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마차 안에서 외투를 갈아입은 클라이드는 황태자가 아닌 일반인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제법 많은 수의 호위병이 기척을 숨긴 채 따라오긴 하지만, 그의 곁을 채운 시종은 에디스뿐이었다.
둘은 타인의 이목이 쏠리지 않은 가운데 호젓하게 거리를 걸었다. 생업에 바쁜 장사꾼들은 그들을 단순히 시장 구경을 나온 손님으로만 보는 듯했다.
옷가게, 레스토랑, 찻집 같은 건물이 늘어선 상설 시장을 지나자 가판을 깐 노점 시장이 나타났다. 궁에서 고용한 인부들이 곳곳에 차양막을 설치하고 있었다. 더불어 구획을 정리하는 칸막이도 만들었다.
거리 축제를 기점으로 해 노점 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발하는 공사였다.
자잘한 생활용품을 파는 아주머니가 일꾼에게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천장에 틈이 벌어졌잖아요. 꼼꼼히 좀 메꿔 주세요.”
투덜거리면서도 아주머니의 안색은 확연히 밝았다.
이곳은 여름이면 내리쬐는 땡볕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공간이다. 눈비가 올 때면 상인들은 제 몸보다 물건이 젖을세라 방수포를 덮기에 바빴다.
머릿수건 아래로 까맣게 탄 얼굴의 아주머니는 가판 위에 지붕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디가 구멍 났는데요. 내 신경 써서 하노라고 했는데.”
인부가 사다리를 대고 올라가자 장사꾼 아주머니는 갑자기 살가워진 말투로 나무판자 틈을 가리켰다.
“여기요. 제가 아래에서 봐 드릴게요.”
인부와 시장 상인들은 혼잡하고 정돈되지 않았던 노점 거리가 말끔해지고 있는 상황을 함께 기꺼워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황실에서 돈 좀 제대로 쓰고 있다며 추어주는 말도 종종 들렸다. 딱히 황태자가 시찰 나왔다는 걸 알아채서가 아니었다. 나라님을 칭송하는 얘기들이 흔히 떠돌았다.
에디스는 물건을 구경하는 척하며 거리를 걸었다. 태평스레 좌우를 둘러보다가 은근히 미소 짓는 클라이드를 발견했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겨우 참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여요.”
그는 입가를 손등으로 가리며 표정을 숨기려 노력했다.
“이만큼 오기까지 5년이나 걸렸어. 축제를 열고 싶어도 열 수 없던 시기였지.”
“5년이요? 어느 시절부터 셈한 건데요?”
“폐하께서 못 일어나시게 된 후부터…….”
말꼬리를 흐리는 클라이드에게서 그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좋아서 뭉근히 웃다가, 잠시 후에는 회한이 담긴 눈빛으로 또드락또드락 망치질하는 시장통을 멀리 내다봤다.
그 시점으로 말하자면 에디스도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황제에게 독살 시도가 벌어진 뒤 클라이드가 황실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성년도 되지 못하는 나이에 황제를 대행하며 기세등등한 권신에 맞서 싸웠다.
“힘들었겠어요. 클라이드 혼자 싸우기가.”
이전 황태자였던 누나의 장례식에서는 그가 오열하다가 끝내 정신을 잃었다고 들었다.
“지나고 나니 아쉬운 점이 많지. 내가 황실을 책임지던 초반에는 너무 많이 이권을 빼앗겨서 말이야.”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언쟁하는 일이 잦기는 하지만, 무작정 손해 보는 결정은 잘 없던데요.”
“에디스 덕분이 커. 네가 함께한 이후로 권신들과 싸움에서 승률이 높아졌거든.”
“공연히 띄워 주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클라이드의 힘인걸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당치 않다는 듯 확신에 찬 몸짓이었다.
“내가 그리 대단해 보여?”
“네?”
“굉장히 모자란 황태자인걸. 에디스라도 날 잘 봐주니까 고맙군.”
