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은은하게 풍기는 오메가의 향기가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에디스는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잠결에 페로몬을 흘리고 있었다. 위험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뻐근해지는 그녀가 치명적인 냄새까지 풍기는 탓에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클라이드는 이를 악물었다.
겨우 허리를 펴며 물러나는데, 그녀의 향기가 운명의 실처럼 저를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오메가 페로몬은 어떻게든 내가 직접 돌봐 줘야겠군.’
안전 문제는 당연히 우선해야겠고, 자신 외의 알파에게 이 냄새를 맡게 하기가 싫었다.
에디스의 모든 것을 원했다.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옆자리이든, 침대에서 베개를 나란히 하는 관계이든. 하다못해 향기 한 줄기까지 모조리 소유하고 싶었다.
현실은 곁에 두기조차 어려워서, 그녀가 시종직을 그만두고 달아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지경이지만.
* * *
에디스는 황태자가 먼저 사격장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말에 올랐다.
아침에 깨워 준 사람은 그가 아닌 궁인이었다. 보조 침대도 쓴 흔적이 없었다. 벌써 화가 풀렸을 리가 없지. 충분히 클라이드가 이해되다 보니 마음이 더 안 좋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화해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건 잘잘못을 따질 게 아니라 선택의 문제였다.
먼저 사로에 서서 총을 쏘는 클라이드를 보며 쭈뼛쭈뼛 다가갔다.
대충 꾸벅 고개만 돌려 인사하고 나서 자기 자리로 올라섰다. 그 역시 눈인사만 간단히 했다.
에디스는 사격장 관리인에게서 장전한 총을 받아 들었다. 클라이드는 직접 총을 다루지만 그녀는 늘 남이 준비해 준 총으로 방아쇠만 당겼다. 준비 기간도 짧으니 명중률을 높이는 데에만 집중하라는 요구를 받아서였다.
총성이 시끄러운 게 오늘만은 도움이 됐다. 묵묵히 사격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둘이 번갈아 가면서 격발했다. 한 사람이 쏴 결과를 확인한 후 다음 사람이 쏘는 방식이었다.
이젠 그녀도 제법 실력이 붙어서 웬만한 총사만큼은 목표물을 맞히게 되었다. 덕분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주 클라이드가 가르쳐 주더니 요즘은 딱히 코치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화하기도 뻘쭘했는데, 다행히 총만 쏘는 분위기로 흘렀다.
“마지막까지 팔꿈치를 내리지 마.”
그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을 때는 움찔 놀랐다. 지은 죄가 있는 사람처럼 괜히 저 혼자 그랬다.
“네.”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제작 주문한 총이 올 때까진 어쩔 수 없는 거 알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에디스도 수월해지겠지.”
자세가 자주 흐트러지는 이유가 에디스 탓이 아닌 장비 문제라는 뜻이었다. 너무 무겁고 큰 총은 확실히 그녀가 쓰기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이드의 추가 사격이 이어진 후, 에디스는 말이나 붙일 겸 물어봤다.
“내 총은 언제 완성된대요?”
“이번 주. 늦어도 다음 주 초.”
이번에는 에디스가 사격할 차례였다. 집중해서 조준한 다음 과녁 중간에 맞췄다.
격발 횟수가 다 차서 중간 휴식시간이 되었다. 사로에 세워 뒀던 깃발을 내리고 쉬는 동안 궁인이 과녁판에 붙여 놨던 사격 표적지를 떼어 왔다. 궁인은 에디스의 것을 꼼꼼히 점수 매겨 노트에 적었다.
클라이드가 빽빽이 숫자가 적힌 표를 확인했다.
“꾸준히 늘고 있군. 예상보다 너무 잘해서 볼 때마다 놀라.”
둘은 어제의 다툼에 대해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일부러 총쏘기 주제로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본선 진출을 못 하면 어떡하죠?”
“에디스, 누누이 강조했듯이 일찌감치 탈락해도 괜찮아. 대회가 별 탈 없이 진행되는지 관찰하자는 뜻에서 참가하는 거니까.”
“그래도요.”
“본선까지 못 가더라도, 예선 경기장의 흐름만 파악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사실 안전사고는 예선에서 더 쉽게 벌어지잖아. 에디스의 임무는 선수단과 섞여 움직이면서 혹시 운영진이 놓친 큰 문제가 있는지만 체크하는 거야.”
