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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51)화 (51/129)

51화

다시 클라이드를 옆 침대에서 마주하며 잠드는 밤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그의 형상을 더듬다가 눈을 감는 날이 이제는 제법 길어지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둘이 꽤 익숙해졌다. 새벽 훈련을 위해 일찍 잠든다거나, 스케줄대로 움직인다거나 하는 일상들.

에디스는 원래 늦은 밤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야식을 깨작거리며 소설을 읽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현실 세계였다면 폰도 많이 봤겠지만, 이 세계에 오고 나서는 주로 로맨스 소설에 심취했다.

그런데 바른생활 사나이인 클라이드는 어림없었다. 황태자의 취침 시각으로 정해진 때가 오면 칼같이 불을 껐다.

음주나 유희를 즐기는 경우도 보지 못했다. 원작에서 그가 곁에 오메가를 두지 않았다는 설정은 실제로 겪어 보니 너무 일리가 있어 보였다. 저 빡빡한 성정을 뚫고 과연 누가 접근하겠는가.

“클라이드, 다친 건 어때요?”

“진통제가 너무 독해서 몽롱하더니 지금은 괜찮아졌어.”

“진통제 말고 부상은요?”

“멀쩡해. 이젠 그만 신경 써 줘도 돼. 너한테 관심받는 건 좋았지만, 이만큼이면 충분해.”

멀쩡할 리가 절대 없다. 출혈이 그렇게 심했는데 어떻게 반나절 만에 차도가 있겠나.

“불 끄러 돌아다닐 때 걱정되더라고요.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리를 다친 게 아니잖아. 에디스, 은근히 과보호 기질이 있네.”

목을 깊이 울리는 웃음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그는 부상 상태에 대해 전혀 위기의식이 없는 데다가, 에디스가 걱정해 주니 너무 즐거워하는 티가 났다.

여러모로 역시 부담스러웠다. 두꺼운 붕대가 감긴 팔이 그녀에게는 마음 쓰였다.

“아, 몰라. 어서 자요.”

그가 몸을 날려 막아 내지 않았으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십중팔구 이 세계의 삶이 끝났을 테지.

따지고 보면 클라이드는 생명의 은인이다. 목숨을 걸어 지켜 줘서 제가 다치지 않은 것이다.

붕대를 감아 하얗고 커다래진 어깨가 어둠 너머로 엿보였다.

같은 사건을 반대 입장에서 겪는다면 어떨지. 클라이드에게 가는 총구를 알아채는 순간 저도 몸을 날릴 수 있나.

자신의 생명을 걸어 과연 그를 살리게 될까?

기회가 되면 클라이드에게 묻고 싶다. 순간적으로 몸이 앞서서 막았는지, 정말 저를 대신해 희생할 마음이 있었는지.

그는 신체 능력이 남다른 사람이니 자동으로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정조준한 총을 피해 에디스를 구하고, 그도 팔만 다칠 정도였으니 확실히 동물에 가까운 운동신경이다. 그러니 적을 본 순간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을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깨달으면서도 에디스를 살리려 했다면…….

그러면 너무 난감해질 것 같다.

긴 망상의 끝에서 잠결에 뒤척이듯이 그를 불러 봤다.

“클라이드.”

진통제의 효과 때문인지 그는 일찍 잠들었다.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턱은 천장을 향해 멈춰 있었다.

다시 골몰해 보니, 묻지 않는 편이 낫겠다.

그가 목숨이 아깝지 않을 만큼 그녀를 끔찍이 여긴다는 얘기가 나올까 봐 두려웠다. 절절한 고백은 듣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반대의 답을 금세 얻었기 때문이다.

에디스는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는 서지 못했다. 군신의 관계이든, 연인의 관계이든. 클라이드는 제게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깨달아야 할 현실이 가슴 아팠다.

이따금 설렐 때가 있고, 잘난 얼굴을 보는 맛은 무척 좋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를 소설 캐릭터로부터 살아 있는 인간으로 진화시킨 게 고작해야 얼마 전이다. 거기에 갑자기 특별한 마음이 싹트기는 힘들다.

제방을 넘쳐흐르는 강물과 한 동이의 물에 비유하면 적절하려나.

자신은 참방대는 물이다.

온몸을 휩쓰는 큰물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초라한.

* * *

때맞춰 클라이드의 러트 사이클이 찾아왔다.

예정된 주기보다 이삼 일 빨랐다. 부상 탓인 듯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몸살 기운에 힘입어 약간 당겨졌다는 식으로 알리게 되었다. 덕분에 에디스가 황태자의 직무를 계속 대행할 필요까지는 없어졌다.

또한, 지난 러트 사이클과는 다르게 아드리안이 불려왔다. 황태자의 러트를 돌볼 오메가로서 역할을 하기 위함이었다.

매달 러트 사이클이 돌아올 때마다 에디스가 클라이드의 곁을 지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드리안이 황태자의 침실에 들어 단둘이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들 둘만 남겨 두고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에디스는 사격 훈련만 마치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카페테리아에서 햇볕을 쬐며 읽다 만 소설을 마저 읽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아드리안이 가까이 와 있었다.

“피곤했나 보네.”

그가 맑은 눈매를 접어 어여쁘게 웃었다.

입가에 침이라도 흘리지 않았는지 얼굴부터 더듬거린 에디스는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뺨에 울퉁불퉁한 흔적이 만져지는 거로 봐서 눌린 자국이 생긴 듯하다. 조금 민망해서 뺨을 가린 손을 내리지 못했다.

“언제 왔어? 전하는 어쩌고?”

아드리안은 그녀의 손목을 쥐어 살그머니 내렸다. 드러난 눈과 코, 입을 응시하는 시선에 미동도 없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더라. 내 몫은 다 하고 나오는 길이야.”

