돌아보는 클라이드가 그녀의 눈에는 조금 웃겼다. 언제는 걱정해 줘서 좋다더니, 이젠 또 귀찮단다.
“이젠 붕대를 조금만 감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기분상 다 나은 것 같아도 무리는 하시면 안 됩니다. 아물어 가는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낭패 아닙니까.”
클라이드의 진료를 마치고 나서 의사는 오랜만에 에디스도 살펴봤다.
이번에는 페로몬 검사 도구를 활용하며 진득하게 꼼꼼히 진료했다. 클라이드를 명쾌하게 살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케츠모리스 경은 도무지 변화가 없군요.”
“맨날 똑같네요.”
“이러다가 잘못 터지면 문제가 됩니다. 잘못하면 혼수상태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음, 어떡하죠? 내가 뭘 해야 할까요?”
“경에게는 알파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전하께서 알파 페로몬으로 경을 도와주시겠다고 해서 드리는 말씀만은 아닙니다.”
에디스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진지하게 고려하셔야 합니다. 전하가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주변에 믿을 만한 다른 알파를 찾아보세요.”
소신껏 의견을 밝히자마자 의사는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어느새 클라이드가 의사를 날카롭게 째려보고 있었다.
에디스도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쓰고는 있었다.
오메가 페로몬이 차곡차곡 응축된 게 마치 막힌 둑과 같다고 들었다. 한계치를 넘은 둑이 터지면 육체가 초토화되는 상황이었다.
함부로 페로몬을 흘려서 일어나는 문제도 있다. 아무리 호위를 잘 두고 매사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뜻밖의 불상사는 분명 생길 수 있다. 의사는 혼수상태까지 언급했으니, 이성을 잃는다거나 실신하는 정도는 거의 유력하게 감수해야 했다.
오메가로 발현할 때가 언제 올지 몰라도 지금처럼 대책 없이 지내선 안 될 듯했다.
클라이드도 같은 생각인지, 의사가 돌아간 후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에디스, 들었지? 이쯤 되면 내 팔보다 네 상태가 더 문제 아닌가.”
그렇다고 그의 페로몬을 넙죽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대신에 화제를 바꿔 봤다. 에디스가 총사 대회로 바쁜 동안 그에게 숙제처럼 안겨 줬던 보고서를 들먹였다.
“글쎄요. 내 페로몬은 내가 알아서 치료할게요. 그보다 다른 신경 쓸 일이 많잖아요.”
“에디스, 알아서 한다면서 아무것도 안 하던걸.”
“불법 노예와 관련한 보고서는 읽어 보셨어요?”
“보긴 했는데…….”
“어때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지 않아요?”
클라이드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연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거. 네가 나한테 일 시키고 있는 거 맞지?”
“에이, 설마요. 오해예요.”
정곡을 찔렸지만 뻔뻔스럽게 나갔다. 여유를 며칠 주지도 않았으면서 성과를 요구하듯이 은근히 돌려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읽기만 하고 내팽개치진 않았을 거라고 기대할게요. 그럼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요.”
“에디스 지금 복수하는 건가?”
“어떻게 제가 감히!”
감히를 들먹이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못 이기겠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팔을 올릴 때 불편한 기미는 엿보이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제국 안까지 외국인 노예가 끌려와 거래되고 있다는 정보잖아.”
“그렇죠. 명백한 불법이에요.”
“신대륙의 노예무역도 어차피 큰 다툼 거리라서 하루 이틀 내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이 문제는 서둘러 조치해야 할 것 같아.”
“내버려 두면 제국 내에 불법 노예가 널리게 될 거예요. 그러면 파급 효과가…….”
덧붙여 설명하려 하자, 그는 에디스의 입술을 톡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하여간, 출세주의자 에디스.”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클라이드의 입가가 좌우로 길게 늘어났다.
“아니라니까요!”
“자세한 내용은 나도 따로 알아볼게. 우선은 라티네스 백작에게 요즘 상황을 알아보라고 시켰어.”
라티네스 백작은 황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소수 중 한 명이었다. 상비군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귀족 중 거의 유일하게 클라이드의 편을 들었다.
“그분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전하.”
클라이드의 판단이 마음에 들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에디스도 장난을 맞받아쳤다.
“되게 새삼스럽군. 전하라니.”
“무슨 말씀을요. 전 늘 공손하답니다.”
단둘이 있으면서 존칭하던 때가 까마득했다. 공무를 수행할 때는 깍듯하지만 사석에서는 친구나 다름없이 지낸 탓에 에디스에게도 편한 대화와 ‘전하’ 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둘이 아옹다옹 입씨름을 하다가 보니, 에디스는 문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경각심이 들었다.
클라이드와 거리를 둬야 하는데 자꾸 마음이 느슨해지곤 했다. 마냥 허물없이 굴었다가는 그가 오해할 여지도 있었다.
어떻게 서두를 꺼내면 좋을지. 이제는 정말 망설였던 얘기를 해야 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날짜로 볼 때 그녀는 막바지까지 내몰려 있었다. 자신이 계획했던 미래를 아예 포기할 게 아니라면, 지금이 얘기할 순간이었다.
클라이드의 곁을 떠나겠다는 얘기를.
“저기……. 있잖아요.”
기분 좋게 휘어진 눈웃음을 달며 그가 에디스와 마주 섰다. 무방비하게 셔츠를 흐트러뜨리고 두 팔을 벌려 호의가 가득한 몸짓을 드러냈다.
차마 똑바로 보고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였다.
