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에디스는 조금 전의 대화와 똑같은 어조로 물었다.
“총사 대회는요? 실질적으로는 그게 하이라이트인데……. 수상자는 황실 총사대에 입단하는 특혜도 있잖아요.”
그는 미리 할 말을 준비해 둔 사람처럼 매끄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남들 하는 만큼 저의 그레이브즈 가문도 참가자가 있습니다. 지방에 사는 먼 친척을 불러다가 연습시키고 있지요.”
“그래요? 실력은 좋은가요?”
“사냥 취미에 아주 심취한 사람들입니다. 우승도 노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와아! 우승하게 된다면 정말 좋겠네요.”
상위 수상자는 황실 총사대로 곧바로 채용되고, 그 아래의 등수는 수도 인근의 군대에 입대하는 자격이 주어진다.
황제의 상비군은 안정된 직장으로 호평이 자자했다. 따라서 황실 총사대가 아니라 군 입대를 목표로 하는 일반인이 많았다. 여건이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번 대회에 지원했고, 남의 총을 빌려서 몇 발 쏴 보며 행운을 바라는 이도 흔했다.
이런 분위기인 탓에 페이튼이 친척을 총사 대회에 내보내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페이튼, 다른 집안도 실력 있는 자를 많이 내보내겠지요?”
“제가 아는 사람만 해도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황궁에 자기 편을 늘릴 수 있는 기회니까요.”
“맞아요. 그것도 정당한 기회지요. 그럼 페이튼은 누굴 라이벌로 보고 있어요?”
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환히 웃었다.
“제 사람들이 최고일 것 같습니다.”
페이튼의 성격은 원래 이런 듯했다. 딱히 겸손하게 구는 법이 없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대단하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과시하는 스타일이었다.
거침없는 솔직함은 장단점이 있겠지만 그의 특징으로서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충분히 겪어 본 후 감당할 자신이 생길 때 혼담을 성사시켜야지. 훗날 페이튼과 부부가 되면 잘난 척할 때마다 꼴 보기 싫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성격과 잘 맞는 사람도 있다. 자기를 지나치게 낮추는 성격을 도리어 불쾌해하는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이런 페이튼에게 딱히 싫거나 좋은 판단은 내리지 않았다. 그냥 조금 더 만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럼 혹시 참가자들의 실력을 구경시켜 주실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흔쾌히 허락하는 그는 제 사람들의 실력을 뽐낼 기회를 은근히 반기는 듯싶었다.
페이튼의 집안에서 사용하는 사격장은 마차를 잠깐 타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누군가가 한창 연습 중이었다. 아까 언뜻 지나친 그 사람들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얼굴까지는 기억 못 했지만 들고 있는 총은 같은 황실 총이었다.
에디스가 총을 구분할 줄 알리라는 걸 페이튼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범한 귀족 영애라면 총을 만져 보지도 않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웬만큼 아는 사람이라도 최신식 총의 미세한 차이까지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클라이드에게 수업받으며 다양한 총들을 실제로 늘어놓고 비교해 본 적이 있었다. 남성용으로 제작된 황실 전용 총을 에디스가 쓰기 편하도록 개조하기 위해서였다.
총의 종류는 사격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무게 균형이 어쩌네, 총신 길이가 어쩌네, 하는 소리를 매번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이리 오세요, 에디스. 이쪽은 내 친척인 센드릭. 이쪽은 황태자 전하의 시종으로 계신 케츠모리스 공작.”
“반갑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거리낌 없이 사수 중 한 명을 소개해 주자, 에디스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인사했다.
예의용 미소를 짓는 와중에 총을 흘끔 봤다. 황실 총이 맞았다.
새벽의 황실 전용 사격장에서 그녀가 총을 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자리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입 무거운 궁인과 충직한 기사뿐이었다.
에디스가 출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극비였다.
총사 대회에 참가하는 목적은 행사가 원활히 진행되는지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대회의 비밀 감시자가 되어야 했다.
참가자로 활동하는 동안, 어쩌면 반대 세력이 훼방을 놓는 걸 미리 알아챌 수 있었다. 또는 예상치 못한 운영상의 부실을 잡아낼지도 몰랐다.
정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서 두각을 드러낼 때는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겠지만, 가능하면 조용히 묻히는 편이 나았다. 밝혀지더라도 그 시기가 늦을수록 좋았다.
그런 이유로 에디스는 천연덕스럽게 무지한 모습을 보였다.
총 쏘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티를 내기도 했다.
“와, 소리가 굉장히 크네요.”
페이튼이 젠체하며 알은척했다.
“에디스는 이만큼 가까이에서 사격을 볼 일이 없었겠군요.”
때마침 다음 사격이 이어져서 그녀는 귀를 막았다. 덕분에 대꾸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공무 수행을 위해 약간은 거짓말해도 괜찮겠지만, 매끄럽게 넘어가면 더 좋으니까.
“다른 분들은 페이튼의 친척분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려는 건가요?”
“네, 센드릭과 같은 고향 친구들입니다.”
보아하니 센드릭이 제일 실력이 떨어졌고 나머지는 다 잘했다.
아무래도 그레이브즈 가의 이름을 걸 사람을 얼굴마담으로 세우면서 명사수들을 불러들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들이 실제 동향 친구로 보이지는 않았다. 복장이나 말투로 미루어 돈으로 고용된 사람 같았다.
