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5장. 대체로 허술하지만 가끔 천재 >
총사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꼭 필요한 일정이 있어서 며칠 휴가를 받았다.
에디스를 태운 마차가 도심을 빠져나갔다. 한참을 달리자 건물이 드물어지고 밀밭이 넓게 펼쳐졌다. 전원 풍경이 한가로워 보였다.
이른 아침에 서둘러 출발했는데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는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멀었다. 꼬박 하루가 걸려 만난 시골 마을은 농가가 옹기종기 모인 곳이었다. 거기서 큰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자 아담한 저택이 나왔다.
규모가 에디스 집에 비해 반의반도 못 됐다. 2층짜리 건물 앞으로는 손바닥만 한 정원이 전부였다. 마구간이며 부속 건물이 집 외곽에 있는 구조라서 마차를 대문 밖에 세워 두고 걸어서 들어갔다.
그녀를 마중 나온 집사의 표정이 영 밝지 못했다.
“왔구나, 에디스.”
집사는 에디스의 아버지인 전 케츠모리스 공작이었다. 정중히 아버지한테 인사 올리는 순간이 어색했다.
집주인을 만나기 전에 아버지와 먼저 자리를 마련해 얘기부터 나눴다.
“이곳에서 지내기는 좀 어떠세요?”
술독이 많이 빠진 듯 예전보다 얼굴색이 덜 시커멓게 보이는 아버지는 민망해서인지 차부터 들이켰다.
“나쁘지는 않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다행이에요. 혹시나 아버지가 힘들어하실까 봐 걱정했어요.”
“너한테 부담 지워 줘서 내가 미안했지.”
“아니에요. 아버지 빚을 갚지 못하겠다고 선언할 때 저야말로 죄송했는걸요.”
가문의 공작 계승자가 에디스로 바뀐 후에도 아버지는 노름을 그만두지 못했다. 기어코 빚을 내어 탕진하고 말았다.
돈 꿀 만한 곳마다 모조리 그녀가 미리 연락을 해 뒀어도 소용없었다. 자식이 아버지를 모른척할 리 없다고 지레짐작한 어떤 대부업자가 약간의 자금을 융통해 준 것이다.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 빈털터리 노름꾼인 아버지는 갚을 능력이 되지 못했다.
그때 에디스는 황궁까지 찾아온 대부업자에게 딱 잘라 말했다.
‘안타깝지만 케츠모리스 가를 지켜야 하는 처지로 저는 빚을 갚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게요?’
‘법대로 처리해 주세요.’
매몰차게 거절하면서, 그녀는 아무리 소설 속 가족이라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이 방법이 최선이라 어쩔 수 없었다.
대부업자는 결국 법에 따라 아버지를 고발했다. 아버지는 약식 재판을 거쳐 선고를 받았다. 돈을 갚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마지막 구두 한 짝까지 벗겨진 채 길에 나앉든가, 노역을 해 상환하든가, 양자 간에 선택해야 했다.
그래도 명색이 귀족이라 하층민의 노역장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에디스는 믿을 만한 지인에게 부탁해 아버지가 일할 만한 곳을 구했다. 수도에 가까운 지역은 체면이 너무 엉망으로 깎일 테니 되도록 먼 곳의 일자리여야 했다.
겨우겨우 아버지가 면접을 봐 합격한 자리는 바로 소담한 영지를 가진 집안의 집사였다.
“이곳에서 숙식하기는 어때요?”
“보다시피 평온한 동네라서……. 먹고 자고 일하고. 그게 전부다. 숙식이 나쁠 것도 없지.”
“첫 급여일이 지났을 텐데, 돈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돼요?”
“급여일에 정확히 맞춰 받으러 오더구나. 봉투째로 넘겼지 뭐.”
“그자가 누군지 여기 사람들에게 들키진 않았고요?”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어수룩하겠니. 잘 아는 친구라고 둘러댔지.”
아버지가 빚 때문에 여기서 일한다는 건 이 집 주인밖에 몰랐다. 케츠모리스의 성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본가와는 아주 먼 방계라고 둘러댔다.
