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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42)화 (42/129)

42화

팔의 아름이 좁아졌다.

커다란 손바닥은 그녀의 등판을 다 덮었다.

에디스의 겨드랑이까지 바짝 팔뚝을 끼워 당기는 힘은 무쇠 수레바퀴를 연상시켰다. 손끝이 그녀를 한 바퀴 돌아 반대쪽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뜨거웠다. 클라이드의 손과 분노가.

돌덩이 밭 위로 엎어지듯이 에디스가 그에게 부딪쳤다. 힘차게 끌어들이는 클라이드의 기세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이마는 굳센 턱과 박치기했고, 가슴은 딱딱한 근육질 가슴팍과 충돌했다.

“핫…….”

두 손이 허둥지둥 허공을 짚었다. 둘 데를 잃은 손을 펼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손이 갈 곳은 딱 한 군데뿐이었다. 클라이드가 그러하듯이 그녀도 두 팔로 그를 끌어안으면 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팔로 두른다는 건 상대를 허락한다는 육체적 표현이다. 자신은 그에게 무엇도 장담할 수 없건만 어떻게 반겨 끌어안을 수 있겠는가. 비록 영혼을 잃은 손이 저절로 안으로 굽혀지려 하더라도 참아야 했다. 책임지지 못할 짓을 남발하면 안 된다.

쩔쩔매며 버둥거리는 팔과 남자의 굳센 가슴에 들러붙은 상체가 이율배반적인 그녀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목청을 눌러 내뱉는 그의 음성이 탁했다.

“넌 내가 등신으로 보이지?”

어울리지 않게 거친 말투가 튀어나와 그녀는 퍼뜩 놀랐다.

“네? 무슨 말씀을.”

“어떻게 내 눈앞에서, 혼담이 오가는 놈과 가 버릴 수 있어?”

격정 어린 외침이 에디스의 말 마지막과 겹쳐 흘렀다. 타들어 갈 듯한 절규였다. 높이 치켜든 턱을 그의 어깨에 고이고 있어서 폭발하는 감정의 형태가 어떤지는 볼 수 없었다.

황궁에서 클라이드를 두고 나오던 순간, 그녀 역시 조마조마한 분위기를 읽었다. 하지만 그는 아드리안과의 연기를 철저히 소화했다. 연인과의 오붓한 시간을 만끽하는 황태자의 곁에서 시종이 어슬렁거릴 이유가 없었다.

에디스는 나름대로 목적을 갖고 외출했다. 페이튼에게서 알아봐야 할 부분을 미리부터 꼼꼼히 챙겨 두고 궁을 나섰다.

하지만 그사이 클라이드가 무슨 기분이었는지까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지 페이튼에게 용건이 있었다고 둘러대지도 못했다. 그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호감이 커졌더라면 분명 혼담을 구체적으로 논의했을 것이다.

딱딱하게 끊어 내던지는 말소리가 마차 밖을 넘었다. 그는 실성한 놈처럼 열렬히 외쳐 댔다.

“내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너한테 마음이 있다는 걸!”

에디스는 그대로 경직해 버리고 말았다.

차마 밝히지 못해 혀끝에서 맴돌던 말을 기어코 그가 뱉어 냈으니.

삼키지 못해 목을 찌르던 말이 피처럼 콸콸 쏟아졌다. 까칠하게 긁히는 음색으로 그가 탄식을 흘렸다.

대외적인 지위, 의무, 황태자. 그딴 것들 때문에 속내에 담아 두기만 했던 것들이었다. 앙금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그 위에 태산 같은 돌덩이를 덮어 뒀던 이야기였다.

조금씩 그녀를 녹이며 마음을 얻자던 각오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드러내 보여 줬는데…….”

목덜미에 뿜어지는 뜨거운 숨결이 그녀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꾹꾹 눌러 참아 온 본심을 터뜨리는 순간 클라이드는 제가 얼마나 오만했던지를 깨달았다. 에디스를 시종으로 두고만 보는 건 애초에 무리한 시도였다.

빠르게 덩치를 키워 가는 감정보다 그녀와 가까워지는 게 늦었다.

턱없이 속도 차이가 났다.

