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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45)화 (45/129)

45화

한쪽으로 기울어진 포즈가 상당히 불편했다. 에디스는 팔꿈치를 소파 쿠션에 고인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고인 팔꿈치에 차마 힘을 빼지 못했다. 이 이상 간격이 좁아지면 곤란하다.

“아티, 우선 손부터 풀어 줄래?”

아드리안은 등 뒤로 감은 손을 단단히 깍지 끼고 있었다. 누운 채 무릎도 굽혔다. 올가미와 비슷하게 에디스가 빠져나갈 여지가 없었다.

긴 속눈썹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물기가 촉촉이 배었다. 잠과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던 상황이 차라리 대하기 편했을 만큼, 아드리안은 완연히 깊어진 눈빛으로 그녀를 몽롱하게 바라봤다.

“에디스.”

“이제야 깼구나.”

“기다렸어.”

“웬 술을 이렇게 마셨어.”

“궁에서……. 전하와 함께 만찬을 가졌거든.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자꾸 권하더라. 사양하기 힘든 분위기라 어쩔 수 없었어.”

부정확한 발음으로 나른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위험한 유혹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맑은 음성에 얹어 또박또박 이야기를 건넬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가 온몸으로 갈구하는 바람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아드리안과 친구 이상으로 진도가 나가면 어떻게 될까? 가상의 시나리오가 저절로 섬광처럼 떠올랐다.

어딘가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상관없잖아. 아드리안과 사귀고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거야.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제가 어떻게 절세 미남을 얻었는지, 참석하는 파티마다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게 될 거야. 질투의 시선이 늘 따라다니겠지만, 익숙해지면 담담하게 받아들일 날도 오겠지.

영원히 사교계의 중심에서 살아야 할 날도 고려해야 해. 자신의 계획은 급한 빚 문제를 해결한 후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지만, 아드리안은 수도를 중심으로 사업을 벌여야 하니 외곽으로 벗어날 일이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안은 아름답잖아. 눈곱만큼의 여지만 줘도 그는 분명히 손을 내밀 거야.’

악마의 목소리가 이젠 본격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정말 이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는가. 좋아서 그 손을 잡고 싶은가에 관해 질문을 받는다면, 에디스는 선뜻 긍정하기 힘들 것 같았다.

‘아름다움이 탐나는 게 더 정확한 내 감정이려나.’

빤히 아드리안을 쳐다보며 갈등하는 동안 아이리스꽃 색 눈썹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얼굴은 저절로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런 죄 많은 남자 같으니라고.

에디스는 흑심이 뭉게뭉게 피어났던 머릿속을 재빨리 털어 내며 마음을 추슬렀다.

“아티, 우선은 그만 일어나자. 이 팔부터 좀.”

굳게 잠긴 팔뚝을 그에게 눈짓했다.

잔잔하게 깔렸던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의 상태를 깨달은 아드리안은 뒤늦게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여전히 그의 숨이 몽롱했다. 하지만 끌어안은 팔은 풀리지 않았다.

“어쩐지……. 잠결에 기분이 너무 좋더라.”

도리어 힘이 더해졌다. 그녀의 가슴이 아래 방향으로 푹 짓눌렸다.

“아티.”

턱을 아드리안의 턱에 찧고 말았다. 팔꿈치를 짚어 나름대로 간격을 벌리려고 노력했건만 거의 소용없었다. 힘없이 미끄러진 팔꿈치는 도리어 그의 머리 좌우를 감싸게 되었다.

“에디스, 내가 왜 왔는지 안 물어봐?”

“왜 왔는데?”

그가 먼저 말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고운 눈 아래 살을 도톰하게 접으며, 눈빛만으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무작정 왔어.”

“그럼 어떡해. 괜히 바람맞게 되는 거잖아.”

“네가 멀리 다녀올 일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턱대고 들렀어. 못 만날 수 있는데도 그냥.”

“아티…….”

“만찬이 끝날 때는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되어 실려서 나왔거든. 빅토르 백작이 아주 나를 잡으려고 작정을 했더라고. 클라이드 전하께서 말려도 막무가내더라.”

