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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39)화 (39/129)

39화

에디스는 기절했다가 갓 깨어난 사람처럼 해쓱해진 얼굴색이었다. 깨닫지 못하는 오메가 페로몬은 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흐으…….”

신음을 흘리며, 그가 에디스의 어깨에 이마를 눌렀다.

후각이나 촉각으로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지만 호소력 짙은 음색이 그녀를 자극했다. 한 뼘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거의 무너져 가는 상태로 에디스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어질어질한 기분이 체감하지 못하는 알파 페로몬 탓인지, 클라이드라는 남자 자체 때문인지 모호했다.

열린 창을 통해 때마침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둘 데를 몰라 방황하던 그녀의 손목 아래에 달린 레이스가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둘 사이의 뜨겁던 공기가 흐르는 짧은 순간, 에디스는 둥둥 떠다니는 이성을 겨우 끌어모았다.

“그만…….”

까칠하게 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더 해도 돼.”

“여기까지만 할게요.”

클라이드가 마지못해 이마를 뗐다. 열기에 마른 입술을 안으로 말며 잠시 침묵했다.

습윤해진 모습으로 바뀐 그가 속삭였다.

“입맞춤을 실험해 봐.”

음험한 느낌이 나게 쉰 목소리였다.

넋을 잃은 에디스의 몸뚱이가 저절로 움직여 그에게 키스를 훔칠 것만 같았다. 촉촉하게 벌어진 입술에서 잠깐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는 안 할래요.”

고개를 젓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왜?”

클라이드는 왜 자꾸 저를 곤란하게 하는 걸까. 몸을 들이대면서 맘껏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지를 않나. 치료 목적이라며 안심시키지를 않나.

저 섹시한 입술을 훔치지 않으려고 속으로는 인내심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있건만.

그녀는 머뭇머뭇, 입을 우물거렸다.

“그런 목적으로 첫 번째 입맞춤을 써 버리고 싶지는 않아서요.”

좌우로 폭이 넓은 그의 눈매가 잠깐 크게 뜨였다. 곧이어 눈두덩이에 힘을 줘 그림자가 더 깊고 우묵하게 드리웠다.

“반대로, 내 첫 키스를 빼앗는다고 생각하면 어때?”

“예?”

“에디스가 잃는 게 아니라 내 것을 가져가는 거야.”

당장이라도 그가 먼저 덤빌 듯이 넓은 어깨가 휘청거렸다. 꿈틀거리는 팔뚝은 그녀를 휘감아 당길 준비가 되어 있었고, 터질 만큼 두꺼운 근육의 허벅지는 에디스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달릴 수 있었다.

에디스가 첫 방아쇠를 당기기만 해 달라고 그가 말없이 호소하고 있었다.

“클라이드…….”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빙빙 도는 바람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무릎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댔던 등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하아…….”

결국, 그가 살짝 부축해 일으켰다. 한가득 끌어안는 행위는 아니었지만, 등허리를 예의 바르게 지탱하는 손길에는 숨기지 못할 원초적인 욕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천천히 가자.”

그녀의 등이 호선을 그리며 휘는 바람에 클라이드는 받친 팔뚝에 힘을 더했다. 부축한다는 명목하에 남자의 아름에 점차 압박이 강해졌다.

“기다릴게. 에디스가 편하게 날 사용할 때까지.”

알파 페로몬은 의식하지 못해도 진흙탕처럼 푹 잠기는 남성의 욕망만은 그득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길을 받는 내내 에디스는 혼란을 잠재우지 못했다.

자신의 취향이 외모를 상당히 따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접근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클라이드가 애매한 호감을 보인다거나 아드리안이 무척 적극적인 유혹을 하더라도, 저는 되도록 흘려넘기며 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클라이드를 만질 용기를 냈다.

접촉이 어색하고 긴장되는데도 결국 해 버렸다.

어쩌면 클라이드와 감정적인 거리감이 좁혀지고 있으려나?

그러면 아드리안은?

이런 생각이 들자, 양쪽에서 줄타기하는 기분이라 마음이 거북했다. 그들을 잘 맺어 주려는 욕심도 버리지 못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이 혼란스러웠다.

* * *

국정 회의에 못 보던 얼굴이 등장했다.

첫 참석을 기념해 황태자에게 인사드리는 모습이 신선했다.

“영광된 자리에 함께하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국의 번영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회의에 임하겠습니다.”

일상에서는 쓰이지 않는 격식체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내는 다름 아닌 페이튼이었다.

에디스에게 혼담을 넣었던 그 페이튼.

신진 귀족다운 진청색의 코트를 입은 그는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으로 귀족 진영의 중간에 섰다.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 화제가 다른 쪽으로 넘어가자, 그는 황태자 뒤에 선 에디스를 잠시 눈에 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알은체했다. 에디스도 턱을 내려 조용히 인사했다.

황태자의 짜증 섞인 말투가 곧바로 튀어나왔다.

“회의에 집중하지 않는 자가 있군.”

에디스는 범인이 아닌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 한해서만은 한없이 예리한 클라이드였다.

국정 회의는 제국의 핵심 인물만 참석할 수 있었다. 인원이 고작 열댓 명밖에 되지 않다 보니, 참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조차도 모두의 신상을 꿰고 있었다.

그중에는 서열상 당연히 참석해야 할 사람이 빠진 예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페이튼의 그레이브즈 가문이었다. 가주이자 제리번 공작인 그의 아버지가 외국에 체류한 탓이었다.