보통의 집사라고 알려져 있으니 아버지는 여기에서 제법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을 받는 모양이었다. 집주인이 보내온 서신에는 긍정적인 얘기가 많았다. 하긴 교육 수준이나 저택을 관리하는 안목이 시골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
그래도 에디스는 안타까운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전 공작이 집사로 일하는 형편이니 아버지나 저나 유쾌할 리가 없었다.
“죄송한데…… 한 가지 여쭤도 될까요?”
“뭔데 그러니.”
“이 동네도 노름하는 곳이 있어요?”
서신을 통해 미리 확인해 두긴 했다. 인근에는 투전판이 없다고.
그래도 아버지는 뭐라 하시는지 직접 묻고 싶었다.
“마을 술집에서 주말마다 카드 게임을 한단다. 다들 가진 게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판돈이 죄다 동전이야. 돈을 딴 사람이 술을 사면 끝나는 판이지.”
“그렇군요.”
그 정도면 노름이라고 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마을 사람과 주말 저녁을 즐기는 수준이지. 하지만 카드놀이를 계속하라며 권하지는 않았다. 갈수록 규모가 커질 수도 있으니 지레 조심스러웠다.
“걱정하지 마라, 에디스. 이제 그런 건 내려놓을 생각이야.”
아버지는 그녀의 손등을 다독이려는 듯 손을 뻗다가 도로 물렸다. 여전히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있는 딸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 어려워했다.
“네, 아버지. 믿어요.”
에디스로서는 실제로 아버지가 달라질 앞날을 확신하지 못하지만, 되도록 용기를 주는 쪽으로 대답했다.
고급 귀족답지 않은 직업을 가졌다는 점만 빼고 아버지는 한결 좋아 보였다.
4년여에 걸쳐 봤던 모습 중 가장 나았다.
“계산해 보니까 내년쯤엔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땐 돌아오셔서 아버지께 어울리는 일을 찾아보시면 좋겠어요.”
에디스의 몫은 빼고 이번에 아버지가 진 소액의 빚만 따진 거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랴 싶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최초의 흑자를 거두는 중이니까.
“여기도 나쁘지 않다. 돌아갈지는 내년 돼서 생각해 보려고.”
“그래도…….”
“어렵게 도박을 끊었잖니. 집으로 가면 나를 내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유혹에 흔들리느니 차라리 멀리 떨어진 여기가 나아.”
“집사는 아버지로서 많이 낮추신 걸 텐데요.”
“그때가 더 바닥이었어. 네가 결단을 내려 주지 않았으면, 난 조만간 조폭 빚쟁이한테 손목도 잘렸을걸.”
잘한 일인지 고민을 참 많이 했었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받아들여 주니 기분이 울컥해졌다. 맑은 정신으로 생활하는 모습이 다행스러웠다.
고용주는 도시와 인연이 없는 이 지역 토박이 자작이었다. 에디스는 자작을 만나 아버지가 잘 지내도록 지켜봐 줄 것을 부탁했다.
* * *
아버지를 보러 떠날 때보다 귀가하는 길은 상당히 시간이 늦어졌다.
도중에 비가 와서 도로가 진흙탕이 되었고, 운 나쁘게 물웅덩이에 바퀴가 빠졌다. 마부와 하인이 마차를 빼내러 실랑이하느라고 몇 시간이나 지체했다. 결국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저택 유지비를 아끼려고 조명도 최소한만 켜 둔 탓에, 대문에서 본 집은 몇 개의 방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여전히 집사를 고용하지 못해 그 역할을 대신하는 하인이 에디스를 맞았다.
“주인님, 그렇지 않아도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손님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그게…… 들었는데 잊었습니다.”
글을 모르니 방문자가 누군지 적어 두지 못한 것이다. 손님맞이를 해 본 적이 없는 하인은 등을 구부려 굽신거리며 어찌할 줄 몰랐다.
“다과는 내어 드렸지?”
“예, 그 정도는 했습니다만.”
“알았어. 내가 당장 가 볼 테니까, 조금 있다가 하녀를 들르게 해. 손님한테 차나 식사가 더 필요할지 모르잖아.”
집사라면 당연히 이 정도쯤은 알아서 하겠지만, 하인이 모를 수도 있어서 기본적인 당부를 했다.
