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38)화 (38/129)

38화

의사가 돌아가고 나자 에디스는 클라이드를 내버려 두고 응접실에서 먼저 나왔다. 당분간 개인 업무는 쉬기로 했으니 황태자의 공무만 수행하면 되었다. 구태여 그와 24시간 붙어 다닐 필요는 없었다.

바람이나 쐴까 하고 아무 데로나 발길을 향하려는데 곧바로 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디스.”

못 들은 척하고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참에서 제 팔꿈치가 강직한 손놀림에 붙잡혔다. 몸이 빙그르르 반 바퀴 돌았다.

“왜요.”

“어디 가.”

“오늘은 외부 일정이 끝났잖아요. 이제 자유 시간 아닌가요?”

클라이드의 반듯하던 눈매가 조금 구겨졌다.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일순간 평평하게 편 입술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속 좀 상하라지. 에디스는 의도적으로 삐뚜름하게 서서 그의 심사를 건드렸다.

그래도 싸다. 될 수 있으면 이보다 더 복수하고 싶었다.

“에디스가 시간을 자유로이 써도 되는 건 맞지만…….”

“그럼 팔 좀 놔주시겠어요?”

하지만 엇갈려 끼워진 팔은 풀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딴 데로 가 있으니 클라이드가 스스로 방향을 바꿨다. 쳐다볼 수밖에 없는 위치로 와서 허리를 절반 숙여 에디스를 기웃거렸다.

“왜 그러는지 알려 주지 않을래?”

불퉁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뺨을 클라이드의 손끝이 톡톡 건드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는 표정이 그녀를 마음 약하게 했다.

당분간 냉전 체제로 돌입하려고 했더니, 삐치기도 쉽지 않다. 소설의 세계관에서 첫손 꼽히는 절세미남이 얼굴을 들이대면서 물어보니까 묵비권 행사조차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에디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할 기회를 줘.”

그는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워했다. 빤히 노려보는 에디스의 태도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듯 끈질기게 관찰했다.

“전하…….”

“클라이드라고 하기로 했잖아.”

“클라이드.”

황금 같은 눈동자가 근사하게 빛났다. 에디스는 현혹되지 않으려고 침을 크게 삼켰다.

“전부터 찝찝했지만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요. 이번에는 안 되겠어서요.”

“뭔데?”

“내 몸 상태가 이상한 걸 눈치챘으면 나한테 똑바로 얘기해 줘야 맞는 거 아니에요?”

에디스는 조분조분 말을 이었다.

“한번 클라이드가 귀띔하긴 했지만 너무 불명확했다고요. 그렇게 넌지시 물어봐서 어떻게 내가 알아채요. 말로는 측근이네, 총애하네 하면서 정작 내 중요한 문제는 클라이드 혼자 알고 감춘 거잖아요.”

“그것 때문에 맘이 상했군. 미안해. 감췄다기보다는 확실치 않아서 그랬어.”

“전하가 나보다 내 컨디션을 정확히 짚어 낸 점은 고마워요. 하지만 의사하고 속닥거리는 건 좀 아니죠. 나한테 얘기했어야지요.”

“네 말이 맞아. 에디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전부 내 잘못이지.”

그는 너무나 순순히 사과했다. 약간 몰아붙이듯이 제가 묻기는 했지만, 이렇게 솔직히 머리를 숙일 줄은 몰랐다. 황태자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 누군가에게 잘못을 인정할 일이 좀체 없을 텐데. 클라이드의 태도가 무척 의외였다.

도리어 에디스가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가 적어도 약간의 변명은 할 줄 알았다.

상태를 처음 알아챈 게 제 덕분 아니냐, 의사 앞에 앉힌 사람도 저 아니냐 등등. 클라이드에게도 할 말은 많을 터였다.

하지만 뒤끝 없이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는 꽤 놀라웠다.

“내 주치의한테 따로 얘기해 둔 건 별거 아니었어. 에디스가 의사한테 베타로 확진을 받은 적이 없다는 얘기가 핵심이었지.”