공작은 오래전에 실종 신고가 되었다고 한다. 페이튼이 그녀에게 혼사의 조건을 늘어놓을 때 자세히 설명해 줘서 알고 있었다. 그때 그는 서글픈 얼굴로 제 신세를 한탄했다.

‘부모님의 포부는 존경하지만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신대륙에 직접 가시다니요. 거기는 완전히 무법천지인데.’

‘페이튼, 마음 다잡고 있어요. 언젠가는 돌아오시겠지요.’

‘정말 돌아오실 수 있을까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해요.’

‘벌써 사망 신고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부디 살아 계시길 빌지만, 언제까지나 사업과 가문의 수장을 공석으로 남겨 둘 수만은 없어서요.’

‘저런, 사정이 심각한가 보군요.’

그녀는 혼사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위로해 줬다. 페이튼의 긍정적인 인상이 잠시나마 어두워진 게 못내 안쓰러웠다.

인제 와 날짜를 헤아려 보니 사망 신고할 시기가 지났다. 페이튼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로 공식적으로 못을 박았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공작 작위와 가문의 재산은 온전히 그의 차지가 되었다.

에디스는 그의 부모님이 생존해 계셨으면 한결 나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니, 페이튼이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울적하겠다고 짐작했다.

또한 아버지를 대신해 막중한 임무인 국정 회의에 들어와야 하는 상황도 사뭇 안되어 보였다.

페이튼이 지게 될 부담도 적지 않겠지. 웃어른의 도움이 없이 대외활동을 하자면 얼마나 힘들까.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며 첫 회의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그를 지켜보며 마음이 짠했다.

아무래도 따로 자리를 마련해 페이튼을 위로할까 보다.

이따금 에디스와 페이튼이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시선을 교환했다.

클라이드는 오늘따라 굉장히 심기가 불편했다. 올라오는 안건마다 언짢은 태도를 보였다.

“축제에 맞춰 빈민을 구제할 방법을 찾아오랬더니, 왜 여태 아무런 제안도 올라오지 않는 것인가.”

“다른 준비가 많아서 늦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회의에는 반드시 제출하겠습니다.”

“다른 행사에 앞서 빈민 구제부터 먼저 해야 하지 않나? 황실 연회는 착실하게 챙기면서 가난한 자들 배를 불리는 건 나중으로 미뤄?”

짜증을 머리 꼭대기까지 채우면서 해당 관리를 쥐 잡듯이 잡았다.

에디스는 이 화제를 뒤에서 메모했다. 자신이 챙겨야 하는 부분은 평소에도 잘 적어 두는 습관이 있어서였다. 황태자의 뒤에 선 채 손바닥만 한 기록지에 간단히 요점만 끼적였다.

때맞춰 몇몇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고개를 숙였던 탓에, 그녀는 회의실을 스쳐 지나가는 미묘한 변화를 모르고 지나쳤다.

하지만 페이튼은 옆에 선 사람의 행동을 우연히 목격했다. 그자의 눈동자가 재빨리 에디스에게 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그녀와 메모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에디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를 돕는 사람도 시종장이었고,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따금 뭔가를 적기만 했다.

그런데 그 메모가 핵심인 듯했다.

‘귀족과 관리 양쪽에서 에디스를 경계할 만하군.’

황태자에게 입김을 넣을 수 있다는 건 꽤 강력한 힘이다.

‘그 힘이 나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여기저기 눈치를 보는 페이튼의 시선이 바빴다. 자신이 에디스를 아내로 맞이할 경우의 이해득실을 세밀히 따져 볼 필요가 있었다.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위치는 그만큼 적도 많이 만든다.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면서 펜만으로 황태자를 쥐고 흔들었다가는 나중에 큰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패였다. 황태자가 직접 챙기는 측근이지 않은가.

페이튼은 에디스의 결혼 조건을 되새겼다.

그녀와 혼사를 계속 진행하는 게 좋을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자신의 위세가 확고해서 에디스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원하는 바를 그녀에게 주문해 황태자를 조종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하지만 갓 작위를 단 젊은 공작인 페이튼의 힘은 원숙한 대귀족 수장에 비해 한계가 있다.

자칫하면 여러 계층의 귀족부터 황실의 녹을 먹는 관리까지 모조리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뒷배경이 부실한 시종은 간단히 내쳐질 수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에디스는 황태자가 가장 총애하는 시종인 것을…….

버리기에는 아까운 카드다.

계속해서 귀족 진영을 향해 황태자의 묵직한 충고가 이어졌다.

“총사 대회와 축제, 연회 따위에만 집중하느라고 다른 부분을 소홀히 해선 곤란하네. 빅토르 경과 디트리안 경의 영지 사이에 치수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경과도 어떻게 되어 가는지 내게 전해 주게.”

“예, 전하. 조만간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리가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하네. 다음 회의에 기대하겠어.”

“어디까지 소식을 들으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최근 자료 위주로 가져오겠습니다.”

황태자는 시종장에게 문서를 건네받아 읽었다.

“3월 11일. 두 영지를 가로지르는 강에 대규모 제방을 설치하기 위해 첫 삽을 떴다. 하늘을 감동시킬 위대한 공사라며 온 나라에 자랑하고 두 가문의 위신을 세웠다. 하지만 첫 삽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가 선 자리에서 어렴풋이 종이 반대편이 비쳐 보였다. 분명히 여성의 글씨체였다. 치수 사업의 진척도를 확인한 사람은 에디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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