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길디긴 실랑이 끝에 기어코 출전을 결정한 에디스는 그를 궁에 남겨 두고 대회장에 섰다.
지켜보기만이라도 하겠다는 클라이드의 주장을 기어코 꺾었다. 싸우면서 느낀 건데, 그는 에디스를 좀체 이길 줄 몰랐다. 티격태격 다투기는 했지만, 결국 그녀의 뜻대로 끝이 났다.
에디스의 입장으로는 그의 부상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붕대 감은 상태를 숨긴 채 로얄석에 앉는 게 걱정이었다.
그래서 최근 도시 안에서 기승을 부리는 불법 노예 문제를 클라이드에게 내밀었다. 오랜만에 두툼한 보고서를 작성해 침대 옆 협탁에 뒀다. 그가 그걸 검토하고 대책을 세우자면 한동안 황태자 궁에 들락거릴 인사가 많을 터였다.
클라이드에게 일거리를 두둑하게 안기고 나니 총사 대회 본선에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근위대 중 최정예 위병만 골라 팀으로 구성해 에디스를 경호했다.
팀의 리더 격인 근위대 부장이 그녀가 가는 길을 일일이 지적했다.
“저희를 앞뒤로 세우고 다니셔야 합니다. 대회장에 내리면 곧장 선수 대기실로 직행하시고, 한자리에서 꼼짝하지 말고 계십시오.”
“알았어요. 가만히 있을게요.”
대기실 구석에 처박힌 채 적들의 불순한 낌새를 어떻게 찾을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겠다고 우긴 것만으로도 클라이드에게 충분히 걱정을 끼쳤으니, 이 이상 나서지 않는 편이 나았다.
에디스는 품이 낙낙한 겉옷 안으로 실크를 누빈 방탄복을 두 겹이나 입었다.
미리 작전을 짠 대로 마차를 내린 정문에서부터 대기실까지 철통 보안 속에서 이동했다.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아 덩치 좋은 호위들에게 둘러싸였다. 선수 관계자로 허용된 인원수를 모두 채웠다.
경기 시간이 다가오자 대기실은 선수와 관계자로 가득 찼다.
그중에 에디스가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페이튼 가의 저택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이름이 닉슨이었던가. 가장 기대되는 선수라고 페이튼이 자랑하던 기억이 났다. 빗맞히기 연습을 하던 자도 바로 저 선수였다.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닉슨과 마주치자 도저히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에디스는 근위 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보는군. 혹시 나 기억나나?”
닉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청년은 굉장히 놀라며 펄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아, 예. 그…… 공작님이시라고 기억합니다.”
“편히 있어. 내가 옆에 앉아도 될까?”
“여, 영광입니다.”
가까이에서 인사를 나누다 보니 의외로 순박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같은 조에 자네와 함께 출전하게 된 줄은 몰랐군. 명단이 워낙 길지 않았나. 자네 이름이 닉슨이란 것만 알기도 했고 말이야.”
“저도 이곳에 공작님을 뵈어 놀랐습니다. 실은 출전하신 줄도 몰랐습니다.”
“나야 취미로 참가한 것이지. 운이 좋아 본선까지 오게 되었군.”
“운도 실력이라 하지 않습니까.”
“자네야말로 좋은 성과를 거두길 바라네.”
그녀가 자꾸 말을 걸자, 닉슨은 갈색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공작님도 결선까지 가시길 빕니다.”
에디스는 닉슨이 용병쯤 되는 줄로 예상해 왔다. 페이튼이 돈으로 산 사람인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레이브즈 가의 선수로 뛰게 되었는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말이나 행동을 보니 사람을 죽이는 살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살수를 만난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인간미 없고 살기가 등등할 것 같았다. 그런 상상에 따른다면 닉슨은 살인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선수촌에서 열심히 훈련만 한 엘리트 체육인 느낌이랄까.
“자네의 축원을 들은 김에 명사수의 기운도 좀 나눠 주겠나?”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꾀를 써먹었다.
“우리, 같이 움직이면 어떻겠나?”
“같이요?”
“호명될 때까지 잡담이나 나눌까? 대회장에 오를 때 서로 격려해 주고 말이야.”
닉슨은 또 머리를 산발이 되도록 긁었다. 덩치는 산만 하고 얼굴도 조폭처럼 우락부락한데, 하는 짓은 나름대로 귀여웠다.
“재미있는 얘기는 할 줄 모릅니다만.”
“구태여 재미있을 필요가 뭐 있어. 긴장이나 풀자는 거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순수한 대답이 재미있어 그녀는 픽 웃었다.
“최선까지야.”
요행히 그는 혼자 온 상태였다. 동료들이 다른 조로 흩어진 탓이었다.
신분 있는 자들이 시중꾼을 동반한 데 반해, 평민들은 흔히들 혼자 와서 직접 장비를 챙겼다. 그레이브즈 가에서는 아마 닉슨의 심부름을 할 사람까지 챙겨 주지는 않은 듯했다.
덕분에 에디스는 닉슨과 일대일로 얘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닉슨에게 접근한 가장 큰 이유는 음모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일단은 닉슨의 개인사부터 잡담처럼 물어봤다.
알고 보니 그는 전문 사냥꾼이었다. 페이튼의 검은 덩굴 흙 영지에서 가장 이름을 날렸다. 일상의 대부분은 산을 헤매며 맹수를 잡았다.
그러다가 대회 개최가 확정되면서 급히 불려왔다.
