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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37)화 (37/129)

37화

에디스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도 어려웠다. 말했다간 헛꿈 꾸지 말라는 얘기나 듣겠지.

자신이 에디스가 아닌 다른 존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감정은 잃어버렸지만 지식은 대부분 뇌에 남아 주변 사람을 몰라보거나 하지도 않으니, 누구도 그녀에게서 괴리감을 찾지 못했다.

기질의 문제를 조금 더 고심해 봐야 할 듯했다.

우선은 의사와 약속을 잡았다.

단둘이 만나 결과를 들을 생각부터 했지만, 클라이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의사를 따로 불러 얘기를 듣든지 하겠지. 무슨 치료가 진행되든 그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에디스의 기질을 비공개로 해 봤자 소용도 없거니와, 딱히 감출 일도 아니었다. 같이 의사를 만나겠느냐고 물으니 그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오늘따라 조수를 여러 명 데려왔다. 에디스와 초로의 의사가 마주한 가운데 그 뒤로 10여 명의 젊은 의사가 잔뜩 몰려와 섰다. 그녀 옆에는 마치 보호자처럼 클라이드가 버티고 있었다.

“케츠모리스 경,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워낙 희귀한 사례라 샘플을 신중히 검사했습니다.”

“어떻게 결과가 나왔나요?”

의사는 클라이드를 한번 흘끔 쳐다본 후 진지한 어조로 설명했다.

“잠재적 오메가……. 그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잠재적이라니요? 그런 것도 있어요?”

“일단 지금은 베타가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 바뀔지 모르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조수들은 희귀 사례를 참관하면서 에디스에게 깊은 관심을 내비쳤다. 그중 알파인 사람 한 명이 그녀의 체향을 맡아 보려고 주춤주춤 옆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황태자의 매서운 눈초리를 맞닥뜨리고 재빨리 물러섰다.

곤란해진 의사가 잠시 헛기침했다. 추가로 설명이 이어질 때는 한결 정중해졌다.

“알파와 오메가, 베타를 나누는 기준은 누구와 만나 아이를 가질 수 있는가로 정의합니다. 베타인 케츠모리스 경은 현재 남성 모두에게서 임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누구와도 임신할 수 없지요.”

“보통 베타와 마찬가지라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오메가로 발현한다면 상대가 달라집니다. 남성 모두, 그리고 여성 중에서 알파와 만나 임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다시 말해서 경은 베타도 오메가도 아닌 애매한 몸을 가졌으면서, 임신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베타입니다. 의학상으로 베타라는 말씀입니다.”

“내 몸이 어떻게 애매한데 그러시죠?”

의사는 쥐고 있던 펜을 두드리면서 강의하듯이 차분히 얘기를 이어갔다.

“무엇보다 경은 페로몬을 뿜을 수 있습니다. 충분한 양의 오메가 페로몬이 몸속에 있어요. 그것도 상당히 우월한 자질의 페로몬이지요.”

“전 뿜어 본 적이 없는걸요.”

“할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무의식중에 뿜었는데 본인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요.”

“으음, 그러면 역시 페로몬을 뿜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살아온 쪽이겠네요. 인제 와서 기질 얘기가 나온 걸 보면요.”

고심하면서 낸 에디스의 말을 듣고, 그동안 묵묵히 있던 클라이드가 나섰다. 어깨를 약간 기울이면서 관찰하듯이 그녀를 훑었다. 진중한 음성의 입이 열었다.

“내가 맡은 적이 있네. 그때 경은 깨닫지 못하는 듯하더군. ”

“정말이요? 내가 언제 그랬죠?”

“꽤 여러 번이었어. 특히 내 알파 페로몬에 격렬히 반응했지.”

“알파 페로몬에…….”

“페로몬 제어도 당연히 되지 못했고.”

의사가 클라이드의 경험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트에 길게 메모하며 중얼거렸다.

“제어가 되지 않는다라…….”

“향은 피부에 코를 대고 집중해서 맡아야 할 만큼 미약해서, 아직까지는 곁에 두고 지켜만 봤네.”

“알겠습니다. 이 부분도 연구에 포함해야겠습니다.”

황망해진 에디스의 시선이 의사와 클라이드를 오락가락했다.

이곳 세계의 4년 차 베타인 그녀조차도 페로몬 제어 문제에 관해서는 웬만큼 정보가 있었다. 오메가의 기질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건 상식이었다.

오메가가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의 불상사는 아주 심각했다. 이따금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될 때도 있었다.

“어떡하지요? 제어가 안 되면 큰일 나는 거잖아요.”

때와 장소에 적절치 못하게 다량의 오메가 페로몬을 흘리면 당연히 알파가 꼬여 들게 된다. 알파는 유혹의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고, 본능에 이끌릴 수도 있다. 페로몬이란 물질은 언어보다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따라서 자칫 잘못하면 처음 보는 알파가 돌연 에디스를 덮치게 될지 모른다. 몸을 빼앗길 위험은 물론이거니와 심하면 여러 알파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범죄로 이어지는 최악의 사례가 차근차근 에디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색이 차츰 어두워졌다.

“경, 지금 한번 제어해 보시겠습니까? 페로몬을 분출하고 갈무리해 보세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금은 베타라면서요.”

“감추어진 페로몬이 있는 희귀 사례의 베타지요. 페로몬을 내는 방법은…… 흠,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의식해 보십시오.”

