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40)화 (40/129)

40화

황태자가 바짝 긴장하는 두 귀족을 번갈아 노려보며 한 장짜리 문서를 손끝으로 톡톡 튕겼다.

“들었지? 이 이후의 진척 상황이 궁금하네.”

“예, 전하. 서둘러 진척도를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페이튼은 복잡한 심경을 사무적인 표정으로 감추며 묘한 분위기의 국정 회의실을 지켜봤다.

에디스가 황태자의 오른팔이라는 소문이 떠돌더니, 그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 * *

회의실 문이 열리고 십수 명의 귀족과 관리가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궁 정문 쪽에서 아드리안이 서성이고 있었다. 끝나는 시각을 미리 연락받았는지, 방금 온 듯 상큼한 기색이었다.

민얼굴도 아름다운데 옅게 화장까지 했다. 옷자락에는 커다란 보석 브로치도 달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아드리안의 모습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흘끔거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군중을 향해 그가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에디스는 흠칫 놀랐다.

“전하—.”

웃을 때 저를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큰 목소리로 부른 상대는 클라이드였다. 어여쁘게 차린 모습으로 보나, 회의실 앞 장소로 보나, 클라이드와 약속이 있어 온 게 틀림없을 텐데 방향이 비슷해서 그녀가 착각해 버렸다.

급히 표정을 관리하면서 메모지를 움켜쥐었다. 간단히 목례만 하고 비켜서자 아드리안은 낭창낭창한 자태로 황태자에게 다가왔다.

“아드리안, 오래 기다렸어?”

“방금 왔어요. 미리 와서 기다렸으면, 전하께서 제 생각하면서 마음 졸이셨을까요?”

“그랬을지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알파와 오메가 커플이 나란히 서자 좌중의 관심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회의 내내 에디스의 메모지를 못마땅해하던 자들은 순식간에 경계 대상을 아드리안으로 바꿨다. 그에게 환심을 사려는 듯 상냥하게 건네는 눈길 속에 적의를 숨기고 있었다.

황태자의 연인이란 그만큼 엄중한 자리였다. 장차 황태자비를 거쳐 황후가 될 중요한 위치였다.

“케츠모리스 경은 이 시간 이후로 나를 따르지 않아도 되네. 내일 새벽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만 부탁하네.”

“예, 전하.”

황태자 커플보다 앞서 회의실을 떠난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다들 멀리 가지 않고 은근슬쩍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뻔히 딴청부리는 광경이 조금 우스워 보였다.

에디스는 직접적으로 알력 다툼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 클라이드가 전부 막아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보고 들은 바가 있으니 알 건 다 알았다.

황태자의 연인인 아드리안을 적대 세력이 얼마나 음해하고 헐뜯을지 뻔했다.

아드리안은 미움받는 일에 익숙하다고 했지만, 에디스는 그가 눈에 밟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당하고 있을지 예상되어 속이 아렸다. 이렇게 연기하고 얻을 이익이 부디 크기를 바랐다. 에디스가 아는 아드리안은 야심가가 아니지만, 그래도 돈 많이 벌기를 기원했다.

클라이드가 일부러 아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생긋 웃는 아드리안은 완전히 살아 있는 그림이었다.

한눈에 반해 버렸다고 퍼뜨린 소문을 누구나 믿을 만큼, 미모가 개연성이고 설득력이었다.

시기와 질투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게 된 에디스는 조용히 사라지려 했다.

그때 그녀의 곁을 채우는 남자가 있었다.

“에디스, 잠깐 시간 좀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아, 페이튼.”

페이튼과 오랜만에 얘기나 좀 해 보려던 걸 깜빡했다. 황궁의 일상이란 부침이 심해서 황태자 커플이 보여 주는 쇼를 관람하는 동안 페이튼을 잊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뵈어서 반가웠어요.”

“에디스가 먼저 가 버릴까 봐 부랴부랴 쫓아왔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영광입니다.”

“정원 산책은 어떠세요?”

“시간이 되신다면 궁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갈 수 있겠습니까?”

에디스는 직속 수발 시종이라서 외출하려면 황태자에게 따로 얘기해 놔야 했다. 그녀는 멀찍이 물러 나왔던 클라이드에게 다시 다가갔다.

“전하, 잠시 궁 밖으로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아드리안과 무슨 대화를 나누던 중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돌연 클라이드가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시간을 끌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게.”

“예, 전하.”

아직도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 주는 황태자 커플을 지나쳐 에디스와 페이튼이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는 친절하게 말을 거는 페이튼에게 집중하느라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나란히 어깨를 닿으며 사라지는 에디스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연기하는 틈틈이 곁눈질하는 행동이 은밀했다.

아드리안은 저보다 훌쩍 큰 황태자의 어깨에 얼굴을 감췄다. 말로는 갖가지 가식을 섞어 청아한 음색을 멀리 퍼뜨렸다. 하지만 긴 속눈썹을 내리며 깜빡이는 사이사이 에디스를 살폈다.

그녀를 데려가는 남자가 누군지 알지 못해 홀로 애가 탔다.

거의 등지고 섰던 클라이드는 발소리를 들었다. 가볍고 가는 구두 뒤축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시종장도 이만 쉬게.”

불필요한 말을 만들어 옆을 돌아봤다.

그는 측면의 시종장을 보지 않았다. 시야각 끝에 걸리는 에디스만이 눈에 가득 찼다. 혼담이 오가는 그레이브즈 경이 기어코 그녀를 데리고 나가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속이 드글드글 끓었다.