은은하니 밝지 않은 불이 켜진 응접실은 조용했다. 그녀가 들어서서도 맞이하는 이가 없었다.
에디스는 3인용 소파에 느른하게 앉은 늘씬한 체형의 남자를 발견했다.
“아티.”
아드리안은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을 등받이에 걸치고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포즈는 지루함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기다리다 못해 눈이 감겼나 보다.
“아티?”
자그마하게 한 번 더 불렀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피곤했던 걸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하인이 곤란해했던 게 이해가 됐다.
아드리안은 하인에게 처음 보는 얼굴일 테고, 취기가 보이는 점도 걱정되었겠지, 그렇다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절정 미모의 귀족을 돌려보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에디스가 아는 아드리안은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에게 추근거리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술을 먹이려 할 때가 종종 있어서 특히 주의하곤 했다. 웬만해선 잔을 입에 대지 않고 믿을 만한 친구 사이에서만 분위기에 맞춰 조금 홀짝인다고 들었다.
어디에서 술을 마신 건지. 이렇게 취해야만 할 상황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에디스는 그의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곤히 잠든 기색을 보니 그녀 역시 저절로 숨소리를 줄이고 기척을 숨기게 되었다.
아드리안은 잠든 얼굴도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마구 흔들어 깨우기가 미안할 만큼.
선뜻 손대지 못하며 명작을 감상하는 관객처럼 그를 바라봤다. 물결처럼 퍼지는 보랏빛 머리칼에서 알코올을 이길 정도로 좋은 향기가 났다.
목이 앞으로 꺾여서 섬세한 뒤쪽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얀 피부 속으로 목뼈가 올록볼록 도드라졌다.
긴 속눈썹은 유려하게 휘어 그림자가 뺨 절반을 덮을 정도였다. 꽃을 물었다가 놓은 듯 화사한 입술은 화장한 건지 민얼굴의 색인지 헛갈렸다.
에디스는 손을 들었다가 내리길 반복하며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마냥 이대로 둘 수만은 없어서 주춤주춤 옷깃을 만졌다.
“저기…….”
늘어져 있던 그의 손목이 꿈틀 움직인다 싶은 순간.
“앗!”
허리가 그에게 휘어 잡혔다. 마르고 가느다란 몸매의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는 건지, 건장한 군인에 버금갈 만큼 위압적인 손놀림으로 아드리안은 그녀를 끌어당겼다.
무방비하게 당겨진 몸뚱이가 아드리안과 가까워졌다.
뜻밖의 분위기에 당황한 틈을 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제풀에 뒤로 밀려났다. 에디스를 제 손으로 끌어다 가까이 앉혀 놓았으면서, 마치 그녀가 떠밀기라도 한 양 몸을 젖혔다.
엉겁결에 소파에 드러눕는 와중에도 두 팔은 올가미로 만들어 그녀를 놓지 않았다.
“어, 어.”
에디스는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 애썼지만 부질없었다. 불안정한 자세로 버티려던 게 도리어 화근이 되었다.
풀썩, 아드리안의 어깨 위에 제 몸이 겹쳐졌다.
애간장을 녹이는 그의 한숨 소리가 귀청을 뚫고 들어왔다.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단번에 훈풍을 맞이할, 애절하고 다디단 음색이었다.
야릇한 꽃내음이 진하게 풍겼다.
셔츠 깃에 물씬 배어 있는 향은 그녀의 후각을 아찔하게 자극했다.
향수를 뿌린 걸까. 분명히 역한 술 냄새가 나야 정상일 텐데, 그의 귀 뒤에서 나는 냄새는 향수에 섞인 알코올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사내의 느낌이 역력한 가슴 근육과 낭창하게 가는 허리의 실루엣은 또 어떻고.
풀리지 않는 그의 아름 안에서 바동거리며 전방위적인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냄새와 소리,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촉. 거기에다가 홀려 버릴 듯 아름다운 얼굴까지.
“아티, 눈 좀 떠봐.”
잠결에 저지르는 짓인지 그의 눈은 뜨인 적이 없었다.
비틀어지게 깔린 남성의 상체가 편한 자리를 찾으러 뒤척거렸다.
“…….”
침묵과 함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