클라이드는 이와 비슷한 얘기를 자주 해 왔다. 성적을 내라는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고 늘 부담감을 줄여 주기만 했다.
하지만 막상 출전 신청을 하고 보니 욕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왕이면 본선 경기장까지 가고 싶었다.
“내 성적이면 본선은 어려울까요?”
“본선까지 가고 싶어?”
“기왕이면 잘하면 좋죠.”
“그럴 필요 없다니까. 지금도 너무 열심히 해 줘서 말리고 싶을 지경인걸.”
부담 없는 도전이 오히려 에디스를 자극했다. 혼자 의욕이 넘치는 상황이었다.
대회라는 게 은근히 승부욕을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초반에 탈락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게임 같은 걸 할 적에도 그녀는 한번 불이 붙으면 눈이 뒤집히곤 했다. 현실 세계에 있을 때 어떤 모바일 게임에 푹 빠진 적이 있었는데, 캐릭터 명만 대면 서버에서 알아줄 만큼 하드 유저였다.
클라이드는 그녀에게 출세욕이 있는 거 아니냐고 놀린 적이 있지만, 이건 승부욕에 가까웠다. 지기 싫은 승부 근성이다.
그는 에디스의 사격 데이터에서 눈을 들어 먼 과녁판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에디스는 본선뿐만 아니라 최종 결선까지도 가능해.”
“정말이요?”
“이렇게 금세 늘기가 정말 쉽지 않거든. 특히 집중력이 대단하잖아. 사격은 에디스가 가진 장점을 제일 잘 살리는 분야가 아닌가 싶어.”
뜻밖의 칭찬에 그녀는 기뻐서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잘한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대회에서 얼마만큼의 성적이 기대된다는 얘기는 처음이었다.
옷자락이 바람에 나풀댔다. 그 모양새를 클라이드가 흘끗 돌아봤다.
분위기 깔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가 방정맞게 굴었나 보다. 에디스는 좀 쑥스러워서 딴청을 부렸다. 옆에서 큼큼거리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어색하지만 기분은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저기, 있잖아요. 어제 페이튼의 집에 갔을 때.”
돌연 굳어지는 그의 어깨가 눈에 띄었다. 또 냉전으로 되돌아갈 마음은 없어서, 에디스는 재빨리 용건을 꺼냈다.
“이상한 걸 봤어요. 전하께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클라이드에서 전하로 호칭이 바뀌자 그 역시 목소리 톤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어떤 이상한 거였지?”
“페이튼은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친척과 지인을 총사 대회에 출전시키려고 준비 중이더라고요. 우승도 노린다면서 자랑하길래 저도 잠시 구경했거든요. 그런데…….”
에디스는 주변에 둘 외에 다른 사람이 충분히 멀리 있는 걸 확인했다. 누가 들을세라 그의 귀에 가까이 입술을 댔다.
“사격 표적지에 뚫린 총알구멍이 의도적으로 중심을 벗어나 있었어요.”
“……!”
“어떤 종이는 거의 만점에 가까웠는데, 어떤 종이는 빵점이었어요. 실수라기에는 너무 차이가 컸어요.”
“일부러 빗맞혔다는 뜻인가.”
“확실해요. 들쑥날쑥하게 쐈다면 차라리 실력 기복이 심하구나 싶을 텐데, 전부 외곽만 쐈다면 일부러 하는 짓 맞잖아요.”
마뜩잖게 미간을 모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꾹 다문 입술 속으로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클라이드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동안 그녀 역시 나름대로 예측해 봤다. 그가 내어놓을 말이 자신의 생각과 어쩌면 비슷할지 모른다고 여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레이브즈 경이 작위를 받자마자 행보를 시작하나 보군.”
“역시 그런 거겠죠?”
“총사 대회를 그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로 내다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왜 그런 연습을 하는 걸까요? 낮은 점수를 받아서 뭐 하려고요.”
“할 건 많지. 총기 사고를 위장해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심각해진 에디스가 작은 탄식을 흘렸다. 사상자가 발생하고 대회가 엉망진창이 될 장면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큰일이네요.”
“아니면 대회장에서 우리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들의 바람은 총사 대회가 실패하는 것일 테니.”