움직이는 동물 대신에 고정된 목표물을 맞히는 게 오랜만이라 처음에는 어리바리했는데, 머지않아 잘 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이후로는 휩쓸리듯이 총사 대회 선수가 되었다.
“닉슨은 참전하면서 생업을 두고 왔을 텐데. 지원금이라도 충분히 받았나?”
“곰 잡는 것보다 훨씬 많이 받았습니다. 여기에 와서 편하고 아주 좋아요.”
“다행이군.”
좋은 말로 격려해 주긴 했지만, 그녀는 내심 닉슨에게 회유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고작 곰 잡는 비용보다 더 받았다면 클라이드 쪽에서 더 큰 금액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닉슨은 딱히 페이튼에게 충성심이 깊어 보이지도 않았다.
닉슨이라는 선수가 페이튼의 숨겨 둔 계책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페이튼은 에디스가 닉슨과 같은 조로서 대기실에 들어오는 우연을 대비하지 못했다. 출전을 기다리는 동안 둘이 신상에 대해 조잘거릴 것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때 대기실의 열린 문으로 진행 요원이 들어와 외쳤다.
“4조 준비하세요.”
에디스가 출전할 시간이었다.
닉슨과 함께 경기장으로 나가며 서로를 격려했다. 마음속으로는 페이튼의 계략일 듯한 그가 떨어지면 좋겠다고 여겼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경기는 예선전보다 한결 안정된 분위기였다.
어중이떠중이는 떨어지고 웬만큼 쏠 줄 아는 선수만 남은 이유도 있었다. 엉뚱한 곳에 총알이 박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에디스가 집중해서 사격하려는 걸 방해하는 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선수, 시합 시작!”
시작 벨이 울리자 8명씩 일렬로 서서 경기를 치렀다. 그녀는 중간쯤에서 자신의 표적지를 조준했다.
일단 총구를 겨누자 잡생각은 일절 지웠다. 집중해서 정중앙을 쏘는 것만 생각했다.
호흡을 고르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순조롭게 점수가 쌓였다.
8명 중 4등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결선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총 10발을 쏴야 하는 경기에서 방심할 틈은 조금도 없었다. 본선까지 올라온 선수의 대부분이 전문 총사였다.
에디스가 결선에 올라가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라그란드 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 온 참가자도 많았다. 내로라하는 명사수는 다 모인 대회였다. 소위 스타급 선수도 적지 않은 자리에 젊은 귀족 여성이 섞여 있으니, 다들 에디스는 본선까지가 한계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는 사람은 새벽의 황실 사격장에서 만나는 몇 명뿐이었다.
그중 진심으로 에디스를 믿어 주는 이는 클라이드밖에 없었다.
‘내가 출세욕? 흥, 말도 안 돼.’
마지막 발까지 쏘고 총을 내렸다.
‘오기. 근성. 그런 거면 모를까.’
차분하게 골라서 쉬었던 숨이 이제야 급해졌다. 사격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심장도 느리게 뛰는 것 같더니, 뒤늦게 두근두근 속도를 냈다.
에디스는 경기장에서 입장하면서부터 주어진 총알을 모두 쓸 때까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았다. 꽤 많은 관객이 환호하고 있는 장면을 비로소 알아챘다.
“시합 종료! 선수는 제자리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점수 집계 후 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본 시합이었다. 방해꾼도 딱히 없었고 가진 실력을 웬만큼 발휘했다. 떨어진다고 해도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점수 집계가 굉장히 오래 걸렸다.
예선 때는 선수마다 신원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더니, 이번에는 꼼꼼히 점수를 산정하는 일에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사로에 서서 다른 선수의 과녁판에 박힌 점수까지는 알 수 없었다. 대충 닉슨의 표적지가 중심 쪽으로 빽빽하게 구멍이 뚫렸다는 정도만 파악했다. 아마 닉슨이 4조의 1등이 될 듯했다.
진행 요원이 드디어 집계표를 들고 시합장 중간으로 나왔다.
“순위대로 발표하겠습니다. 1등은 총점 89점을 쐈습니다. 3라인의 닉슨 콜.”
관객석에서 커다란 박수가 커졌다. 89점이면 열 발의 거의 대부분이 9점대에 꽂혔다는 뜻이었다. 2등과 3등은 모르는 이름이 불렸다.
마지막으로 4등만 남자, 에디스는 거의 마음을 내려놨다.
아무래도 떨어지려나 봐. 사실 이 정도면 잘한 거지 뭐. 닉슨에 대한 정보도 수집했으니 참가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어.
“4등은 총점 81점입니다. 6라인의 에디스 케츠모리스.”
붙어 버렸다.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결선 진출이라니. 놀랍게도!
멍하니 입을 벌리며 고개를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꼴찌로 통과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본심으로는 정말 지기 싫었다.
에디스가 결선에 오른 건 대회 본선전의 대이변이었다.
“오오오—.”
관객의 소리조차도 이전과 달랐다. 다른 선수에게는 환호와 박수를 보낸 데 반해, 이번에는 놀라움이 역력한 탄성이었다.
아담한 체격의 귀족 아가씨가 이렇게나 사격에 일가견이 있으리라고는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멋진 모습을 남기려고 재킷 자락을 여미며 당당히 어깨를 폈다. 턱도 도도히 치켜들었다. 멀리서 구경하는 관중의 눈에는 고상하고 우아한 케츠모리스 공작의 자태여야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엄청 으쓱했다.
줄지어 퇴장할 때, 기뻐서 폴짝 뛰고 싶은 기분 탓에 발뒤꿈치가 높이 들렸다. 광대근이 구물구물 올라가는 것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