나중으로 미룰까? 매번 이런 생각으로 시일을 끌어왔다. 하지만 이제 미룰 시간이 없었다.
“할 말이 있는데요.”
에디스는 그를 외면하고 창가로 가 먼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가 심각해진 것을 알아챈 클라이드는 느린 걸음으로 따라왔다.
“클라이드, 나 시종의 직을…… 그만둘까 해요.”
돌연 무거운 침묵이 쿵 내려앉았다.
넓은 방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숨소리마저 작게 사그라들어 마치 빈 공간처럼 느껴졌다.
바로 뒤에 클라이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독한 정적에 휩싸인 탓에 자기 혼자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겁이 나서 뒤돌아보지 못했다.
그가 보여 줄 표정과 행동을 맞닥뜨리기 두려웠다.
창밖의 나무에서 어린잎이 바람에 떨어져 나왔다. 멀리 하늘로 오르다가 저만치 먼 잔디에 점점이 흩뿌려졌다.
바깥의 사소한 풍경에 굉장한 관심이 있는 양 지켜보면서도 손 닿을 거리에 있는 클라이드는 차마 볼 수 없었다.
침묵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뭐라도 변명을 덧붙여야 할 듯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원래 내가 정계에 포부가 있었던 게 아니라서요. 어쩌다 보니 중요한 일을 맡게 됐지만, 이쯤에서 물러나는 편이 나을 것 같…….”
“못 들은 걸로 할게.”
말허리를 자르며 그가 단호히 거절했다.
잠깐의 틈도 없이 곧바로 발소리가 들렸다. 발자국을 찍듯이 쿵쿵 울리는, 화가 잔뜩 난 걸음이었다.
순식간에 멀어진 클라이드는 세찬 기세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원래 이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그가 자취를 감췄다.
* * *
총사 대회의 최종 결선을 앞두고 내로라하는 귀족의 수장이 회동을 가졌다.
이젠 어엿하게 귀족파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페이튼부터 빅토르 백작, 디트리안 백작 등이 호화로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준비는 철저히 되었겠지요?”
빅토르 백작은 벌써 위스키를 제법 마셔 얼굴이 벌겠다. 페이튼이 그의 물음을 친절하게 받았다.
“물론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수고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흐흐, 저의 집에서 출전시킨 선수는 고작해야 한 명만 결선에 올라갔을 뿐인걸요. 그레이브즈 공작이 후원하는 선수가 무려 다섯 명이나 결승 진출한 것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혼자는 해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디트리안 백작도 세 명이나 결선에 올렸는걸요. 다빌 자작과 제이론 자작도 성과가 있었지요.”
각 집안에서 내보낸 선수를 합하면 열 명이 결선 진출에 성공했다. 개중에는 인척으로 속인 자도 있었고 비밀리에 후원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회동을 가진 이유는 고작해야 우리 편의 인원수를 헤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황실과의 힘 싸움에서 승패를 가를 부분은 나머지 인원이었다.
페이튼의 시선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차례차례 훑었다.
모두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사업적으로 얽히고설켜 한 집안이 무너지면 다른 집안도 영향을 받게 되는 구조였다. 인간성을 신뢰하지 못하더라도 돈은 신뢰할 수 있기에 서로 동맹을 맺어 이 자리까지 왔다.
“디트리안 백작, 혹시 경기장에 가 보셨습니까? 외국에서 온 초청객이 많더군요.”
“네, 저도 본선에서 봤습니다. 전하께서 제국의 위신을 세우려고 여는 대회이지 않습니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되도록 많이 부른 모양이었습니다.”
“결선에서는 일반인 관객도 제한 없이 받을 거라고 하더군요. 경기장이 아주 꽉 찰 것 같습니다.”
페이튼은 다가올 결선 대회를 상상했다. 실패할 여지가 없는 계획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디트리안 백작이 음흉하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빅토르 백작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황태자의 욕을 하며 흥을 돋웠다.
“그러면 무대는 계획대로 모두 마련되었군요.”
“클라이드 전하의 대리청정으로 이 나라가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었는지 만천하에 알리게 될 겁니다.”
“거금을 투자해 개발했던 황실 총이 형편없다는 사실도요.”
“총사 대회가 곧 군사력이라면서 황실의 이름으로 잔뜩 홍보해 놨으니, 전하는 스스로 화를 불러온 꼴이 될 겁니다.”
“군사력이 이것밖에 되지 못한다고 말할 빌미가 되겠지요.”
옆에서 시시덕거리며 떠들 동안 페이튼은 혹시 차질이 생길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따지며 고심했다.
그가 행동대장의 역할을 맡은 다빌 자작에게 물었다.
“우리 선수가 아닌 나머지 인원은……. 잘 처리되었습니까?”
“제가 받은 보고로는 전부 해치웠습니다.”
“어떻게?”
“케츠모리스 공작을 제외하고 순수한 참가 선수는 네 명. 그중 두 명은 암살에 성공했고 두 명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꼭꼭 숨어 버려 찾을 수 없지만, 아마 겁을 집어먹었으니 대회에 나오지는 못할 겁니다.”
“혹시라도 당일에 나타날 수 있지 않나?”
“경기장 근처에 사람을 넉넉히 풀어놨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바로 해치울 수 있습니다.”
페이튼은 제 주변의 늙수그레한 면면들이 비열한 표정을 짓는 게 보기 싫었다. 자신의 얼굴도 저렇게 못났을까 봐 일부러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한 채 위스키로 목을 축이며 결선 진출 선수를 떠올렸다.
“그럼 마지막 남은 선수는 에디스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