“또 그 패거리들이야?”

이건 어린애들이 패싸움하면서 상대편을 깎아내리려는 행동이나 똑같다. 억지로 술을 먹인 후 흐트러진 모습을 흉보려는 의도겠지.

종잇장처럼 얄팍한 목적을 감추지도 않고 허튼 짓거리나 하는 자들이 이 나라의 귀족이라니. 에디스는 가문과 세력을 등에 업고 날뛰는 양아치들을 속으로 된통 욕했다.

“근데 비몽사몽간에 에디스의 집으로 마차를 돌렸어.”

아드리안의 말이 점점 더 느려졌다. 숨소리가 길게 늘어지며 그녀의 목덜미에 뜨뜻한 열기를 남겼다.

“보고 싶었나 봐.”

끝내 그는 팔을 풀어 주지 않았다. 더는 지탱하지 못하는 에디스의 고개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겉옷을 벗어 놓고 얇은 실크 셔츠만 걸친 가슴은 달아오른 체온을 고스란히 외부로 방출했다. 유난히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도.

납작하게 눌린 뺨에 그의 상태가 오롯이 느껴졌다.

가슴으로 말소리가 전해졌다.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울림이다.

“보고 싶었어.”

마지막 말꼬리가 길게 늘어질 때, 아드리안의 맥박이 바위처럼 쿵 내려앉았다. 위태로운 소리가 실감 나게 그녀의 귀에 깊이 꽂혔다.

고장 난 시계처럼 아드리안은 그 상태로 멈춰 버렸다.

여전히 달궈져 있고 귀 끝도 발긋했지만 어느새 숨소리가 고르게 변해 갔다

그는 잠결에도 에디스를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안고 있었다. 마치 간절히 애원하는 듯이 이따금 턱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살그머니 문질렀다.

단단히 갇힌 품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난감해하며, 그녀는 오래도록 아드리안에게 기댄 채 머물렀다.

* * *

‘어디 보자. 그러니까 계산이…….’

에디스는 집 책상에 장부들을 가득 늘어놓은 채 열띤 태도로 셈을 반복했다.

자신의 앞으로 놓인 부채가 얼마인지 꼼꼼히 따져 보고, 융통한 자금을 대입해 비교해 봤다.

고리대를 내야 했던 일반 대부업체 대출금보다 저리의 황실 대출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솔직히 클라이드의 명에 따른 특혜이긴 하지만, 황실에서 관리에게 자금을 융통해 준 전례가 종종 있었으니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시종직으로 버는 수입도 쏠쏠했다. 황태자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덕분에 급여가 궁에서 최고 수준으로 셌다.

하는 일에 비교하면 받는 돈이 과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국정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클라이드가 다시 특별히 명을 내려 급여를 올려 준다면 냉큼 받을 마음도 있었다.

이래저래 수입과 지출을 계산해 보니 약간의 흑자가 났다.

‘호오, 나쁘지 않아.’

그래봤자 긴 초록 뿔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 대부분은 여전히 황실 대출금의 이자를 갚는 데 쓰이지만, 임관 초기보다는 살림이 확실히 폈다.

클라이드 몰래 황실부 자금 담당관을 찾아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시종직을 관두면 대출을 갚아야 하느냐고. 다행히 곧바로 갚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에디스 개인의 신용을 담보로 해 빌려주는 자금이니까, 그녀가 늙어 죽기 전까지만 상환하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셈을 마치니 서광이 비치는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이 보이는 것 같아.’

영지에서 들어오는 약간의 수입, 시종의 급여, 악착같이 절약한 살림.

그런 식으로 수중에 약간의 자금을 마련했다. 이걸 기반으로 소소한 사업을 벌이면 어떨까 싶었다.

아버지가 저질렀던 사업 실패를 반복할 마음은 없었다. 적게 투자해서 조금씩만 벌되, 가능하면 망할 위험이 낮은 사업 아이템을 구상 중이었다. 원래 케츠모리스 가에서 경영했던 사업 중 회생의 여지가 있는 분야를 손대면 어떨까 싶었다.

‘수발 시종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순 없으니까.’

