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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46)화 (46/129)

46화

‘내가 사라지면 클라이드와 아드리안이 원작대로 연결되려나.’

가능하면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두 남자가 다 괜찮고 좋을 사람이니.

당사자가 들으면 기함하겠지만,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좀 치사하지만, 어쨌든 기분은 그랬다.

클라이드는 알게 모르게 그녀를 설레게 했다. 아드리안은 정말 아름다운 친구였다. 감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소설 속 에디스의 운명을 걸 만큼 온 마음을 다 빼앗기지는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게 해피엔딩의 미래가 기다리길 기도했다.

* * *

황실 주관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며칠의 휴가를 마친 후 에디스는 황궁이 아니라 시내로 출근했다. 화려한 번화가의 뒷길에 숨겨진 빈민굴이었다. 귀족이 즐길 연회와 황권을 강화할 총사 대회에 앞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행사를 먼저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널찍한 공터에 궁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나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커다란 솥 가득히 수프가 끓었다. 군인까지 동원되어 수레에 빵과 고기를 실어 날랐다.

에디스는 배식 테이블을 기웃거렸다. 그곳은 점심시간에 맞춰 음식을 나눠 주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황태자 궁에서 나온 궁인들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이쪽이에요, 케츠모리스 경.”

곧바로 앞치마가 배급되었다. 어수선한 현장에서 인사치레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등 떠밀려서 배식대 앞에 섰다. 빵을 나눠 주는 자리로서 배식할 음식 중 가장 쉬웠다. 에디스에게 무거운 음식 통을 들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질과 걸레질을 시키지도 않았다.

그녀와 친한 시종이 옆에 국자를 들고 서서 장난스럽게 한마디 했다.

“빵 나눠 주는 건 실수 안 할 거지?”

“뭐? 날 뭐로 보고.”

“제대로 보니까 하는 말 아니냐. 네 머리는 한쪽으로만 발달해 있다고 다들 그러잖아.”

“아니거든. 고작 접시에 빵 한 개씩 얹는 걸 못 할까 봐.”

“아무렴. 잘할 수 있을 거야.”

배식을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자 클라이드도 나타났다. 공터를 두루 둘러보더니 에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다가오는 황태자에게 모든 이의 이목이 쏠렸다.

“에디스, 여기 있었군.”

“오셨습니까, 전하.”

“괜찮겠어?”

“네?”

“무리해서 배식하지 말고, 나랑 같이 시찰을 돌아다니는 건 어때.”

에디스는 거대한 빵 바구니의 테두리를 불끈 쥐었다. 이 사람들,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지? 남부럽지 않게 똑똑한 캐릭터인데 어쩌다가 이런 이미지가 생겼나.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전하의 시찰을 수행하라는 명을 내리시지 않는다면, 전 여기에서 일하겠습니다.”

빈민가에 음식을 나눠 주는 행사는 도시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클라이드는 두루 돌아다니며 배급소가 무탈하게 운영되는지 확인해야 했다.

원래 그는 에디스도 시찰하는 데 따라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황태자로서 대중에게 얼굴을 비쳐야 하는지라, 수행하는 자들도 실무 위주가 아니라 유명세를 우선해야 했다.

저만치에서 적당히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황태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소위 이름값이 높은 귀족들이었다. 남의 속을 긁기를 즐기는 디트리안 백작의 반 대머리가 흘끗 보였다.

에디스는 시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아직 손댈 필요도 없는 빵들을 뒤적거렸다.

“어서 다녀오시지요, 전하. 디트리안 경이 기다리지 않습니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가 제자리를 맴돌았다. 괜히 멀쩡한 접시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뜸을 들였다.

“사람들은 케츠모리스 가의 새로운 공작을 보고 싶어 할지도 몰라. 지위로 따져도 백작보다야 공작이지.”

“그럴 리가요. 우리 집이 망했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기어코 배식대에 버티고 선 채 클라이드에게 어서 가라며 눈짓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곳에 남은 이유가 단지 귀족파 인사들과 함께 배급소 시찰을 다니기가 껄끄러워서만은 아니었다. 그자들이야 어차피 수시로 마주쳐야 하니 새삼스레 피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되도록 클라이드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이번 축제가 끝나면 시종직을 관둘 셈이었다.