다른 가문도 다 이런 식이려나? 내색은 하지 않으며 속으로 부지런히 궁리했다. 그런데 왠지 모를 찝찝함이 마음에 남았다.
에디스는 페이튼을 만나는 동안, 줄곧 그의 분위기를 탐색해 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이 있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그녀가 원작에서 읽은 페이튼의 분량은 아주 적었다. 25편 중 서브 공인 그는 잠깐 등장해서 얼굴도장만 찍다시피 했다. 글 소개만큼 악역이 될 기미가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갑자기 바뀌지 않는 법이다. 어딘가 악당다운 면모가 있을지 모른다. 그 낌새가 에디스의 눈에 엿보인다면 혼담에서 손을 떼고, 깔끔하다면 만남을 이어 갈 생각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스토리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듯이 페이튼도 악역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처음부터 에디스가 그에게 신경 쓰이던 점은 이것이었다. 미리 속단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관찰하자는 마음이었다.
여러 측면을 염두에 두며, 그녀는 겁이 많은 척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했다.
가까이에는 수레에 각종 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큼직한 보관 상자에서부터 여분의 총알, 화약, 동심원이 그려진 종이 과녁까지.
연습을 많이 했던 듯 총알구멍이 남은 종이도 있었다. 종이는 한 사람 분량씩 개인 소지품 상자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가까운 상자를 흘끗 봤더니 구멍의 위치가 범상치 않았다.
어떤 종이에는 거의 만점에 가깝게 가운데만 명중했다. 반면에 어떤 종이에는 1점 이하로만 뚫렸다.
실력의 기복이 심하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규칙적이었다.
절반은 만점 종이, 절반은 1점 이하 종이.
만점과 1점이 섞이지도 않았다. 보이는 그대로 극과 극이었다.
싸한 느낌이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보지 말아야 할 비밀을 본 기분이었다. 의도적으로 빗맞힌 게 분명했다.
빗맞히는 연습이라…….
대체 왜?
페이튼은 종이가 흩어져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녀 역시 상자에 손대지 않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다들 명사수군요. 누가 제일 잘 쏴요?”
“닉슨이 제일 성적이 좋습니다. 저기 끝에 선 갈색 더벅머리 청년입니다.”
조금 전의 상자 귀퉁이에 석필로 닉슨이라고 흘려 쓰여 있었다.
에디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제 안색이 부디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기를 빌었다. 그 상태로 능청스럽게 굴기가 보통 어렵지 않았다.
“호오, 지금 전 우승자를 미리 봐 두는 격이네요.”
“우승은…….”
매번 자랑하기에 바쁘던 페이튼이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사람이 최고 실력자라더니 우승은 자신이 없는 걸까.
“뭐, 우승도 노려 볼 수 있겠습니다.”
그는 어중간하게 답하고 말았다.
최고의 명사수지만 우승은 하지 못하리라는 의미라면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페이튼은 뭔가 꿍꿍이를 품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에게 특별한 목적이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총사 대회와 관련해 바람직하지 못한 수작일 듯했다.
얼른 궁으로 돌아가서 클라이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또한, 페이튼과의 혼담은 미뤄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건으로 맺어지는 결혼에서 점수를 100점 만점에서 50점 정도로 깎았다. 남은 50점은 그나마 페이튼의 입장을 고려해서 남겨 뒀다. 이 계략이 어쩌면 나름대로 사연과 맥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미련에서였다.
* * *
황궁에서 마차가 그녀를 마중하러 왔다.
에디스는 페이튼의 마차를 빌릴 필요 없이 곧바로 황궁 마차에 몸을 실었다.
생각할 것은 많았고 몸은 피곤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아직 들지 못한 탓에 초저녁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노곤해졌다. 마차 등 쿠션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다각다각 달리는 리듬이 규칙적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차가 정지했다. 벌써 다 왔나 싶어 밖을 내다보니 아직 시내였다.
“무슨 일인가?”
마부석 쪽으로 외치자마자 문이 덜컥 열렸다.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가 갑자기 안으로 쳐들어왔다. 에디스 옆에 앉자마자 문을 쾅 닫았다.
“출발.”
사내의 음성이 익숙했다. 퉁명스러운 한마디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모자와 함께 얼굴을 가리느라 칭칭 둘렀던 스카프를 푸는 손길이 건조하고 거칠었다. 남의 것을 빌려 입은 듯 어깨가 빡빡하게 좁은 코트를 내던지는 행동 역시 편치 못했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등 뒤로 넘겼다.
응달진 실내에 묻혀 푸른 머리칼이 새카맣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찌푸린 이마부터 손가락을 벌려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모자 때문에 헝클어졌던 머리가 다섯 손가락 자국을 남기며 찰랑거렸다.
“에디스가 오늘…….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떠보려고 이랬던 거라면.”
“클라이드.”
허벅지를 밀어 그가 다가왔다. 한 사람분의 의자 쿠션을 넘고 에디스의 스커트 자락을 우그러뜨렸다.
좁은 마차 안은 피할 곳도 없었다. 공간이 남는데도 클라이드의 성난 몸놀림을 제가 당해 낼 도리는 없을 테다. 에디스는 꼼짝 못 하는 얼음이 되었다.
겨드랑이 아래로 사내의 굵은 팔뚝이 퍼억, 휘감고 들어왔다.
“아주, 제대로 나를 건드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