“아, 그 부분은…….”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사과받다가 말고 클라이드의 배려를 엿보게 됐다.

의사를 찾아가지 못한 이유는 진료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학창 시절에 거의 없다시피 한 용돈으로 노트와 잉크 따위를 사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곤 했다.

그런 하소연까지는 클라이드에게 자세히 한 적이 없는데 어찌어찌 들켰나 보다. 의사와 조수들의 군단에 둘러싸여 왜 진작 의사에게 보이지 않았느냐고 질문받았더라면 되게 자존심 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에디스의 오메가 발현을 내 몸으로 돕고 싶다고 말해 뒀어. 네게 알파가 필요하다면, 가능하면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싶어서.”

또한 그는 필요 이상으로 솔직했다.

단정한 육체 안으로 품은 음심을 감추지 않았다. 팔꿈치만 살짝 잡았어도 온몸으로 그녀에게 뛰어들듯이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기다릴게. 날 써먹어도 돼.”

에디스만 허락하면 언제든 알파 페로몬을 뿜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무슨 부탁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시선과 열기가 자글자글 피어나는 체온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그가 숨을 훅 들이켜자 곧게 편 가슴이 부풀었다.

매서운 기세에 눌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게 됐다.

넓지 않은 계단참은 고작해야 몇 걸음 거리밖에 되지 못했다. 등을 벽에 기댄 채 모서리에 내몰린 모습으로 더 달아날 곳이 없나 난감하게 눈동자만 굴렸다. 스스로 물러섰으면서, 클라이드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제풀에 상상이 지나쳐 겁을 집어먹었다.

오른쪽 팔꿈치에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살랑거렸다. 한쪽에 활짝 트인 창문은 화창한 날씨를 궁 안으로 들이기 위해 전부 열려 있었다.

그의 얼굴에 깊은 음영이 졌다.

빛이 비치는 쪽은 찬란했다. 반대쪽은 음험한 악당처럼 어둠이 깊었다.

우뚝한 콧날을 중심으로 좌우를 상반된 이미지로 드러내면서 그가 속삭였다.

“내 무례함이 싫다면.”

귀가 쫑긋 세워질 만큼 감정이 풍부한 음성.

“네가 다가올래?”

살짝 잡혀 있던 팔꿈치마저 풀렸다. 그는 갈 곳 잃은 손을 들어 벽 모서리에 팔을 고였다.

늘씬한 육신이 에디스에게 기울어졌다. 앙다물어서 단단해진 턱은 그녀의 이마보다 높게 올라갔고, 긴 팔뚝은 에디스를 중심으로 후광처럼 둥그렇게 둘렸다. 벌서는 듯 꼿꼿한 자세의 그녀에게 클라이드의 그림자가 까맣게 드리웠다.

“에디스, 지금 난 약간 페로몬을 꺼냈어. 느껴져?”

숨을 크게 들이켰다. 페로몬은 원래 냄새는 물론이거니와 몸으로도 체감할 수 있다던데 저는 감각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전혀요.”

“그럼 만져 보면 어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가만히 멈춰 있었다.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황금 불꽃에 그녀가 델 것 같은데도 그저 응시하기만 했다.

“만져 봐.”

당황스럽다. 어찌해야 할지.

“어딜요?”

“아무 데나.”

페로몬은 곧 유혹이라고 했다. 전혀 알파 페로몬의 느낌이 없지만, 오로지 홀리는 기분만으로 봤을 때는 클라이드가 뭘 호소하는지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물질적으로 변화를 깨달아서가 아니었다. 그의 행동과 분위기가 에디스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만져도 좋다는 말에 솔깃했다.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의 매끈한 콧날과 움푹 들어간 눈 앞머리를 만질 수 있다니. 촉감 덕분에 페로몬을 느낄 수 있다면 잘된 일이고, 느끼지 못한대도 괜찮다. 감정적인 빚을 지지 않으면서도 클라이드와 접촉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을까? 마음 한구석에 망설임이 남았다.

