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바깥에서는 멀쩡하게 굴더니 둘만 남으니 그가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렸다.
“어떡해. 내가 도와줄 게 뭐 없을까요?”
“이대로 기대게 해 줘.”
“그거 말고는요?”
뺨을 그녀의 어깨 봉우리에 누르며 클라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방울방울 튄 피가 땀에 엉겨 붙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에디스.”
그녀의 이름을 마법의 주문처럼 읊은 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진짜 한심한 건 에디스보다 나야.”
“클라이드가 왜요?”
조금 뜸을 들여 대답을 늦추는 동안 실내는 고요했다. 마차 밖의 호위들이 길을 트느라고 호령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비로소 달리는 속도가 올라가자 바깥의 소음마저도 잦아들었다.
단조롭게 삐걱거리는 배경음에 실려, 클라이드의 나직한 이야기가 귓속에 깊이 꽂혔다.
“에디스가 나 때문에 울어 주니까 왜 이렇게 좋던지……. 한심하게도.”
그는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해 놓고 헛바람을 실어 실소했다. 조금 냉소적인 분위기로 고개를 그녀의 어깨에 숙였다.
관자놀이에 땀이 새롭게 돋아나고 있었다. 상태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탓에 말소리가 아래로 흘렀다.
“웃게 해 줘도 모자랄 텐데 말이야.”
차츰 클라이드가 꺼져 들어갔다. 힘든지 눈꺼풀을 감은 지는 오래되었고 이젠 등을 구부린 채 옴짝달싹하지 않게 되었다.
맞받아쳐야 할까. 우선 아니라는 말부터 해야 하지 않나. 일단 내버려 뒀다가 정신을 차리면 말하는 게 나을까.
에디스는 우왕좌왕하며 끝내 아무런 결단도 내릴 수 없었다.
긍정과 부정,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을 실은 마차는 흥청거리는 밤거리를 조용히 달렸다.
* * *
부상이 생각보다 깊었다. 클라이드의 왼쪽 위 팔뚝을 맞히고 지나간 총탄은 살점을 한 뭉텅이나 뜯어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관통상이었을 것이다. 의사는 몇 바늘이나 꿰매는 수술을 한 후 절대안정 하라며 클라이드에게 여러 번 당부했다.
제대로 치료받고 진통제도 복용한 그는 그제야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운을 차리자마자 뜬금없는 요구를 했다.
“온 김에 에디스도 좀 봐 주게. 오메가 기질을 발현하는 데 차도가 없어서 말이지.”
그녀가 옆에서 냉큼 끼어들었다.
“지금 오메가가 문제예요? 그런 건 나중에 챙겨도 된다고요.”
“하지만 에디스가 너무 경각심이 없어서.”
“아니요, 우선은 전하의 부상부터 집중해야 해요.”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한 결정은 적절하지 못해 보였다. 이 상태로 연일 이어지는 빡빡한 스케줄을 무사히 소화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총사 대회도 이제 막 시작했는데.
황태자의 엄명에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어서, 다들 비밀을 유지하기에 바빴다. 의사가 돌아가고 난 후 그에게 따지고 드는 사람은 에디스뿐이었다.
“클라이드, 이대로는 무리예요. 일정을 모조리 취소해야 해요.”
진통제 기운에 취한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느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숨 푹 자면 돼.”
“무슨 총상이 잠만 자면 낫나요? 말도 안 돼.”
“잔소리…… 듣기 좋은걸.”
“클라이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이 남자 정말 곤란해.
그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수록 에디스의 마음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가 고귀하고 값진 선물처럼 내미는 감정들은 그녀에게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감당 못 할 선물은 받는 법이 아니라던데, 클라이드가 바로 그 짝이다. 그녀가 책임지기 버겁도록 묵직한 마음의 흐름이다.
“다른 핑계로라도 일정을 변경하도록 하죠. 감기 몸살 정도면 어때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내버려 둬도 돼.”
“정말 계속 이럴 거예요?”
“알았어. 감기 몸살까지만.”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적에게 물어뜯길 수 있으니 꺼리는 마음은 이해했다. 그래도 몸이 이 지경인데 어떻게 평소처럼 업무며 회의를 강행한단 말인가.