측근으로 두고서도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제 잘못을 탓하기도 했고, 그리 싫은 티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혼담을 이어 가는 에디스를 원망하기도 했다. 어쨌든 페이튼과 에디스의 만남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쫑긋 세운 귀 끝으로 그들이 그레이브즈 가 저택으로 가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따라 나가면 금세 들킬 테지.

마른 낙엽처럼 버석버석 소리를 내는 관중의 인기척을 들으며, 클라이드는 망연히 눈을 흐렸다.

* * *

에디스는 시간이 넉넉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궁 정문을 넘었다. 페이튼이 제집으로 모시겠다는 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마차를 타고 가며 타오르는 태양과 같은 페이튼의 인상을 절감했다. 둘 사이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입담조차도 열정적인 그에게 에디스는 홀리듯이 수시로 맞장구쳤다.

지난 혼담 협상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페이튼은 그녀가 시종직을 계속하든 가문의 살림에 치중하든 양쪽 다 좋다고 했다. 그의 여러 장점 중의 하나였다. 번잡한 황실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외의 장점도 많았다. 빚 걱정도 내려놓을 수 있고, 미래에 클라이드를 둘러싸고 벌어질 대참사에서 물러날 수 있다.

서브 공을 개과천선하도록 조종하면서 오붓하고 여유로운 귀족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면.

‘땡큐지.’

저절로 그녀의 입 모양이 하트가 되었다.

하지만 어디에든 복병은 있기에 마련이다. 페이튼에게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었다.

외출하자는 청을 넙죽 받아들인 이유도 그것이었다.

묘하게 느껴지는 촉을 확인하고 싶었다.

“벌써 다 왔네요. 여전히 아름다운 정원이에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대지의 기둥 언덕에 사는 처지에 저택이야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마차 발 디딤판 옆에서 내미는 손은 뜨거웠고 치아가 보일 만큼 환한 표정은 실로 눈부셨다. 그 손을 잡고 싶어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겸손한 말씀이세요. 여긴 살고 싶을 만큼 멋진 저택인걸요.”

적당한 립서비스에 그가 속단하지 말기를 바라며, 심혈을 기울여 치근덕거렸다.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페이튼에게 관심을 표현했다.

급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하는 저택 사용인의 몸놀림이 빠릿빠릿했다. 급여가 높은 사용인만 고용한 걸까? 차를 내어 오는 속도가 케츠모리스 가와는 비교 불가였다.

응접실 테이블에 앉은 에디스는 단정한 태도의 사용인밖에 보지 못했다.

외부인이 없을 때 페이튼이 제 수하에게 어떻게 구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통제되어, 잠깐 방문한 그녀로서는 이곳의 실제 분위기를 알 길이 없었다.

“국정 회의에 참석하셔서 반가웠어요.”

“저도 에디스를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민감한 주제는 피하면서 갖가지 인사치레를 주고받았다.

에디스가 혼담을 서두르지 않는데도 페이튼은 별말 하지 않았다. 서로 관조하는 상태일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도 느긋한 게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며 고즈넉한 시간을 가졌다.

얼마 후, 보기 좋게 정돈된 정원을 배경으로 몇 명의 사내가 총을 메고 지나갔다. 주인이 귀가해 응접실에 머무는 줄 몰랐던 듯 시시덕거리며 무심히 창 너머를 지나쳤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들이 멘 총은 흔히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황실 총사대의 전유물인 총과 비슷했다. 에디스가 새벽마다 쏘는 바로 그 스타일이었다.

클라이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연구한 끝에 제작한 무기는 전반적인 밸런스가 뛰어났다. 개머리판에 쓰이는 원목도 고가의 수입산이라 짙은 고동색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시중에는 여러 상회에서 만든 총이 팔리지만 어떤 것도 황실 총사가 쓰는 총에 미치지 못했다.

어떻게 황실의 물건이 이 집에 있을까? 잠깐 지나치는 바람에 다른 총을 잘못 봤을 수도 있다.

황실의 무기를 빼돌리지 않고 비슷하게 만들었다 쳐도 놀라운 일이었다. 에디스가 아는 한 일반적으로 거래되는 총 중에 황실 총사대의 모양과 닮은 건 없었다.

아무런 내색하지 않으며 에디스는 티 없이 방긋 웃었다.

“오랜만에 황실 주관으로 총사 대회를 연다네요. 페이튼은 혹시 관심 있으세요?”

찻잔을 입에서 떼는 페이튼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물론입니다. 대회와 연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시 그렇죠?”

“근 몇 년 만의 대규모 행사니까요.”

“이 기회를 틈타 뭔가를 해 보려는 사람도 많다더군요. 총사 대회에 지인을 내보낸다든지, 황실 연회에 쓰일 물건을 납품한다든지. 페이튼은 혹시 관여하는 부분이 있나요?

“물론 여러 가지로 하고 있지요. 말씀하신 두 가지도 포함입니다.”

에디스는 감탄사를 거하게 터뜨리며 존경스럽다는 식으로 눈을 빛냈다.

“오, 그래요?”

“연회에 쓰일 커피를 저의 상회에서 수주받았습니다. 부디 괜찮은 평가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잘될 거예요. 공식 석상에서 호평을 받게 되면 이후로는 날개 돋친 듯 팔리겠네요.”

곧이어 진짜 알고 싶은 내용을 넌지시 떠봤다. 영리한 페이튼이 제 속셈을 금방 눈치챌까 봐 조마조마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