둘이 뭐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웠다. 알파의 페로몬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역시 잠자리가 최선이라던데.

그녀는 클라이드와 아드리안이 쇼윈도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디스가 임관한 뒤 줄곧 정치적으로 강공을 펼치고 있는 황태자가 귀족파를 교란하기 위해 세운 방패막이다.

그래도 차마 궁금증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알파와 오메가는 민감한 사이니까.

“점심은 먹었어?”

슬쩍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면서 밥 얘기나 했다.

“아니, 아직.”

“나랑 같이 먹을래?”

늦은 점심을 함께하면서 그는 사뭇 들뜬 기색을 띠었다. 그녀에게 음식 맛을 여러 번 묻고 자잘하게 필요한 것을 챙겼다. 에디스도 저절로 그의 분위기에 묻어갔다.

그러고 보니 같이 식사하기는 처음이었다. 겉돌기만 하던 사이인지라, 서로에 대해 아는 건 많지만 실제로 접촉한 적은 별로 없었다.

아드리안이 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워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후식으로 푸딩을 먹을 때 너무 달아서 쩔쩔매는 표정을 직접 보는 게 신기했다. 결국 아드리안에게 과일을 몰아주고 에디스는 푸딩 두 개를 먹었다.

“에디스는 내가 전하께 불려 가서 뭐 했는지 안 물어봐?”

마침 정곡을 찔렸다.

“물어봐도 돼?”

“물론이지. 알려 주고 싶어서 얘기가 나오길 기다렸는걸.”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하게 미소지으며 그가 찻잔을 내려놨다.

“전하는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리라고 처음부터 짐작했어. 러트 사이클에 도움을 줄 오메가로서 침실에 들기는 했지만 선은 지킬 것 같았거든.”

“좀 그런 성품이긴 해.”

“그런데 손을 잡아 드릴까 물었더니 거절하더라. 내가 오메가 페로몬을 흘리는 것만도 질색했어.”

“아니, 왜? 피부 접촉도 약간은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싫은가 보지, 뭐. 내 냄새가 싫든지. 아니면 원하는 오메가가 있든지.”

“…….”

“결국은 옆방에 건너가 문을 닫고 있었어. 우리는 남이 볼 때는 살갑게 굴면서도 둘이 남으니 완벽하게 내외하는 사이야. 말 그대로 전시용 커플인 거지. 나도 그게 편하고.”

그는 이어서 단둘이 남은 방에서 벌어진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마치 클라이드와 아무 일도 없었다고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연히 오해받고 싶지 않은지 작은 에피소드까지도 낱낱이 밝혔다.

그런 행동이 에디스에게는 썩 편치 않았다.

아드리안에 대한 감정은 클라이드보다 더 명쾌했다. 아주 아름다운 친구. 클라이드와 잘 풀렸으면 싶은 오메가.

마음을 다잡은 김에, 지금이 그에게 확실히 선을 그을 때인 듯했다.

고해하듯이 오전의 일을 길게 늘어놓는 아드리안을 그녀는 망연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티.”

심각한 말투가 벌써 그를 놀라게 했나 보다. 아드리안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전하와 네가 좋은 사이가 되면…… 나는 더 기쁠 것 같아.”

“뭐? 아니야.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전혀 오해하지 않아. 그냥 줄곧 생각해 온 부분이야.”

선이 유려한 아드리안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색해서 파리해지는 얼굴색조차 크리스털 조각상보다 눈부시면 어쩌자는 건지.

“아티, 너와 일찍 친해졌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어.”

“…….”

“넌 멋있는 친구야. 같이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햇살 같은 친구지.”

“친구?”

“응, 친구.”

이슬처럼 맑은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시시각각 망가져 가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 에디스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늘씬한 다리 위에 올려진 그의 손끝이 까딱까딱 떨렸다.

억지스럽게 꺼낸 친구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아드리안은 창백하게 질린 손등으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에디스, 나는.”

못된 짓이지만 에디스는 말허리를 끊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가 황태자비가 되길 바라. 아마 넌 아주 잘 해낼걸. 전하와도 근사하게 잘 어울릴 테고.”

진심을 담아 축원하면서 볼을 밀어 올렸다. 입은 어색하게 미소가 만들어졌고 웃지 못하는 눈가는 파르르 경련했다.

고집스럽게 그의 무릎을 응시하다가 충동적으로 표정을 살폈다. 당장이라도 툭 떨어질 듯한 눈물이 아랫눈썹에 묵직하게 방울져 있었다.

하아, 그가 크게 심장을 부풀려 숨을 내쉬었다.

“차인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주먹 쥔 손이 가슴으로 향했다. 옷깃 안으로 제 가슴을 꾹 누르며, 끊어질 듯한 음성으로 되뇌었다.

“기분이…… 감당이 안 돼. 믿어지지도 않고.”

모질게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그의 절망을 마주하자 에디스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명치가 울울하니 아파 왔다.

제가 가해자인 주제에 아드리안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하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결국 무릎 위로 툭 떨어지는 눈물을 지켜봐야 했다.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을지 홀로 고심했다. 그에게 여지를 준 적은 딱히 없는 듯한데 어쩌다가 차고 차이는 관계가 되었을까.

식사 시간이 지난 카페테리아는 한산했다. 구석진 자리에 둘만 남아 오가는 이가 없었다. 시종이나 궁인을 위한 휴게 장소인 탓에 한창 바쁜 오후에는 텅 비어 있었다.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라 침묵만 지키고 있을 즈음, 어디서 나타났는지 키가 큰 인영이 그들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에디스? 여기서 만나는군요.”

아드리안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에디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페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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