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49)화 (49/129)

49화

주변이 일순간 희미해졌다.

자신을 노리는 총구에서 불이 뿜어지는 장면을 본 것 같다.

아니다, 잘못 본 걸지도 몰라. 정오에 가깝도록 떠오른 태양이 광택 나는 금속을 반사했을지도.

눈이 시리도록 번뜩이는 섬광이 그녀의 눈을 찌를 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별로 없었다. 여기는 여전히 소설 속 세계니까, 명이 다하면 단지 책을 덮는 느낌과 똑같으리라는 망상을 했다.

“안 돼!”

현실감이 들지 않는 외침이 귀청을 때렸다.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덮쳤다.

퍼억, 강한 충격과 함께 에디스는 뒤로 넘어갔다. 마른 낙엽처럼 공중을 부유하는 감각이 생소했다.

청명한 하늘을 가린 클라이드의 그림자는 그 자체로 맹수였다. 너풀거리는 짙푸른 머리칼은 흑표범 같았고, 순식간에 들이닥친 속도는 치타에 버금갔다.

넉넉하게 두른 팔뚝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달려온 충격을 이기지 못해 그가 등을 맨땅에 긁었다. 어깨와 등을 지지직 끌면서 몇 야드나 굴렀다.

에디스는 잡힌 새처럼 그의 새장 안에서 몸을 눕혔다. 골이 띵하니 울렸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다급한 클라이드의 물음이 들리는 걸 보면 죽지는 않았나 보다. 그가 더듬더듬 에디스를 어루만져 살폈다.

“으으…….”

신음을 흘리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딱히 제 몸에 아픈 곳은 없는 듯한데 손바닥은 피범벅이었다.

“이 피는.”

그때 호위들이 달려왔다. 사위를 경계하면서 두 사람에게 달려들어 부상을 확인했다.

출혈의 위치는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클라이드가 한쪽 팔을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위쪽 팔뚝부터 붉은 피가 흘러 팔 전체를 적시고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많이 나요. 어떡해.”

에디스는 주저앉은 채 엉덩이를 밀어 그에게 다가갔다. 땅을 짚은 그녀의 손은 흙과 피가 뒤엉겨 있었다. 손 전체가 덜덜 떨렸다.

차마 그를 건드리지는 못하고, 피가 번지는 부상 부위를 부릅뜬 눈으로 살폈다.

근위대장에게 다친 팔을 내어 준 클라이드는 남은 한 손으로 그녀를 더듬었다.

“에디스는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클라이드가…….”

그는 살짝 미간을 좁혀 찡그렸다.

“참을 만해. 그냥 조금 긁힌 정도 같아.”

대장이 빠르게 지혈하면서 부상 상태도 살폈다. 허리 벨트를 끌러 팔에 동여맨 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응급처치를 하며 그가 아뢨다.

“전하,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습니다. 출혈량으로 미루어 꽤 깊은 상처로 보입니다.”

다른 호위와 시종들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둥글게 에워쌌다. 추가 공격이 이어질까 봐 인간 벽을 세웠다.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는 동안, 근처에 서 있던 어떤 사람의 배낭에서 총알이 박힌 자국을 찾아냈다. 클라이드를 스친 탄환이 그리로 가 박힌 것이다.

근위대장이 클라이드 앞에 부복했다.

“전하, 일단 의사에게 보이심이 좋을 듯합니다. 대회장에 대기해 있는 의사를 불러도 되겠습니까?”

“배후를 알기 힘든 의사에게 진료를 맡기기는 부담스럽군. 궁으로 돌아가 내 주치의에게 보이는 편이 나을 듯한데, 그대가 보기엔 어떤가?”

대장은 황실 근위대의 우두머리답게 응급상황이나 부상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황태자의 부상을 살피며 답했다.

“지금 상태만 보면 궁까지 버티실 수 있겠습니다.”

“그럼 안전을 확보하며 이만 돌아가자.”

