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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53)화 (53/129)

53화

우두커니 선 점성술사의 마른 몸이 건들건들 흔들렸다.

하늘은 캄캄했고 휑한 들판은 고요하기만 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기다리는 시중꾼들이 둥근 그림자를 남겼다.

한참이나 하늘의 기운을 읽고만 있을 뿐인 술사는 에디스에 관해 얘기를 계속하지 않았다.

페이튼은 궁금증만 자아내고 본론을 꺼내지 않는 점성술사가 못마땅했다. 복채를 올려 받으려는 수작으로 보였다.

“에디스가 뭐 어떤데?”

“그 사람은…….”

제까짓 게 용해 봤자지. 어차피 천한 신분인 주제에 돈푼이나 벌려고 시간을 끄는 듯했다.

그는 술사의 발등에 금화를 던졌다. 발에 맞아 구른 동전이 근처의 잡풀에 박혔다. 눈이 먼 술사가 돈을 찾으러 바닥을 더듬는 꼴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점성술사는 추가금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수정구 너머의 별을 세는 눈동자가 창백하게 번들거렸다.

“헉!”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아, 이건.”

“더럽게 시간 끄는군. 너야말로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매질을 당할 줄 알아라.”

협박조로 을러대는데도 점성술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늘만 바라봤다.

돌연 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자가 두 손으로 받쳤던 수정구에 균열이 생기더니 절반으로 쪼개졌다. 제법 값비싸 보이는 수정구는 형편없이 망가진 채 잡초밭에 떨어졌다.

점성술사의 손이 벌벌 떨렸다. 감동한 듯한 음성도 크게 진동했다.

“그분은 아주 귀한 분이다.”

“귀하다고?”

“미처 다 보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 큰 빛이 되어 주실 분이야.”

“빛이라……. 영웅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잘 모르겠어. 한번 그분을 뵐 수 있을까? 보다 정확히 별점을 치려면 직접 만나서 기운을 읽어야 해.”

“만나게 하기는 어렵다. 바쁜 사람이거든.”

점성술사는 하늘에 올린 눈을 껌벅거렸다.

“중요한 일을 하느라 바쁘신가 보군.”

“흠.”

“나랏일을 하시나?”

“맞다. 점 보는 실력이 제법인걸.”

“그분은…… 여태껏 불운을 겪으셨군. 남의 허물을 뒤집어써서 고생이 많으셨어.”

페이튼은 속으로 꽤 감탄했다. 에디스가 아버지의 빚을 짊어졌다는 걸 짚어 낸 듯한 점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술사에게 점을 보기 전에 에디스의 신상정보를 알려 줬다. 그중에 에디스가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어떻게 사는지는 포함하지 않았다.

또한, 이 점성술사는 특이하게도 사람의 기운을 들먹이면서 소지품을 요구했다. 그래서 혼담과 관련해 주고받았던 서신을 줬다. 과연 그것으로 기운을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큰 인물이 될 점괘라는 게 에디스가 황태자의 최측근 시종이라는 점과 연관된다면, 나름대로 용한 점성술사라는 게 증명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술사는 페이튼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소리로 가늠해서 페이튼이 있는 쪽으로 허연 눈을 두리번거렸다.

“그분의 운명을 본 비용은 받지 않겠다. 아직 조금밖에 확인하지 못하기도 했고. 다만 기회가 된다면 꼭 그분을 만나 보고 싶어.”

“대체 왜 이리 이상하게 구는 것인가.”

“내 일생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그분을 뵙지 못한다면, 다른 물건을 받을 수는 있겠나?”

“다른 물건이라니?”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것 말이야. 오메가 페로몬을 맡을 수 있으면 더 좋고.”

이 점성술사는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실력으로 극찬을 받으며 유명세를 탔다. 그런 탓에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지, 가당치도 않은 요구를 했다.

“요구가 과하지 않나. 무슨 점성술을 그따위로 봐.”

“제발 부탁이다. 내가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수정구를 새로 장만하는 돈만 빼고 전 재산을 네게 주겠다.”

페이튼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졌다. 에디스와의 연애운을 보러 와서 엉뚱한 봉변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아주 웃기지도 않는군. 너 따위의 푼돈을 내가 바란다고 생각해?”

점성술사의 태도가 간곡했다.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만이라도 알려다오. 내가 직접 찾아가서 빌어 보마.”

아무리 점성술을 잘 본다고 해도 대상자가 있는 곳을 정확히 짚어 내지는 못한다. 점을 쳐서 에디스의 위치를 알아낼 리는 없었다.

페이튼은 에디스를 만나고 싶어서 난리 치는 술사가 괴상해 보였다. 하는 짓을 보니 순전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복채를 받고 점을 봐주려는 의지는 별로 엿보이지 않았다.

“뭐야, 대체.”

페이튼은 불쾌한 기분을 누르면서 잠시 생각했다.

용하다는 점성술사를 찾은 이유는 단순히 에디스와의 연애운을 보려 했을 뿐이지만, 여태껏 나온 얘기도 꽤 솔깃했다.

물론 별점만 믿고 결혼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예언을 약간의 조언 정도로 받아들였다.

“네가 본 별에 의하면 에디스가 대단한 빛이라는 거지?”

“그렇다.”

“그럼 내 아내로 맞이하면 딱 좋겠군.”

진작부터 에디스를 상당히 가치 있게 평가했고 아내로 진지하게 고려해 왔다. 그녀의 앞날에 빛이 깃들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였다.

그런데 점성술사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왜?”

“너와 맞는 짝인지는 보지 못했다. 그 이전에 수정구가 깨졌어.”

“맹인의 눈으로 별점을 보는 술사라더니. 갑자기 왜 수정구는 들먹이나.”