“클라이드를 모자라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야 속으로만 생각할 테니까. 실제로는 엉망이야. 넘어야 할 산이 많지.”
둘이 걷는 거리는 어수선했다. 한쪽으로는 장사판이 깔려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행인이 에디스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약간 비틀거리자 클라이드는 그녀를 당겨 손을 잡았다.
바짝 붙어서 나란히 걷는 그들은 누가 봐도 연인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얘기를 나눴다. 고개를 기울인 모습도 지극히 다정해 보였다. 하지만 대화 내용은 사뭇 진지했다.
“내 나라 사람들한테 밥 한 끼 먹이기가 5년이 걸렸다고.”
짧은 한숨과 함께 그가 속내에 숨겨 둔 감상을 털어놨다. 지난 세월이 무척 힘들었노라고, 한숨이 말하고 있었다.
노점 시장 중심부의 사거리로 접어들자 먹거리를 파는 가게가 부쩍 많아졌다. 먹음직스럽게 눈에 띄는 음식도 있었다.
에디스는 가판대로 걸음을 서둘렀다.
고기 완자를 꼬치에 끼워 구운 것을 냉큼 집어 들었다. 골고루 양념을 발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참 맛깔스러워 보였다.
“클라이드도 하나 먹어요.”
“그럴까?”
회한과 즐거움이 묘하게 섞인 분위기 속에서 거리낌 없이 길거리 음식에 손을 댔다. 클라이드는 단맛이 강한 꼬치, 에디스는 짠맛이 강한 꼬치를 나란히 들었다.
한입씩 하던 중 뜨거운 완자에 녹진해진 양념이 그녀의 옷소매로 떨어졌다.
“앗”
클라이드가 재빨리 손수건을 꺼냈다.
“잠깐만.”
소매에 흐르는 양념을 닦아 주는 손길이 세심했다. 열기가 피부에 닿지 않도록 지그시 쥐어 잡아 얼룩을 없앴다.
에디스가 입은 옷보다 손수건이 더 값져 보였다. 조금 쑥스럽지만 그의 성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이제 된 것 같아요.”
“꼬치 이리 줘. 내가 들게.”
“아니에요.”
“아냐, 이리 줘. 에디스는 먹고 싶을 때 입만 벌려.”
부득부득 꼬치를 받아 가더니 제 것까지 합쳐서 한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식사 시중을 드는 궁인처럼 에디스의 입을 세심히 쳐다봤다. 입이 비워지면 곧바로 꼬치를 내밀 기세였다.
“클라이드, 꼬치를 드는 것쯤은 내 손으로 할 줄 아는데요.”
“누가 뭐래. 너한테 조금 빈틈이 생긴 걸 비집고 들어가려는 중이지.”
“빈틈이라니요?”
갑자기 그가 훅 치고 들어온다.
“응? 별 뜻 없이 한 말이야. 깊이 신경 쓰지 마.”
때마침 클라이드는 영리하게 완자 두 덩어리를 한꺼번에 제 입에 밀어 넣었다. 먹느라고 아무 얘기도 할 수 없게 된 탓에 그녀가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다 보니 에디스는 점차 난감해지는 심경을 드러낼 수 없었다.
사실은 이쯤 해서 시종직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히려 했었다.
몇 주간 계속되는 축제 이후에 궁을 나오려면 미리 사의를 밝혀 둬야 했다. 대략 오늘쯤 얘기하면 적당할 것 같았다.
음식 나누기 행사가 때마침 겹친 탓에, 이 일만 끝내고 궁으로 돌아가면 조용히 자신의 의사를 밝히려 했다.
하지만 웬걸. 클라이드가 저를 보는 시선은 갈수록 다정해졌다. 작별을 고하기보다는 사귀자는 얘기를 하기가 수월하도록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차마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유감스럽지만 시종직을 그만두려고 하는데요.’
이 얘기를 혼잣말로 반복해서 연습해 왔다. 그의 앞에 서면 입이 잘 떨어지지 않을 듯해서였다.
