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고마워요…….”
지위를 따진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에디스는 작게 오물거리며 감사한 마음만을 전했다. 자리를 권하며 손을 내려 기다리는 클라이드의 태도가 완강해서였다.
다른 벤치에 어떤 가족이 옹기종기 앉아 휴식을 즐겼다. 부쩍 달라진 시장 풍경이 에디스의 눈길을 끌었다.
도시 정책에 관해서라면 그녀도 생각해 둔 게 많았다. 수도의 시장으로 여기만 있는 게 아니다. 우시장이나 말 시장, 수입품 시장도 있다. 그런 곳도 적은 투자 비용으로 최대한 활성화할 방안을 연구해 뒀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음도 심란해졌다.
정책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지금의 시종 업무가 싫으냐고 누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힘들 것 같았다.
제국을 위해 골몰하는 과정은 힘들면서도 확실히 보람이 있었다. 늦은 밤까지 코피를 쏟아 가며 내어놓은 의견서가 황태자의 칼이 되어 국정 회의에서 승리를 거둘 때는 묘한 쾌감까지 느꼈다.
공적으로 보면, ‘피의 숙청’이라는 미래를 피하기 위해 황궁에서 멀어질 계획을 짜는 동안 아쉬운 마음도 제법 들었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진 시절에는 열심히 살고 싶은 욕심 따위 없었지만, 시종 생활을 하며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클라이드와 귀족파와의 충돌을 막고 싶었다.
늘 일신의 안위가 먼저였던 그녀에게 미래를 바꾸고 싶은 의욕이 이제 막 새싹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게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적으로 따지면 클라이드의 마음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제 마음이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 시종으로 해야 할 역할보다 훨씬 문제였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매번 불편했다.
지금 깔고 앉은 황태자의 외투마저도 편치 못했다.
“하아…….”
역시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한 가지다. 황궁 생활을 접을 수밖에.
“무슨 한숨을 그리 깊이 쉬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 주면 좋겠어.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고, 혹여 내가 해결해 주지 못해도 공감할 수는 있잖아.”
에디스의 마음 가닥과는 정반대로 기대하고 있는 그를 마주하기가 버거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 * *
총사 대회의 날이 밝았다.
천문학자에게 날을 받아 가장 날씨가 좋은 때로 정했다. 다행히 푸른 하늘 아래로 청명한 바람이 부는 날 개회식을 열게 되었다.
이 세계의 천문학은 소설 설정상 굉장히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농사에도 두루 소용되며 점성술과도 맞물린 점이 많았다. 제국에서 믿어지는 신앙 중에서 천문 점성술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하늘에 축원하는 의식을 간략히 거친 후 경기가 시작됐다.
황족과 대귀족은 개회식만 마치고 뿔뿔이 흩어졌다. VIP 중에서 예선 경기를 일일이 관람하는 이는 없었다.
클라이드 역시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는 편이 나았다. 혼자 남아 구경했다가는 괜히 참가 선수의 부담이나 늘려 주게 될 터였다.
그래도 관람석 로얄 박스에서 괜히 뭉그적거리면서 시간을 끌었다.
“얼른 시작했으면 좋겠군.”
에디스를 대신해 황태자를 수행하는 시종이 곁에서 쩔쩔매며 답변했다.
“곧 1조가 출전할 겁니다.”
“에디스는 2조니까, 거기까지만 보고 일어나도 괜찮겠지?”
“지당하십니다. 전하의 뜻을 누가 거스르겠습니까.”
일찌감치 출전 신청해 뒀던 덕분에 순번이 앞이었다. 그는 예선이 신청 번호순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흘에 걸쳐 열리는 예선에서 그녀의 머리카락 끝도 못 볼 뻔했다.
에디스는 선수 대기석에 있었다.
눈치 없는 황태자님께서 이만 사라져 주지도 않고 예선전을 관람하려는 모습도 뻔히 다 봤다.
그가 지켜봐 줘서 심적으로 의지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격이 자신과의 싸움이다 보니 멘탈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수선한 현장에서 홀로 고요히 마음을 다스렸다.
선수 대기석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족히 수백 명은 넘었다. 오전 출전 선수만 이 정도고, 오후는 또 새로운 선수가 오게 되어 있었다.
힘을 쓰는 보병이면 남자, 여자와 알파, 오메가를 따로 취급하겠지만, 훗날 총병으로 쓰일 사격 선수들은 성별과 기질을 따지지 않고 한데 섞였다. 참가자 중에는 오메가도 많고 여성, 미성년자도 많았다.
그래서 아담한 체격의 에디스가 오도카니 의자에 앉아 있어도 그다지 별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2조가 불리자 에디스는 경기장으로 나갔다.
열 명이 나란히 서서 차례대로 쏘는 방식이었다. 참가 인원이 워낙 많아서 한 조의 인원수도 이렇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총을 쏘는 것보다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이 훨씬 오래 걸렸다. 진행 요원은 자기가 가진 명단과 선수의 참가 신청서를 일일이 비교하며 이름과 출신을 물어봤다. 기다리느라고 진이 다 빠질 때쯤에야 확인을 마쳤다.
각 선수의 뒤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따라붙었다. 형편이 안 되는 선수는 혼자 왔지만 대부분은 한 명쯤 따라왔다. 그들은 뒤에서 코치해 주기도 하고 물품을 들기도 했다.
에디스의 도우미는 새벽마다 그녀의 총을 챙겨 주는 자였다.
사격 준비 신호가 울리자 에디스는 묵묵히 장전된 총을 받아 들었다.
그녀만을 위해 모조리 수제로 만든 총이었다. 외형은 황실 총과 비슷하면서도 에디스에게 최적화해서 갖가지 사양을 맞췄다.