“그분은 그래야 하는 분이니까. 너나 나처럼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페이튼은 코웃음 쳤다. 결혼 조건을 모조리 꿰고 있는 자신보다 훨씬 더 그녀를 잘 안다는 듯한 점성술사의 말투가 우스웠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넌 아예 에디스를 떠받들겠군. 제대로 점을 보지도 못했다면서 왜 난리지?”

“너는 모른다.”

짜증 난 페이튼은 그만두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술사가 저를 보지 못한다는 점을 뒤늦게 되새겼다.

“그만 됐다. 에디스의 머리카락을 구할 수 있으면 다시 오겠다.”

“부탁한다.”

뒤돌아 나오며 페이튼은 에디스를 어쩌면 좋을지 거의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확실히 쓸모가 있었다. 황태자의 측근으로서든, 긴 초록 뿔 영지의 주인으로서든.

여태까지 줄곧 고민해 왔다. 에디스라는 선택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망설였다. 그런데 점성술사의 말대로라면 취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려면 요즘 돌아가는 상황도 함께 계산해야 했다.

페이튼은 총사 대회와 관련해 물밑 작업을 벌여 왔다. 대회가 형편없이 진행되어 황실이 국제적으로 망신당하는 꼴을 봐야 했다. 단순히 황태자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려는 감정적 문제가 아니라, 알력 다툼에 이은 이권의 문제였다.

하지만 에디스를 건드리지 않고도 총사 대회를 망칠 방법은 많았다.

그는 빅토르 백작이나 디트리안 백작같이 기가 센 자들을 잘 구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디트리안 백작에게는 또다시 에디스에게 신체적인 위협을 가하지 못하도록 언질을 줄 필요가 있었다.

장차 부부의 연을 맺어 같은 진영으로 끌어들일 사람이니 다쳐선 곤란했다.

* * *

< 6장. 폼 나는 명사수 >

총사 대회 본선이 열리는 날은 상당히 날씨가 우중충했다.

그래도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별자리를 보는 천문관이 신중히 날을 골랐다고 하더니 그 덕분일까. 화약이 비에 젖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

본선 경기에 참가하기 전, 에디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또다시 저격 사건이 터지면 어쩌나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긴 망설임 끝에 결국 선수단 속에 들어가게 됐다.

우선은 이 세계가 소설이라는 점이 그녀의 불안한 심리를 절반쯤 덜어 줬다. 총에 맞아 죽어 봤자 4년짜리 꿈을 꾼 거와 같으니까.

그리고 약간 오글거리는 포부도 있었다. 이곳 라그란드 제국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에디스의 점심용 빵을 신나서 받아 가던 아이, 노점시장의 지붕 아래에서 행복한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아주머니. 그런 사람이 줄곧 생각났다.

그녀는 선수로서 경기장 내부를 감시, 관찰할 임무가 있었다. 귀족파에서 수상한 동향이 파악된 탓에, 자신의 책임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

대회는 꼭 순탄히 치러져야 했다. 황실의 권위가 바로 서고 클라이드의 힘이 세져야 귀족 위주의 사회에서 한 걸음 나가게 될 것이다.

에디스는 이제 자신도 구한말 독립투사의 반의반의 발가락 때만큼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클라이드와는 대판 싸웠다.

“출전하면 안 돼, 에디스.”

“할 수 있어요. 호위를 잘 데리고 다닐게요.”

“위험하다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을 어떻게 막겠어.”

“범인의 동태가 잠잠하다면서요. 이번에는 아마 같은 시도를 또 하지는 않을 거예요.”

물증은 없고 심증으로만 범인을 찾은 상태였다. 디트리안 백작이 암살자를 고용한 듯했다. 그때의 죄를 묻지는 못하는 상황이라 백작의 움직임을 주목해 왔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괜찮다니까요.”

“에디스, 넌 죽는 게 겁나지 않아? 대체 왜 이리 태평해.”

“겁나긴 하지만…… 잘할 수 있어요.”

클라이드는 그녀의 고집에 질려 버린 듯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에디스, 예선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네 몫은 차고 넘치게 했어. 이젠 못 보내. 황명을 내려서라도 널 막겠어.”

“그러기만 해 봐요. 가만 안 둬.”

“네가 뭘 어쩔 건데.”

에디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가 가장 꺼릴 만한 얘기를 넌지시 던졌다.

“사표 쓸 거예요.”

움찔 놀라는 클라이드의 행동이 눈에 밟혔다. 진심이 아닌 양 지나가는 말로 흘렸을 뿐이지만 그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만간 정말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을 하니 그녀는 미리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에디스 제발……. 차라리 나를 밟고 가.”

“밟는 것쯤 뭐 어렵겠어요.”

“에디스 진짜.”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마지막으로 클라이드를 설득했다.

“놈들이 수작을 부리려는 낌새를 알아챘잖아요. 빗맞힌 표적지 말이에요. 그걸 보고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길게.”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클라이드가 말했잖아요.”

“에디스보다는 못하더라도, 믿을 만한 근위병을 시키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출전할 테니까.”

애원하다시피 하는 클라이드는 거의 무릎을 꿇을 지경이었다. 완강한 태도의 에디스를 힘으로 뜯어말리지는 못하고, 기껏해야 옷자락을 잡으며 가지 말라고 청했다.

“제발……. 어떻게 하면 그만둘래?”

“날 그만두게 하는 건 포기하세요. 클라이드는 본선에 올 필요 없고요.”

“왜?”

“아직 팔이 덜 나았잖아요.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하다가 도지면 어떡해요.”

“내 걱정은 그렇게나 많이 해 주면서, 어째서 네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거지?”

좌절을 이기지 못한 클라이드의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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