“명 받듭니다. 이 자리까지 마차를 대령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호위 한 명이 광장 끝으로 급히 달려 나갔다.

부상 부위의 출혈이 좀체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깊이 다쳤길래 이 지경일까. 총상을 처음 보는 에디스는 옷에 뚫린 탄흔을 통해 꿀럭꿀럭 샘솟는 피를 볼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스친 거라잖아. 별거 아니야.”

클라이드가 얼룩이 묻은 제 손을 바지에 닦은 후 에디스의 뺨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별거 아니라니요. 이렇게나 심한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참으려 했지만 눈가에 고였던 물기가 투둑 흰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감정이 북받치자마자 자제할 여유도 없이, 금세 뺨에 굵은 눈물길이 만들어졌다.

그는 역력히 당황한 눈치였다. 멀쩡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홱 당겼다. 제 가슴팍에 끌어다 붙이고는 에디스를 절반쯤 감아 안은 채 날갯죽지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진정해. 별거 아니니까.”

짧은 순간에 벌어진 사건이지만 그녀는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클라이드가 왜 총에 맞았는지 모든 장면이 뇌리에 새겨졌다.

저격수는 분명 에디스를 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오발탄이 아니었다. 총구가 똑바로 그녀에게 향했고 정조준한 뒤 쏴 버렸다.

클라이드는 이곳에 올 예정이 아니었다. 무슨 충동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자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평범한 코트를 걸쳐서 남들 눈에 띄지 않았다. 황태자의 외형을 한눈에 알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정체를 알기 힘들었다.

만약 황태자가 여기에 있는 걸 저격수가 알았다면 누굴 노렸을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딱히 은원관계가 없는 그녀가 갑자기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니 궁의 알력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니, 노려지지 않은 그가 에디스를 감싸다가 다친 것이다.

아군보다 적군이 많은 황태자가 자신의 시종을 지킨 상황.

“왜 그랬어요. 다쳤잖아요, 클라이드.”

“네가 안 다쳤잖아. 총을 그대로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

“하지만…….”

울먹임이 절로 샜다. 찌그러진 입술 사이로 흐으흐으 못난 흐느낌이 흘렀다.

의젓한 모습으로 버티려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웬만하면 그와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는 느낌이었다. 담담하게 수발 시종으로서만 일하며, 폭풍과 같았던 그의 고백은 잘못 꾼 꿈처럼 여기려 했다.

무사히 폭풍을 이겨 내길 빌었다.

몰아치는 클라이드의 열정으로부터 벗어나길.

하지만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흐려진 판단력은 감정에 전부 좀먹힌 탓이었다.

두 사람을 촘촘히 둘러싼 호위와 시종 중에 우는 사람은 오직 에디스뿐이었다. 기분이 격해진 사람도, 클라이드의 부상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도 저 혼자였다.

“나 너무 바보 같아.”

자신을 향한 자괴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에디스가 왜 바보야?”

“혼자 질질 짜고…… 흑.”

전혀 시종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충분히 지혈되지 못한 팔뚝 앞에 머뭇거리는 손을 띄우며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피 흘리는 그의 모습을 제정신으로 눈 뜨고 봐 주기 힘들었다. 그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 현실이 괴로웠다. 내가 죽으면 고작 소설을 벗어나려나 싶었던 안일한 생각이 무색하리만치, 그가 흘리는 피는 붉고 진했다.

그녀의 등줄기를 꾹꾹 누르던 큰 손길이 느슨해졌다. 유연하게 어깨를 감싸는 온기가 따듯했다.

“그렇군. 맞아. 날 걱정해 주는 건 너밖에 없네.”

이 상황에서 그가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클라이드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다쳤다고 울어 주는 사람은…… 어딜 봐도 에디스뿐이야.”