그가 침대 옆 협탁에 새로 올려진 서류 뭉치를 집어 들려는 순간, 에디스는 먼저 손을 뻗어 확 뺏어 버렸다.
옆구리에 손을 얹으며 화내는 자세를 만들었다. 빙긋 미소 짓는 클라이드가 얄미웠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인간이야.
“정 뭣하면 내가 클라이드의 일을 도울까요?”
“아냐 괜찮아. 에디스는 총사 대회에 집중하기로 했잖아.”
“덕분에 서류 업무는 다 뺐죠. 어차피 궁에 있을 때는 한가해요.”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가 에디스를 곁눈질했다.
“정말?”
“얘기만 해요. 이 서류를 읽어 주면 되나요? 어디 보자. 주제가…….”
위에 올려진 보고서부터 첫 줄의 머리글을 차분히 읽으면서 넘겼다. 두어 권 넘기며 낭독하자 클라이드가 다치지 않은 팔을 가볍게 들었다.
“그만.”
“으음, 이렇게는 별 도움이 안 되려나요.”
“그게 아니라, 소리 내어 읽을 필요 없이 에디스가 처리해 줘.”
“……네?”
클라이드는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풍성하게 부푼 베개 가운데로 짙푸른 머리칼이 흩어졌다. 미닫이문을 새로 설치한 별실부터 가까운 서류 더미까지 눈길을 던지다가 마지막으로 에디스에게 돌아왔다.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은 아주 큰 의지가 되는 것 같아. 에디스에게 맡기면 아마 내 손으로 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결정하겠지. 그러니까 그냥 네가 해.”
“클라이드, 이건 최종 결재 문서예요. 여기에 사인하면 실제로 집행된다고요.”
“알아. 미안하게도 네게 또 야근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들고 있는 결재만 해 줄래? 내일 아침에 바로 처리해야 하는 부분이라서.”
무슨 일인지 클라이드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의사가 절대 안정하라고 했잖아요. 누워 있어야 해요.”
“잠깐만 저기 좀.”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사람을 부를까요?”
그가 어이없어하는 웃음과 함께 도로 등을 눕혔다.
“화장실도 혼자 못 갈 정도는 아니야. 팔 조금 스쳤을 뿐인걸.”
“어떻게 봐도 조금은 아니죠.”
“그럼 에디스가 도와줄래? 저 끝의 서랍에서 열쇠 좀 꺼내 줘.”
“열쇠?”
에디스는 그가 알려 주는 조작법에 따라 복잡한 구조의 서랍에서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안에 든 것은 열쇠함이었다. 일반적인 모양이 아니라 굉장히 특이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열쇠가 담겨 있었다.
“별실에 걸린 헬리어드 4세의 초상화를 살펴봐. 그 뒤에 금고가 있어. 비밀번호는 36, 21, 9. 우선 다이얼 번호를 맞추고 열쇠를 넣어.”
“이걸 왜 주는 거예요?”
“금고에 내 인장이 있어. 갖다가 편히 써. 에디스가 사인을 위조하게 둘 수는 없잖아.”
에디스는 눈을 굴리며 난감해했다. 이럴 줄은 몰랐다. 황태자가 결재해야 할 문서가 그녀의 손에 넘어올 줄은.
서류는 보통 사안의 경중에 따라 어떤 건 정무장관 선에서 결정하고 어떤 건 클라이드의 손까지 오게 된다. 그중에서 머리맡에 올려놓을 정도라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반드시 직접 확인하겠노라고 침실에 두라 한 내용일 텐데, 훌쩍 에디스에게 넘기다니.
“날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에디스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하지만 난 맨날 소지품도 흘리고 다니고, 실수도 잦고.”
“더 중요한 생각을 하느라고 그런 거잖아. 네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사소한 흠을 잡지.”
“클라이드가 기대하는 만큼 해내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 너무 열심히 하지만 말아 줘.”
멀리서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매 정각 황궁 앞 광장에서 타종하는 소리였다. 시계를 확인한 그는 베개 뒤의 쿠션을 기울여 몸을 편안히 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딱 맞춰서 불 끄자.”
그러면서 씨익 웃었다.
아련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를 믿는다는 신뢰의 말을 마구 쏟아 내더니, 이번에는 때맞춰 자야 한단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 잠자리에 들 시간이요?”
“평소랑 똑같이 말이야. 나는 환자니까.”