마음이 멀어져야 하는 만큼 물리적인 거리도 미리 확보해 두는 편이 나았다.

배식을 시작하는 종이 울리자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때부터 에디스는 정신없이 빵만 나눠 줬다.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사람들 탓에 잠깐의 여유도 없이 손을 놀려야 했다.

며칠 전에 시간과 장소를 공개한 덕분에 멀리에서 찾아온 사람도 많았다. 공터는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 찼다.

빈곤에 지친 사람들은 이 기회에 되도록 넉넉히 배를 채우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대부분이 접시와 그릇이 넘치도록 받아 갔다.

1인당 한 번 식사를 받아먹는 게 원칙이었다. 중복해서 타 먹는 사람이 없도록 배식대를 지난 자는 손등에 잉크가 발라졌다.

이 규칙 때문에 걸음마를 하는 아기까지 줄을 섰다. 에디스의 앞에 접시를 혼자 들지도 못하는 아이가 엄마 손에 이끌려 왔다.

“주때여.”

이런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혀 짧은 소리로 아기가 명랑하게 외쳤다.

“아가, 너무 귀엽구나.”

빵을 주자마자 덥석 물어서 볼이 빵빵해진 아기는 세상을 다 가진 양 환히 웃었다. 손도 꼬질꼬질하고 옷도 지저분하지만 엄청나게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하나 더 줄까?”

“네!”

접시에 빵을 더 얹어 주려는데, 옆에서 수프를 배식하는 친구 시종이 기겁했다.

“안 돼, 에디스.”

“왜? 빵 하나쯤이야 뭐 어때서.”

“저기 봐봐. 이 애한테 하나 더 주면 다른 사람도 줘야 할걸.”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이 퀭한 눈매로 에디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혹여 더 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빵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다. 공터에 찾아올 사람 수를 예측해서 수프, 고기와 함께 분량을 맞췄다. 전원에게 두 개씩을 주면 당연히 나중에 오는 사람이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빵 몇 개쯤은 여유가 있으리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더니, 분위기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아기는 잔뜩 기대한 채 꼬물꼬물 손을 내밀었다. 에디스가 주겠다고 먼저 말해 버렸으니 인제 와 취소했다가는 애가 울지도 몰랐다.

뒷줄이 밀고 들어왔다. 당장 아기에게 줄지 말지를 정해야 했다.

“그러면 내 점심을 줄게.”

에디스는 남들도 듣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내 빵이야. 아가, 맛있게 먹으렴.”

순발력을 발휘한 덕분에 잠시 썰렁했던 배식대의 상황이 무마될 수 있었다. 신이 난 아기가 빵 하나는 입에 물고 하나는 손에 꼭 쥔 채 가는 모습이 깜찍했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깨달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빈민 구제란 마냥 동정심만 넘쳐서는 해내기 어려운 일 같았다. 누군가가 불만을 품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두루 배를 불리고 만족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사업을 약간 고민한 적이 있었다. 클라이드가 차곡차곡 책장에 꽂아 둔 문서 중 이와 비슷한 제안이 있어서 읽어 봤더랬다. 제안서에는 요즘 빈민에게서 시급한 것이 식생활이며 그다음이 보건이라고 했다. 더불어 일자리도 아주 중요하다고 쓰여 있었다.

빈민 구제 사업은 실행된 적이 거의 없었다. 늘 다른 사안에 치여 미루다가 폐기되곤 했다. 빵과 고기를 배식하는 게 사업까지는 가지 못하지만, 이것만도 얼마나 오랜만인지 황실 역사서를 들춰 봐야 할 정도였다.

클라이드는 이번 행사를 축제의 시작이라고 선언했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모두가 즐길 축제를 마련하자는 뜻이었다.

이 행사를 치르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예산을 들먹이는 귀족파와 클라이드가 엄청나게 싸웠다.

“다들 맛있게 먹는구나. 보기 좋네.”