막연히 그들이라고 지칭했지만 에디스는 누굴 뜻하는지 반문하지 않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업무에 매진한 탓에 이젠 그녀도 황실 안팎으로 돌아가는 사정에 빤했다. 분석 결과를 공유하다 보니 둘이 거의 같은 정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말없이 클라이드가 제 손가락을 접어 수를 헤아렸다. 혼자 생각에 잠기며 세 손가락이 접히자, 그녀는 퀴즈를 풀듯이 덤덤하게 얘기했다.
“빅토르 백작과 디트리안 백작. 그리고 한창 떠오르는 귀족파의 신성 페이튼.”
헤아리던 손가락을 다각 튕겼다. 클라이드가 속으로 지목한 자와 일치했다.
페이튼의 그레이브즈 공작가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귀족 집안이다. 귀족파 중에서도 수장 격이라 할 수 있다. 가문 대대로 권세를 누리면서 황가의 힘을 견제하는 데 단단히 한몫해 왔다.
선대 공작만 해도 귀족파에서 아주 끗발이 셌다. 신대륙에서 실종되지만 않았어도 클라이드의 황태자로서 행보를 사사건건 시비 걸었을 것이다.
페이튼과 가까운 귀족파의 인물도 뻔하다. 수 세기 전에는 가신이었고 이젠 사업적으로 얽혀 있는 집안이다.
“역시 노예 문제 때문에 훼방을 놓으려는 걸까요?”
“아마도……. 그리고 노예 외에도 걸고넘어질 게 여러 가지 되잖아.”
그레이브즈 가문은 신대륙의 노예를 이용해 가문의 부를 쌓았다. 이곳 라그란드 제국은 노예제가 불법이지만 그쪽 대륙은 합법이고, 매우 활발하게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일에 노예를 동원했다. 신대륙에 사업을 벌인 다른 가문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제국은 원칙적으로 노예제를 반대한다. 단순히 인권을 따지는 수준을 넘어서서 교역, 권리, 영토까지 줄줄이 분쟁 거리로 얽혀 있다.
따라서 황실과 귀족 간에 결코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그들은 황태자가 힘을 키우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부분도 있겠네요.”
“응.”
“클라이드, 기분 좀 별로죠?”
“견제받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라 새삼 분통이 터지지는 않아.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고가 터지기 전에 막아 내야겠지.”
잠시 침울해졌다. 에디스는 총을 손질하는 궁인에게 시선을 던지며 이따금 곁눈질로 클라이드의 분위기를 살폈다.
위로의 말을 던지기가 조심스러웠다. 신하를 가장한 적이 늘 그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현실을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덮어 주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후의 국정 회의에서도 또 마주칠 자다. 에디스는 직설적인 표현 대신에 에둘러서 완곡히 얘기했다.
“적당히 선을 지키면 좋으련만, 인제 보니 욕심이 있는 사람 같아요.”
“에디스가 보는 페이튼의 평가가 그건가?”
“네?”
“그럼 혼사 얘기는 잘 안 풀리는 쪽으로 봐야 하나.”
어느새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올곧게 느껴졌다. 클라이드는 총사 대회와 그녀의 혼담 중 어느 걸 더 신경 쓰고 있는 걸까.
“뭐……. 차나 마시려고 갔다가 그런 장면을 목격했으니까요. 빗맞히기 연습이라니. 좋게 보이지는 않죠.”
“아직 혼담을 완전히 깬 건 아니고?”
조금 미소가 나오려 했다. 혼담 쪽으로 생각이 쏠렸구나.
“클라이드, 지금 총사 대회 얘기하던 거 아니에요?”
“아직 안 깼나 보군.”
도로 시무룩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페이튼의 꿍꿍이에 관해 어제 얘기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너무 경황이 없었다. 환궁하던 길에 마주친 클라이드가 몰아치듯이 고백하는 바람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머지 사격 훈련을 하러 자리를 옮기며 그가 줄곧 구시렁구시렁 허튼소리를 늘어놨다. 페이튼을 흉보다가 이내 제풀에 놀라 말을 철회하기도 했다.
에디스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들쑥날쑥 변하는 클라이드가 밉게 보이지 않았다. 라이벌을 견제하려는 태도가 약간 귀여웠다.
함부로 웃으면 그가 귀여운 짓을 그만할까 봐, 에디스는 모르는 척 총만 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