이런 계획을 세우는 이유를 머릿속으로 떠올리자, 에디스의 손에서 사각사각 움직이던 펜이 돌연 멈췄다.

‘헛생각하지 말자. 하루빨리 황궁에서 나와야 해.’

멈춘 손이 다시 글씨를 적지 못했다.

이젠 회피하지 못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갈 길을 정한 후, 그에 따라 빠르게 실행에 옮겨야 했다.

클라이드가 갑자기 마차 문을 열고 들어와 성토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알지만 외면해 왔던 진실을 크게 외쳐 들었다. 그의 심정을 더는 모르는 척하기가 어렵게 됐다.

소설 후반부의 전개를 두려워하던 기분도 마찬가지다. 에디스는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던 점을 인정해야 했다.

황제파와 귀족파가 전면전을 벌일 미래의 언젠가에 대비해, 그녀는 안전을 위해 달아날 궁리만 했다. 그 순간을 바꾸거나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변화는 어렵고 도피는 쉽다.

실천하기는 힘들고 변명하기는 수월하다.

핑계 중 하나는 단역에 불과한 에디스가 과연 소설의 전체 흐름을 바꿀 수 있는가였다. 노력해 봤자 바뀌지 못할 것 같았다. 시종이 아무리 잘나 봤자 황태자의 심부름이나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게 전부이리라는 추측이 한결 논리적이었다.

논리에 기대어 노력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그건 아직도 마찬가지다.

‘난 구한말에 태어났으면 절대 독립투사는 되지 못했겠네.’

피식, 썩은 미소가 지어졌다.

공포를 회피하고 난관에 굴하는 인간형이 바로 자신이었다. 보통 사람이 흔히 사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며, 앞으로도 주인공이 될 마음이 없으니.

이런 흐름에 따른다면 사실 한동안은 시종으로 더 머무는 편이 나았다. 자금 사정부터 인간관계까지 여러 가지 얽힌 사정을 마무리 짓기에는 아직 성급했다.

하지만 에디스는 부랴부랴 손익을 계산했다.

꽤 이른 도주를 결정한 것이다.

‘클라이드와 아드리안. 난 이대로 그들과 얼굴을 마주칠 수는 없어. 그러면 너무 못된 짓 하는 거니까.’

감정을 모른 척하기엔 한계가 왔다. 눈치 없이 굴지도 못한다.

정면으로 달려와 솔직하게 털어놓는 클라이드를 어떻게 외면한단 말인가. 그가 직진하기로 결심한 듯해서 에디스도 달라져야 했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대답을 요구받고 있었다. 새벽의 사격 연습에서도 클라이드는 틈틈이 그녀의 마음 빈 곳을 노리곤 했다. 방어벽을 세운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아드리안도 마찬가지다.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도 그녀에게 오는 길을 찾았다. 그렇게 한 이유가 보고 싶어서였다니.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해 오니까 곤란하잖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어느 하나를 결정해야 해.’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두 남자의 목줄을 쥐어흔드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

페이튼도 언뜻 생각나기는 했다. 50점짜리 혼사가 거의 물 건너가고 있어서 크게 마음이 쓰이지는 않았다.

어장 관리는 절대 제 취향이 아니다. 양다리 걸치기도 결코 원치 않았던 상황이다. 마음을 눈치채고서도 짐짓 외면해 오며, 그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오랜 시간 고민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봤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이 이것이었다.

‘진심이 아니면 소용없어. 클라이드는 진심이니까. 그리고 아드리안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건대, 클라이드를 막 좋아하고 그런 마음은 아니었다. 무척 매력적이고 굉장히 근사한 남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애정이 뿜어나오지는 못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운명인 것 같다. 아직 그 운명이 제게 찾아오지 않은 걸까.

그가 다가오면 심장이 뛰고, 홀릴 듯한 외모에 눈이 뒤집히기는 했다. 하지만 좋아서는 아닌 것 같다.

장담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그런 듯하다.

그래서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궁에서 나와야 했다. 진심으로 다가오는 상대에게 자신도 정직하게 대해 줘야 옳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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