예선이라 그런지 선수들의 실력 차이가 컸다. 빗맞혀서 표적지에 총구의 흔적조차 없는 예도 있었다. 앞 순서의 어떤 선수는 자신의 과녁도 구분하지 못해 옆 과녁에 쏘기까지 했다.
드디어 긴 기다림 끝에 에디스의 사격 순서가 돌아왔다.
가늠자 너머로 목표물을 주시했다.
‘딴생각하지 말고 잘 쏘는 것에만 집중하랬지.’
호흡을 고른 후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에디스의 바로 다음 선수가 자기 차례가 오지 않았는데도 총을 쐈다. 총성 두 번이 겹쳐서 울렸다. 하마터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뻔했다.
설마 일부러 한 행동은 아니겠지? 옆 선수를 흘끔 보니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내였다.
다행히 에디스의 것은 정중앙의 10점에 안착했다.
모두 열 발을 쏴야 하는 시합에서 그녀의 뒷번호 선수는 연달아 실수했다. 정신 사납게 발을 구르는가 하면 에디스가 쏴야 할 차례에 제가 먼저 총구를 올리려 할 때도 있었다.
진행 요원이 제지한 바람에 무마되긴 했지만, 덕분에 에디스도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최종 점수가 평소만큼은 되지 못했다.
‘의외의 복병이 있었네.’
어깨가 축 처져서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도 점수로만 따지면 상위권이었다. 예선은 무사히 통과였다.
그녀를 방해한 선수도 아슬아슬한 점수로 통과인 듯싶었다. 본선은 추첨으로 순서를 정한다고 했으니 다음에도 그자의 옆에 설 확률은 매우 낮았다.
합격 통지서를 받으러 가는 길에 경기를 끝낸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잡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관심을 두지 않고 경기장 뒷길로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만, 에디스는 일부러 걸음을 느리게 하며 주변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말을 걸 만한 사람이 눈에 띄면 접근해 볼 심산으로 공연히 어슬렁거렸다.
체격이 좀 있는 아주머니가 합격 통지서 줄에 서길래, 에디스도 뒤따라 섰다.
“어머, 합격하셨나 봐요. 축하해요.”
평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기운차게 뒤를 돌아봤다. 에디스의 옷차림을 훑더니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웬일로 귀족 아가씨도 참가하셨네요. 합격 축하해요.”
“감사해요. 취미로 사격을 즐겨서요.”
“나는 남편이 총을 갖고 있어서요. 도움을 받아서 연습했지요.”
에디스는 공작 지위며 황실 시종 같은 제 신분을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아주머니로부터 총사 대회에 참가하는 자들의 분위기를 읽고 싶어서 일부러 공대했다.
“지금 끝마치고 나왔으면 아주머니도 2조였겠네요. 나도 2조였는데.”
“네, 2조요.”
“생각보다 힘들었죠?”
“아유, 말 마요. 어중이떠중이도 무턱대고 신청했다더니 그게 진짜였나 봐요.”
“맞아요! 정말로…….”
“딴 과녁에 쏜 사람이 제일 최악이었고, 옆 사람을 방해한 사람도 형편없었어요. 그렇게 실력이 떨어지면 아예 참가하지 말았어야지.”
“예선전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 방해꾼 때문에 나까지도 신경 쓰였다니까요. 진짜 쓰레기야.”
아주머니처럼 틈틈이 연습해서 참가한 선수의 생각을 들은 건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듣자 하니,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에디스의 옆에 섰던 선수처럼 상태가 심각한 사람은 드물었다.
이번 경험을 약간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된통 운이 나빴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작전일 가능성도 있었다.
에디스는 경기장 외부로 나왔다. 안쪽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광장만큼 널찍한 공간에 북적이고 있었다.
대기실이 선수로 가득한 만큼이나 그들의 일행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대체로 가족으로 보이는 무리였다. 흔히들 경기에서 쓴 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고, 땅바닥에 장비 상자를 내려놓고 정리하는 자도 있었다.
그녀를 마중 나온 시종들 역시 저만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궁인들 틈에 섞여 클라이드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모자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기는 했지만 특유의 길쭉한 체형과 넓은 어깨가 영락없이 클라이드였다.
‘황태자 씨,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기다리는 거야.’
한편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히 다른 한편의 마음이 뿌듯했다.
넘쳐나는 인파를 헤치며 그녀는 자신의 무리를 향해 움직였다.
선수와 가족들은 각자 대회를 즐기기에 여념 없었다. 시끌벅적하게 움직이며 같은 무리끼리 원을 만들어 떠들어 댔다. 곁을 지나가는 에디스의 어깨를 툭 치고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방이 노점 시장보다 시끄러웠다. 총기류가 온 군데에 널렸고 철컹거리는 소리도 흔하디흔했다.
그녀는 클라이드를 바라보며 난장판을 가로질렀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을 속으로 흉보며 동시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수많은 총 중에, 문득 에디스를 향해 겨냥한 총을 발견했다.
똑바로 수평을 이룬 총신과 그 끝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불길한 기척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섬찟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었다.
총구가 동그랗게 보였다.
기다란 총 너머의 사내가 정확히 에디스를 조준했다.
“뭐지?”
혼잣말하며 멈칫 제자리에 섰다. 놀란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저자가 단순히 총을 손질하려 하는 게 아니라면 잠시 후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현실 같지 않은 상황에 멍청히 팔다리를 늘어뜨렸다.
우선 피해야지. 아마도 착각한 거겠지만 그래도 안전은 중요하니까.
찰나에 이런 행동과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상황은 단 한 순간에 불과했다. 에디스의 발에 차인 작은 돌멩이가 땅에 떨어진 시간만큼이나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