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반가운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페이튼이 그녀에게 기운차게 인사를 건넸다.
아드리안은 뒤돌아 있었고 에디스는 위치상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눈가에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젖은 얼굴을 페이튼에게 보여선 안 될 듯했다.
에디스는 재빨리 아드리안을 가리며 나와서 섰다.
“웬일이세요, 페이튼? 궁에 오신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원래는 전하를 뵙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무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저런, 말씀 못 들으셨나 봐요. 전하께선 러트 사이클 중이세요. 며칠간 일정이 모두 취소됐어요.”
“접견 일정이 취소됐다는 연락은 미리 받았습니다.”
“그럼 왜……?”
“제가 알기로는 이번 사이클부터 전하께서 오메가와 함께하신다고 해서요. 건강한 모습을 뵐 수 있기를 내심 기대했거든요.”
대답이 영 찝찝하게 들렸다. 좋게 봐주면 황태자를 염려하며 궁 분위기를 살피러 온 듯했다. 하지만 나쁜 쪽으로 보면 염탐하러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드가 오메가 연인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훔쳐보러 온 것이다.
게다가 아드리안은 지금 황태자의 침실이 아닌 이곳에 있었다. 아드리안의 밝지 못한 표정을 들켜서는 안 될 이유가 늘어났다.
에디스는 방어적으로 손을 앞으로 모으며 정색했다.
“전하께서 사이클을 어떻게 지내시는지는 엄밀히 따지면 황실의 기밀이라서요. 페이튼이 사적으로 들은 부분이 있더라도, 저로서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네요.”
황태자가 기질이 강한 우성 알파이면서도 오메가를 곁에 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권신들 간에 제법 널리 알려져 있었다. 원래 황족의 건강은 극비여야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그래도 다 안다는 식으로 대놓고 떠벌리는 페이튼의 행동은 옳지 않았다.
“아, 오해 마십시오. 에디스에게 뭔가를 캐내려던 뜻은 아닙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고요.”
“사이클 기간에 일정을 비워 두는 건 전하뿐만 아니라 웬만한 알파나 오메가에게 흔한 일이 아닙니까. 저는 단지 그 정도 선에서만 얘기하려 했을 뿐입니다.”
에디스는 굳혔던 인상을 풀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다퉈 봤자 득이 될 것은 없었다.
“어쨌든 입궁했다가 그냥 가시게 되어 아쉽군요. 나중에 궁에서 새로 접견일을 잡아 통지해 줄 거예요.”
페이튼이 싱긋 눈꼬리를 접어 미소 지었다. 경직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런데 같이 계신 분은…… 레이먼드 경이 아닙니까?”
그는 머리 색이 워낙 독특한 아드리안을 뒷모습만으로 쉽게 알아봤다. 에디스가 그를 가리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드리안이 몸을 돌리며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그레이브즈 경.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느새 평소의 얼굴색으로 돌아온 아드리안이 잔잔한 모습으로 페이튼과 인사를 나눴다. 한동안 예의를 차린 대화를 주고받으며 각자 마음속에 품은 경계심을 감췄다.
“레이먼드 경, 전하와 함께 있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방금 전에 침실에서 내려왔습니다. 저도 휴식이 필요해서요. 자세히는 묻지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예. 실례했군요.”
이미 에디스가 한 소리 했는데도 불구하고 페이튼은 의도적으로 캐묻고 있었다.
이쯤 되면 황태자를 견제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거와 같았다. 가뜩이나 그의 집안이 구 귀족 계열이라 황실과 대립할 여지가 많은데, 이를 해결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아드리안이 예의 바른 태도로 물었다.
“실례지만 먼저 자리를 떠도 되겠습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바빠서 말입니다.”
마치 이젠 클라이드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에디스는 그가 도로 위층으로 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은근슬쩍 맞장구쳤다.
“맞아. 아티, 얼른 가 봐.”
“에디스, 나중에 또 봐.”
아드리안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페이튼은 지그시 눈매를 좁히며 바라봤다.
그녀는 혼인 상대로서 페이튼을 만났을 때와 지금 그의 모습이 무척 달라 보였다. 그에게서 역력히 권세가의 일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구 귀족들은 기득권이 많아 구태여 황실에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순순히 복종하기보다는 다툼과 분쟁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곤 했다. 어떨 때는 일부러 황태자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게 다 작전이고 계략이었다.
페이튼의 시선이 아드리안에게서 에디스로 바뀌었다. 목표물을 새로 설정한 느낌이었다.
“에디스는 레이먼드 경과 친분이 깊은 모양입니다. 아주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더군요.”
“아티하고는 아카데미에서부터 쭉 알고 지냈거든요.”
“그때부터 친분이 깊었습니까?”
왠지 꼬치꼬치 질문당하는 기분이었다. 괜히 약점 잡힐 만한 빌미를 주기는 싫어서 그녀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학생 때야 두루 친하게 마련이지요.”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페이튼의 50점짜리 점수를 10점으로 깎았다.
조만간 적당한 시기를 찾아 혼담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금전적인 조건은 좋았으나 세상을 보는 시각은 너무 다른 탓에 얘기를 나누기가 거북했다.
게다가 그의 집에서 빗맞히기 연습을 하던 사람들을 잊을 수 없었다. 총사 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하려는 에디스와 음모를 꾸며 훼방 놓으려는 페이튼은 부부가 되기에 너무 사고방식이 상반됐다.
에디스의 속도 모르고 그가 친절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되신다면 오늘도 저와 외출할 수 있겠습니까?”