“하, 한 시간 남았는데요.”
클라이드는 부러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콧잔등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응, 수고.”
무한한 믿음의 눈빛이 원래 이리 얄미운 거였나. 잘생긴 눈을 확 손가락으로 찔러 주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그를 째려봤다.
그래 봤자 그에게 손끝 하나 댈 여지는 없었다. 왼 팔뚝에만 붕대를 감은 상태가 아니라 상처가 흔들리지 않도록 상체에 팔을 단단히 고정해 놨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급한 일 처리를 내팽개치느냐, 에디스가 대신해 주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그녀는 별실의 금고를 찾아 서둘러 잠긴 문을 열었다.
한눈에도 중요해 보이는 물건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고풍스럽게 색이 변한 각종 문서는 아마 나라의 운명과 직결될 만큼 중요한 것일 테지.
보물상자도 큼직하게 놓였다. 황궁에는 보물고가 따로 있는데, 거기에 두지도 못할 만큼 귀한 물건이 이 속에 담겼으려나?
여유 있게 금고를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클라이드가 불 끄겠다고 호언장담했으니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침실이 깜깜해질 게 분명하다.
“내 입이 재앙이지.”
왜 도와주겠다고 해서, 시험 전 벼락치기 같은 이런 상황을 만드는 건지.
“에디스, 뭐라고 했어?”
가벽 너머에서 그가 외쳤다.
“네, 아니에요.”
“보물상자 열어 봐도 돼.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내게 얘기해 줘.”
문서 검토에도 빠듯한 시간을 줬으면서 퍽이나 너그러운 척하시는 황태자 녀석이다. 보물 구경이나 할 틈이 어디 있으랴. 에디스는 스스로 불러온 봉변에 머리를 쥐어 싸매면서 서둘러 인장을 찾았다.
일단 책상에 앉자 침실과 별실은 평온이 내려앉았다.
착, 착,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드문드문 들렸다.
그녀는 결재 문서를 한 권씩 확인한 후 서명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황태자의 인장을 묵직하게 눌러 찍었다.
영 아니다 싶은 부분은 의견을 메모해서 끼운 뒤 결재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메모를 볼 실무진들은 아마 수발 시종의 입김이 어쩌고저쩌고하며 입방아를 찧어 대겠지만, 의견을 넣은 예가 처음도 아니라 웬만큼 떠들다가 넘어갈 것이다.
광장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열린 창을 넘어 들어왔다.
“다 끝났지?”
확신하는 말투와 함께 그가 어슬렁어슬렁 별실로 들어왔다. 꼼짝 말고 누워 있으라던 당부가 무색하리만치 클라이드는 뻔뻔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럴 거면 인장을 직접 꺼내 줄 것이지. 아예 일도 손수 하든가.
투덜투덜하면서도 에디스의 눈은 서류에서 떠나지 못했다.
“아직. 잠깐, 한 개만.”
“불 끌게. 천천히 해.”
저게 말이냐 당나귀냐. 옆에서 불을 끄고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천천히 해.
대꾸할 틈도 없이 우다다다 글을 훑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 겨우 인장을 찍었다. 별실의 조명이 거의 다 사그라들 즈음 에디스의 책상은 폭탄 맞은 듯 난장판이 되었다.
가지런히 넘길 여유도 없어 낱장으로 다 날아간 탓이었다. 하얀 종이에 둘러싸인 에디스는 아주 볼만한 모습이 되었다. 의자 등받이에 꾸깃하게 낀 종이와 팔꿈치에 깔려 잉크 얼룩이 번진 종이가 특히 엉망이었다.
가차 없는 클라이드의 움직임을 따라 책상 위의 촛대가 빛을 잃었다.
“아니, 진짜 잠깐만. 정리 좀요.”
“내버려 둬. 그런 건 다른 시종을 시킬게. 에디스의 똑똑한 손으로는 서류 정리하는 일 따위 안 해도 돼.”
“하지만 이건 일이라고 하기도 좀 그런데요.”
그냥 자신의 책상 정리도 못 하고 어질러 놓는 거지.
“어쨌든.”
그는 이렇게 다그치면서도 에디스의 뒤에 서서 의자를 빼 주는 매너는 또 챙겼다. 결국 대판 싸움이라도 벌인 듯한 분위기의 책상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