심장에 검이 찔러 분수처럼 피가 뿜어지듯이, 그가 아프게 헐떡거렸다.

피 흘리는 야수처럼 웅웅거리는 낮은 목울음으로 울부짖었다.

“에디스…….”

고개를 든 그가 눈을 맞췄다. 광포하다가 갑자기 작아진 음성은 전율 그 자체였다. 길게 늘이는 숨소리 끝에 오싹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모른다는 거짓은 말하지 마. 네가 날 피하려는 거 뻔히 보여.”

에디스는 대답할 말이 궁했다.

그는 잔뜩 쏟아 내는데도 그녀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전부 맞는 얘기였으니.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소설 속 세계의 사건들, 실존하는 인간으로 여기기 힘든 공 클라이드와 수 아드리안.

당연한 귀결로서 일신의 안위가 최우선이 되었던 에디스의 결정.

하지만 클라이드는 외치고 있었다.

나는 너를 마음에 둔 남자라고. 살아서 너를 사랑하노라고.

“…….”

그녀는 잠깐 입술을 벌렸다가 도로 붙였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도 하잘것없을 테지. 일단 흥분부터 가라앉힌 다음 나중에 얘기하자면 그를 기만하는 거다.

뻘겋게 핏줄이 돋은 클라이드의 눈 흰자위가 살벌했다.

“에디스한테 도저히 내가 아니라면, 차라리 거절해.”

그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행동만은 다정했다. 손끝이 그녀의 턱을 살며시 쓸었다.

절망을 담아 건네는 상냥한 손길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클라이드…….”

황망히 벌어진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이 지그시 눌렀다가 톡 튕겼다. 에디스의 시선이 그의 손끝으로 내려갔다.

길게 휘어진 백금색 속눈썹 위로 그가 고개를 내렸다.

입맞춤을 허락받지 못한 숨결이 파르르 떨리는 눈썹을 옅은 바람에 날렸다.

“거절은…….”

스치듯이 내뱉는 한숨은 한 버킷만큼 흘린 피보다 처절했다.

“조금 나중에 해 줘. 부탁할게.”

클라이드는 실연을 예감하고 있었다. 별달리 그를 좋아하지 않는 듯한 에디스 앞에서 혼자 앞서 갔던 자신을 저주했다. 세게 짓씹는 입술이 쉽사리 찢어졌다.

피눈물을 쏟듯이 붉어진 눈자위를 마주하며, 그녀는 쭈뼛거리기에만 바빴다.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꺼낼 수 없었다. 도망갈 궁리나 해 댔던 지난 시간에 대한 벌이다. 성숙하지 못하게 무작정 현실을 외면했던 나날이 빚쟁이처럼 들이닥쳤다.

아직까지도 결심을 내리지 못한 자신은 꾸준히 한심했다. 시종일관 부족한 사람이었다. 이런 자신에게 고백하는 클라이드가 미안했다.

꺼져 들어갈 듯이 손가락을 조심히 떼는 그가 자신한테는 아까웠다.

“아직은 내가 널 정리하지 못하겠으니까.”

뻐근해진 그녀의 심장이 비정상적인 펌프질을 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언젠가 정리하겠다는 의미였다.

“지금 버려지면 아주, 돌아 버릴지도 모르겠거든. 질척대며 매달리는 꼴을 보고 싶다면 시도해 봐도 좋겠지만.”

클라이드를 붙잡을 마음조차 정하지 못하면서 공연히 슬펐다. 철딱서니 없이 아무런 감정도 깨닫지 못하는 그녀의 심장은 영문 모르고 괴상한 속도로 아파져 왔다.

돌연히 그가 마부석 쪽 벽을 쾅 쳤다.

급하게 마차 속도가 줄어들었다. 왜 이러는 걸까. 미처 그의 의도를 눈치채기도 전에, 에디스를 그물처럼 옭아맸던 온기가 돌연 사라졌다. 클라이드는 채 멈추지도 않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멍하니 지켜보는 새 문이 닫혔다.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 *

소설 속으로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울었다.

여태까지 이곳은 울음의 감정까지 갈 만큼 그녀를 뒤흔드는 세계가 아니었다.