일 때문에 바쁘다는 얘기는 적절치 못했다. 클라이드가 침실에 처박혀 있음을 페이튼도 뻔히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핑계를 댔다.
“유감스럽지만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저런,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그냥 좀…….”
그는 에디스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감기 기운이 있다고 둘러대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다른 식으로 운을 띄웠다.
“그냥 여기저기 아파서요.”
그가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얼마나 부상당했습니까? 에디스, 괜찮은 건가요?”
열정적으로 빛나던 페이튼의 눈빛에 걱정이 한가득 어렸다. 그녀의 몸을 따라 시선이 길게 내려왔다.
“심각하진 않아요. 이렇듯 말짱하게 돌아다니잖아요.”
“그래도 걱정되는군요. 에디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방에 들어가 쉬시는 편에 낫겠습니다.”
“네. 아무래도 그럴까 봐요.”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에디스가 입은 업무용 복장은 겉옷의 옷감이 빳빳했다. 속으로 약간 붕대를 둘렀다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차림이었다.
그녀는 작은 미소만 보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 상태가 나아지면 저한테 꼭 연락해 주십시오. 에디스를 만나러 다시 오겠습니다.”
“말씀 감사해요. 이대로 돌아가게 해 드려 유감이네요.”
작별 인사를 한 페이튼이 카페테리아 바깥으로 내다보이는 잔디를 지나 멀어졌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지 끝까지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에디스는 홀로 남게 되자 표정이 팍삭 구겨졌다.
혹시나 해서 슬쩍 떠봤더니, 페이튼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비밀을 털어놓고 만 것이다.
그녀는 제 입으로는 여기저기 아프다고만 했다. 그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보통은 어깨가 결린다든가, 몸살이 났다든가 하는 쪽으로 연상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페이튼은 대뜸 부상을 입에 올렸다.
황실 시종으로 있는 귀족에게 부상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에게 더욱 의심이 들었다. 페이튼이 미리 그녀가 부상당하리라는 예측을 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어디에서 다쳤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가 궁금해한 점은 신체 어느 부위를 얼마나 다쳤느냐였다.
‘소름 끼쳐. 정말.’
경기장 후문에서 에디스를 저격한 자는 페이튼의 사주를 받았을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걱정하던 페이튼의 태도는 진짜같이 보였다.
어쩌면 같은 노선을 타고 있는 귀족 중 누군가의 소행일 수도 있었다. 그들끼리는 제법 자주 모임을 갖는 듯하니 페이튼이 전해 들었을지도 몰랐다.
‘페이튼은 속셈을 모르겠어. 날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건지, 죽이고 싶은 건지.’
그는 에디스가 총사 대회에 출전한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 지난번에 페이튼의 집에 갔을 때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미리 알았다면 빗맞힌 표적지를 무방비하게 놔두지는 않았겠지.
저격범의 배후가 누구인지 아직 불확실했다.
하지만 배후는 그녀를 죽일 시도까지 했다. 목숨을 앗을 만큼 에디스를 눈엣가시로 여긴다는 방증이었다.
새로이 경각심이 커지고 있었다. 클라이드가 조심성을 강조하던 게 피부로 와닿았다. 그는 황태자의 안전망 안에 늘 에디스를 두려고 했는데, 이젠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 * *
늦은 밤, 페이튼은 용하다는 점성술사를 만났다. 특별한 인맥으로만 소개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술사는 별의 흐름을 잘 읽기로 특히 유명했다.
세간에서 일컬어지기로, 하늘이 가리키는 이치를 깨우치는 별점이야말로 가장 근거 있고 믿을 만한 예언이라고들 했다.
그는 별점을 보는 점성술사에게 에디스에 관한 사정을 자세히 늘어놨다. 꼭 점을 본 결과대로 실행에 옮기겠다기보다는, 중요한 일을 치르기 전에 속풀이나 하자는 마음이었다.
백안의 점성술사가 멀리 하늘을 바라봤다. 주변 사물은 보지 못하고 오로지 별만 볼 수 있는 눈이었다.
“그 오메가가 다쳤다고?”
로브의 긴 소매 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까딱까딱 짚으며 술사는 물었다.
“오메가인 건 아직 확실치 않다. 내가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지.”
“오메가 맞아.”
“역시 그런가?”
“그리고 다치지 않았어. 아주 맑고 밝아.”
페이튼은 낮은 탄성을 터뜨리며 술사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분명히 에디스는 겉보기에 멀쩡했다. 아프다고 했던 말은 경기장 후문에서 당한 부상이 아니었던 건가? 그럼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다는 핏자국은 다른 사람이 다친 흔적인가 보다.
그때, 디트리안 백작이 저격수를 보냈다는 소식에 그는 기겁했었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페이튼은 일이 터지고 난 후에야 정보를 입수했다. 에디스가 총사 대회에 출전했다는 사실도 처음 들었고, 거기에다가 은밀히 저격까지 당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오늘 그가 입궁했던 이유는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보기 위해서였다.
“에디스가 건강한 거 확실한가?”
점성술사가 짜증 내며 대꾸했다.
“눈곱만큼 긁혔을지도 모르지. 그런 자잘한 것까지 내가 챙겨야 하나? 이따위로 의심할 거면 그만 돌아가.”
“아니다, 계속해.”
어지간해선 도구를 쓰지 않는다는 술사가 품에서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을 꺼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별을 수정구에 투영했다.
“허어……. 그 에디스라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