예상대로 말머리를 시작하는 것부터 난항이었다.
클라이드는 강렬한 황금안을 빛내며 감격을 표현하고 있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축제를 열게 된 게 어떤 의미인지 에디스에게 털어놓기까지 했다. 소수 귀족만이 원하는 화려한 연회가 아니라, 시민이 즐기고 황실이 권위를 세울 잔치였다.
이 기분을 깨는 짓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클라이드.”
그는 다 먹은 꼬치 가닥을 치우고 에디스의 입가를 꼼꼼히 닦아 줬다.
“응? 왜.”
“…….”
“왜?”
“아니에요. 다른 데도 돌아볼까요?”
두 사람은 근처의 음식 가판대에서 튀김도 먹고 과일로 입가심도 했다. 마무리로 음료를 한 잔씩 빨며 디저트용 과자를 사 먹었다.
음식 나누기 행사로 축제가 이제 막 시작한 덕분에 도시 전체에 들뜬 분위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에디스는 이전에도 이 노점 시장에 종종 와 본 적이 있었다. 어두워지면 램프를 켜고 장사하는 가게가 있는가 하면, 촛불 값만큼도 벌지 못해 철수하는 가게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의 모든 가게가 불을 밝혔다. 그만큼 수지가 맞는다는 뜻이다.
“온 도시가 전부 환한 것 같아요.”
“그렇지? 축제 덕분에 사람들 살림살이도 나아졌으면 좋겠군.”
물건값을 흥정하는 손님들, 간식거리를 들고 지나가는 이들, 야시장의 화려함에 신이 난 아이들.
이런 틈에서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에디스 혼자뿐인 것 같았다.
“클라이드.”
“왜 자꾸 불러. 할 말이라도 있어?”
클라이드의 눈빛이 열띠게 빛났다. 머뭇거리며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이 아마도 굉장히 좋은 내용이리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떠나가겠다는 게 아니라, 당신의 곁에 있겠다고 얘기하길 바라는 게 아닐까.
결국 에디스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금은 타이밍이 너무 나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얘기해야겠어. 사직서를 써서 내밀면 좀 나으려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난 늘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얘기해도 돼.”
“…….”
“그보다 저기에 설치 중인 쉼터는 어때 보여? 쓸 만할 것 같나?”
머뭇머뭇하면서 어려워하는 그녀를 위해 클라이드가 부러 화제를 돌렸다.
노점 시장 한가운데의 교차로에 벤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원래는 붉은 먼지가 날리는 흙바닥 길이었다. 행인이 많이 밟고 지나가서 딱딱하게 다져진 곳이었는데, 이젠 시장 구경하다가 쉬기 좋도록 크기도 넉넉한 벤치가 여럿 들어섰다.
에디스는 말 못 한 사정은 속으로 눌러 두고 일부러 분위기를 밝게 바꿨다. 사뿐히 걸음을 옮겨 벤치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바닥에 흙 대신 작은 자갈까지 깔아서 걸을 때마다 달그락 소리가 났다.
“엄청나게 근사해졌어요. 황량했던 노점 시장이 맞나 싶을 만큼요.”
“내 눈에도 괜찮아 보이는군. 시장에 설비를 갖추기로 해 놓고 설계도를 직접 보지는 못했거든.”
“에이, 설계도까지 챙겨 보시면 좀 너무하죠. 그 정도는 실무자급에서 알아서 하도록 놔두는 편이 현명한 주군의 태도가 아니겠나요.”
“그래서 궁금해도 참았잖아.”
갓 제작한 벤치는 사포질이 덜 되어서 거친 부분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되도록 멀쩡한 자리를 고른 후 조심스레 앉아 봤다. 하지만 영 표면이 매끈하지 않았다.
클라이드가 제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손수건은 아까 입 닦을 때 써 버려서 깨끗하지 못했다.
대신에 외투를 벗었다. 옷깃을 툭툭 털며 먼지가 없는지 확인한 다음 그녀가 앉을 자리에 말끔히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