격정이 몰아쳐 새빨갛게 붉어졌던 얼굴을 비벼 그를 바라봤다. 시야를 뿌옇게 흐리던 물기를 지우고 보니, 클라이드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부상 부위를 움직거리지도 못하고 끙끙대면서도 입은 느슨하게 벌어졌다. 눈매도 타원형으로 휘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 벽 중 한 명이 그녀를 흘끔거렸다. 경륜이 부족한 시종이 뒤돌아본 바람에 에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 그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혼자 엉엉 울었던 분위기가 뻘쭘해졌다.

변명거리를 급히 찾았다. 제가 클라이드에게 감정의 선을 넘지 않았다는 걸 전해야 했다.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음색에는 여전히 흐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궁에 돌아가면 클라이드를 걱정할 사람이 잔뜩 쌓여 있을 텐데요.”

때마침 구름 같은 인파를 헤치며 마차가 당도했다. 그는 호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피식 실소했다.

“가식적으로 눈물을 짜내는 사람은 제법 있겠지. 뒤에서는 회심의 미소를 띨 놈들 말이야.”

“아니에요. 클라이드 주변에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가 정곡을 찔러 물었다.

“누구? 한 명만 대 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계산 없이 클라이드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을 떠올려 보다가 결국 어떤 이름도 꺼내지 못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그는 에디스를 시야 안에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 보니 차라리 부상을 비밀로 하는 편이 낫겠어. 여기에 있는 자들만 입단속 시키면 돼.”

“어떻게 그래요. 이렇게나 많이 다쳤는데. 빡빡하게 짜인 일정을 소화해 내기 힘들 거예요.”

“상관없어.”

“클라이드…….”

“아픈 티를 내고 싶은 사람은 마침 곁에 있어 주니, 구태여 밖에 떠벌릴 필요는 없지. 아는 자가 많아질수록 나한테는 불리하니까.”

마차 앞에 서자 클라이드는 호위 대신에 에디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무게가 쏠리자 그녀는 힘껏 그를 지탱했다. 부축하는 모양새가 저절로 만들어졌다.

“다들 듣게. 이 일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돼. 궁에 도착하는 대로 비밀리에 의사만 들게 해.”

“예, 전하.”

그를 따르는 이들이 칼같이 대답했다. 이성을 흩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전원이 완벽히 사무적인 태도였다. 물론 황태자의 최측근으로서 이게 올바른 자세겠지만, 어쨌든 에디스와는 무척 달랐다.

저만치 먼 곳에서 호위 몇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 클라이드 앞에 고개를 숙이며 숨찬 말투로 보고했다.

“전하, 놓쳤습니다.”

“약간의 흔적이라도 못 찾았는가.”

“가장 흔한 머스킷 총을 들었고 키는 5에서 6피트 사이였습니다. 검은 무복을 위아래로 입은 보통 체격이었는데, 대회 참가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출구를 가로질러 도망갔습니다.”

“그거로는 어떤 특징도 잡을 수 없겠군.”

“황송합니다.”

보고하는 자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거듭 사죄했다. 총을 쏜 자를 쫓아갔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에디스도 당시를 되새겨 봤다. 불을 뿜던 총구는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그 뒤에서 눈매를 세웠던 남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총에 이목구비가 가려졌던 것 같다.

“나중에라도 보고할 내용이 생기면 곧바로 전하게.”

“예, 전하. 최대한 수색하겠습니다.”

에디스와 클라이드가 탄 마차가 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의 마차인지 모르는 일반인들은 아주 느리게 길을 터 줬다.

지걱거리는 흙 소리가 들리도록 지루하게 구르는 바퀴를 느끼며 그녀는 창문에 조금 틈을 내어 바깥을 내다봤다. 어딘가에 범인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눈에 닿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봐도 당최 알아볼 길이 없었다.

옆에 앉은 클라이드도 수시로 확인했다. 이제야 겨우 피가 멈추고 있었다.

그는 반대편 벽에 긴 상체를 구부려 기댔다가 영 불편했는지 에디스의 어깨에 의지했다. 평소와 달리 늘어진 머리칼 속으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