페로몬을 핑계로 그를 더듬어도 될지.

“에디스, 괜찮아. 이건 치료를 위해서야.”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속살거렸다. 에디스가 원하는 마음의 변명을 말로 대신해 줬다.

“그러면…….”

태연함을 가장해 대답을 툭 던졌다. 아무 감흥이 없는 척 손을 올렸다.

하지만 육체는 거짓말하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모두 봤다. 가쁘게 숨을 달싹거리는 그녀의 가슴 앞으로 긴장한 손끝이 갈피를 못 잡아 멈칫거리고 있었다.

겨우 손을 위로 끌어올려 옷깃을 붙들었다. 옷을 잡는 것만으로는 별로 도움이 못 될 텐데 왠지 기분이 달랐다.

목덜미가 홧홧해지는 게 페로몬을 느낀 탓일까. 아니면 개미지옥처럼 그녀를 끌어들이고 있는 클라이드의 농밀한 분위기 탓일까.

손끝이 더 올라갔다.

그녀는 날렵하게 선이 도드라진 턱을 손가락 마디로 살그머니 어루만졌다.

황금안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 번뜩였다.

“더.”

에디스는 홀리듯이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콧날을 따라 검지 지문을 가볍게 미끄러뜨렸다.

멀리서 볼 때는 조각 같더니, 직접 만져 보니 다른 점이 있었다. 이 얼굴은 체온이 있는 조각이었다. 따끈한 목선에 손바닥을 댈 때 빠르게 투덕거리는 맥박도 느껴졌다.

조금 입술이 벌어진 입가를 엄지로 살그머니 만졌다.

도톰하게 살이 많은 입술이 움직였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한결 더 벌어졌다.

충동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더.”

탐닉하던 감각이 놀라 파드득 뛰었다. 잔뜩 긴장한 탓이었다.

촉촉한 입가를 지나 콧방울을 매만졌다. 우묵하게 팬 눈 앞머리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는데, 그는 반사작용도 잊었는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클라이드의 시선에 사로잡히는 느낌이었다.

에디스는 아주 조심스레 눈 아래 살을 훑었다. 그러다가 공연한 망상을 했다. 눈알을 만져도 그는 꿈쩍하지 않으려나? 너무 자신을 내맡기려는 분위기라서 잠시 궁금해졌다.

하지만 실험해 보지는 못했다. 눈썹을 한 가닥씩 쓸어 올릴 때 베일 듯 선명한 시선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였다.

표류하는 감정을 추슬러 겨우 손을 내리자, 그는 손가락보다 더 큰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노란 안광을 빛냈다.

클라이드가 벽을 잡은 손을 뿌드득,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주먹 쥐었다.

“하, 이런.”

“왜요?”

“실수해 버렸어. 페로몬을 한꺼번에 많이 흘렸는데, 에디스는 어때?”

벼랑 끝에 선 아찔한 기분과 함께, 온 세상에 클라이드 한 명밖에 없는 듯한 착각이 페로몬에 기인한 걸까.

“잘 모르겠어요.”

“아직 느낄 수 없나 보군. 나는 오메가 향을 확실히 맡고 있는데.”

“내 향기가 나요?”

길게 선 그의 목선 중간에서 톡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로 올라붙었다. 마른침을 삼킨 클라이드의 음색이 왠지 모르게 달뜨게 들렸다.

“엄청…… 달콤하고 탐스러워.”

버티고 인내하다가, 드디어 그가 고개를 내렸다.

“못 참을 만큼. 도저히 주체하지 못할 만큼.”

짙은 그림자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따금 새어 들어오는 그의 등 뒤 햇살은 찌르는 듯 날카로웠다.

끌어안지는 않았지만 뜨끈하게 열 오른 체온이 전해졌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자세만으로도 그가 역력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그러할까. 덜덜 떨리는 손목을 숨겨 봤자 소용없지는 않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