언제나 이 세계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다. 만나는 이는 전부 인간이 아니며 자신조차 단역 캐릭터였다. 갑작스러웠던 시작처럼 어느 날 제자리로 돌아가면, 폰 어플을 끄듯이 이 모든 상황이 끝나리라고 여겼다.

클라이드가 처절히 외치기 전까지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는 자신이 또 한심했다.

그는 황태자의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 없는 방에 시종이 홀로 기다리다가 불을 껐다. 클라이드가 쓰는 보조 침대는 비었고 황태자용 침대는 에디스가 덩그러니 누웠다.

달팽이처럼 등을 구부린 채, 자는 둥 마는 둥 저녁을 보냈다.

하루 동안 많은 일이 있어서 피곤했다.

노곤해.

‘내일 클라이드를 보면 무슨 말부터 할까?’

졸음이 오기는커녕, 생각만 많았다.

한창 심란해하다가 어느 순간 눈이 감겼다.

밤이 어두웠다. 그녀는 기척을 죽여 다가오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잠 속에서 고민을 이어 가는 동안 눈은 뜨이지 않았다.

침대 휘장이 소리 없이 걷혔다. 오랫동안 석상처럼 서 있던 인영은 그녀가 깰세라 조심조심 가장자리에 올라왔다.

에디스를 누구보다 잘 아는 클라이드는 그녀와 마주치지 않을 시간도 정확히 잴 수 있었다. 초저녁에는 뒤척거리지만 일단 잠들면 새벽에는 업어 가도 모른다는 것을 익히 간파했다.

촉감의 힘을 빌려 그녀를 찾았다.

나비잠을 자곤 하는 에디스는 대개 두 손이 베개 언저리에 얹혀 있었다.

그가 적당한 거리를 재며 가까이에 누웠다. 약간 매트리스가 흔들려도 변함없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에디스의 손끝에 제 얼굴을 갖다 댔다.

손을 까딱거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코를 손가락 사이에 넣어 킁킁거렸다. 화장수 냄새가 거의 다 날아가고 본연의 체취가 은은하게 풍겼다. 냄새 쪼가리만 맡아도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이런 자신이 지지리 못났어도 어쩔 수 없었다.

보고 싶어서 도저히 못 참겠으니.

‘내가 미쳤지. 정리는 무슨 정리.’

타인의 눈을 피해 황궁을 벗어난 후 에디스를 쫓아갈 때 그는 거의 눈이 돌았더랬다. 행여 그녀가 페이튼의 집에서 결혼 얘기를 마치고 올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런 탓에, 에디스의 마차에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말았다.

‘헛소리도 어지간히 해야 말이 되지. 어떻게 에디스를 보내겠나.’

에디스는 그 얘기가 당치도 않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듯하지만.

‘혹시 거절당하고 해도,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절대 포기 못 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남자는 무슨 죄목인가에 걸린다던데, 이쯤 되면 자신도 범죄자의 소질이 있는 건가. 하지만 자제하고 또 참은 결과가 이 모양이다. 이 이상 어떻게 두고 보란 말인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도 그냥 케츠모리스 가에 청혼서를 보낼까? 그런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했다.

에디스는 황태자비 자리를 거부하지 못하겠지. 황명은 곧 법과 같으니.

덮어놓고 그녀를 비에 앉힌 후 잘해 보고 싶은 욕심이 매번 불쑥불쑥 생기곤 했다. 부부는 몸정이라던데, 밤에 이런저런 짓도 하고 후계자도 만들다 보면 금세 마음도 따라오겠지.

‘하, 진짜 그러고 싶군.’

에디스가 조금만 제게 곁을 내어 준다면. 하다못해 달아날 궁리만 그만한대도 청혼서를 내밀겠다.

야속하기만 한 그녀는 여전히 체취가 환상적이었다. 저를 안절부절못하며 코를 들이밀게 했다.

콧잔등에 자그마한 손톱이 와 닿았다. 딱딱하고 미끄러운 조각의 감촉이 짜릿하게 좋았다. 클라이드는 유령처럼 얼굴을 놀렸다. 손톱 두 개가 콧방울을 거쳐 인중으로 톡 떨어졌다.

숨을 멈췄다. 실바람이 잠을 깨울까 두려웠다.

입이 동굴처럼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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