거의 배식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에디스는 진이 다 빠진 채 공터를 둘러봤다. 줄이 여전히 길었다. 뒤늦게 줄을 선 사람 중 마지막은 아마 음식을 받지 못할 듯했다.

“에디스, 배고프지?”

대충 끼니를 때운 친구 시종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배고파. 하지만 약속을 어길 수는 없잖아.”

남들이 지켜보든 말든, 제 입으로 아이에게 한 말은 지키고 싶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음식이 동났다. 때맞춰 클라이드 일행도 돌아왔다. 시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지친 티가 역력했다.

에디스는 뒷정리까지 도우려 했는데 궁인들이 말렸다. 공터 건너편에서 클라이드가 서슬 퍼렇게 지켜보고 있어서였다. 어서 황태자의 시중을 들러 가라며 옆구리를 찔리는 바람에 그녀는 먼저 앞치마를 풀어야 했다.

수행했던 귀족들은 떼어 두고 혼자 돌아온 클라이드는 팔짱을 낀 채 그녀가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음식 냄새가 가시지 않은 꼬질꼬질한 차림으로 그의 곁에 섰다.

“얼굴색이 왜 그래?”

대뜸 그가 물었다.

“제가 뭘요?”

“힘들었어?”

“할 만했어요. 남들 다 하는 일인걸요.”

“점심은 제때 챙겨 먹었겠지?”

“……그럭저럭요.”

“그게 무슨 뜻이야. 뭐 먹었는데.”

안색이 평소와 달라 보이나? 배식대에 온종일 서서 음식을 나눠주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에 딱히 제 얼굴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으음, 배급용 식사를…….”

“여태 굶었나 보군.”

어떻게 알았지. 눈치가 대단하다. 그녀는 거짓말을 담던 입을 오므릴 수밖에 없었다.

마뜩잖게 턱을 치켜든 클라이드가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당장 식사를 준비시키려는 눈치였다. 행사를 마감하느라고 분주한 궁인을 부르려는 걸 보고 에디스는 급히 말을 붙였다.

“전하, 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하루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그럴 리가 있나. 오동통하게 살이 많은 뺨은 어지간해서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다들 마무리하느라고 바쁘니까, 제 앞가림은 제가 할게요.”

그는 에디스의 뺨에 손을 올리려다가, 보는 눈이 많아 도중에 멈칫했다. 어중간하게 띄워졌던 손을 주먹 쥐어 아쉽게 제자리로 돌렸다.

“그럼 서둘러 궁으로 돌아갈까?”

“전하께서 확인하실 곳은 다 둘러보셨나요?”

행여나 스케줄을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제게 밥 먹이겠노라고 환궁하려 하면, 그런 행동은 사절이었다. 안 그래도 클라이드의 마음이 부담스러운데 고작 한 끼 식사로 실랑이하기는 싫었다.

“거의 끝났어.”

말투가 어째 자신이 둘러대던 뉘앙스와 비슷했다.

“정말요?”

“오늘의 중점 사업은 음식 나누기였으니,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나오도록 하지.”

“그 나머지로 어딜 시찰하려 하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클라이드는 마차를 준비시키며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아무래도 직접 듣기는 힘들겠다.

황태자의 일정이 그녀의 머릿속에 길디긴 표로 그려졌다. 일단 시내 여러 군데에 차린 배식소를 돌보는 게 우선이고, 그다음으로는 한창 설비를 갖추고 있는 노점 시장을 살펴봐야 했다.

“아, 노점 시장.”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일어섰다.

“에디스.”

“거기 가시려던 거 맞죠?”

“시장은 오늘이 아니어도 돼. 거리 축제는 며칠 후부터 시작이고, 지금쯤은 한창 공사 중이겠지.”

“그리고 전하께선 공사가 무탈하게 이루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으시고요.”

에디스는 황태자를 수행하는 시종의 모습으로 쫄래쫄래 그의 뒤를 따랐다. 마차 앞에서는 먼저 목소리를 키워 행선지를 알렸다.

“전하께서 노점 시장에 가자고 하십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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