에디스는 일단 시키는 대로 시도해 봤다. 두 주먹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끙끙대면서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나는 오메가다. 페로몬을 에너지처럼 뿜어낼 수 있다. 그렇게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마치 일반인이 마법을 쓰려고 애쓰는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응접실에 엉뚱하게 앓는 소리만 작게 들릴 뿐, 긴 정적이 이어졌다. 다들 끈기 있게 에디스의 도전을 기다려 줬지만 끝내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보다 못한 클라이드가 작게 혀를 찼다.

옆으로 고개를 내밀며 에디스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했다.

“에디스, 힌트 좀 줄까?”

클라이드는 근엄한 황태자의 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장난기조차 일절 없었다. 그런데 입으로는 전혀 다른 얘기가 튀어나왔다.

속닥속닥, 그의 입바람이 귀를 간질였다.

“야한 생각을 해 봐.”

퍼뜩 놀란 에디스가 몸을 뒤로 젖혔다.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동공이 주변을 흘끔거렸다. 의사가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클라이드, 이놈의 자식. 성질대로라면 한 대 쥐어박아야 속이 시원할 텐데. 보는 이도 많은 데다가 황태자라는 신분의 벽 때문에 제 가슴만 쳐야 했다.

“전하, 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와 입 맞추는 상상을 해 보면 어때?”

의사와 조수들이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 리가 있나. 엄한 분위기에서 차마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것도 클라이드를 상대로라니!

붉으락푸르락하는 에디스의 안색을 잠시 지켜보던 의사는 클라이드와 비밀스러운 시선을 교차했다.

“네, 그럼 이쯤에서 넘어가도록 하지요.”

안경을 고쳐 쓰며 좋은 말로 그녀를 다독였다.

“당장 제어하지 못한다고 해서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치료와 훈련을 병행하면 나아질지도 모르니까요. 우선 케츠모리스 경은 사춘기에 발현 직전의 오메가가 보이는 몸 상태와 유사한 부분이 많거든요.”

“발현 직전이요?”

이 세계의 사람들은 사춘기에 월경이 시작되기에 앞서 기질이 발현한다. 월경보다 나중에 알파나 오메가가 되는 예는 없다. 여성으로서 알파가 되면 기본적인 난자와 더불어 정자를 생성하고, 남성으로서 오메가가 되면 원래의 정자와 더불어 난자를 생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식 발달이 이루어지는 사춘기 이전에 기질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지만 이대로 베타로 남아 있으면 경이 페로몬을 제어하기 힘듭니다. 하루빨리 완전히 오메가로 변화하는 편이 유리할 것 같군요.”

검사 결과를 두고 얘기를 나누자니 제가 난치병 환자라도 된 느낌이었다. 덩달아 마음도 조급해졌다. 낯선 알파에게 공연한 봉변이라도 당하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했다.

아무 전제조건 없이 기질을 선택하라면 베타가 좋지만, 잠재적 오메가로 드러나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오메가로 발현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는 십 대 초반의 나이가 되면 저절로 피어나는데 경은 그 범주를 넘어섰으니까요. 다른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거라면…….”

의사의 마지막 한마디는 에디스가 아닌 클라이드를 보고 던져졌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알파와의 접촉이 최선이겠습니다.”

발갛게 달아올랐던 그녀의 얼굴색에 이젠 핏기가 가셨다. 사태가 만만치 않음을 체감해야 했다.

줄곧 에디스를 뺀 두 사람이 몰래 눈빛을 주고받아 오다가 이번에는 확실히 들켰다. 의사가 정면으로 얘기한 탓이었다. 심증을 확증으로 굳힌 그녀는 클라이드에게 다그쳤다.

“전하, 혹시 이 일에 개입하셨습니까?”

“개입이라니. 전혀.”

“그런데 왜 의사가 전하에게 얘기하지요? 환자는 저인데.”

“그건…….”

의사가 서둘러 변명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지난번에 전하께서 경의 치료를 돕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잘됐구나 싶었고요. 다른 오메가처럼 미성년자일 때 발현하면 써 볼 수 없는 방법이지만, 경은 성인이니까 페로몬 샤워도 가능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너무 극단적인데요.”

“원치 않으면 이대로 용태를 지켜봐도 됩니다. 아직 오메가 페로몬이 짙지도 않고요. 안전 문제는 경호원을 잘 두고 평소에 외출을 조심하길 바랍니다.”

“…….”

“하지만 알파 페로몬이 오메가 페로몬을 불러일으키는 건 변함없는 진실입니다. 전 절대 케츠모리스 경을 속이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옳은 말 같았다.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호응하는 원칙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의 순리에 맞다.

아무래도 클라이드가 진료하는 틈틈이 자신을 언급해 달라고 했으려나. 음흉한 녀석. 조금 얄미워서 그를 흘끗 째려보다가 외면했다.

“경에게 일단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발현을 촉진하는 약인데, 주성분은 알파 페로몬입니다.”

“감사해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원하는 만큼 약효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릴 약은 정상적인 사춘기 발현자들을 돕기 위한 약이거든요.”

“차라리 페로몬을 억제하는 건 어때요?”

“경은 이미 페로몬이 너무 억눌려 있어서, 더 억제했다가는 나중에 한꺼번에 활화산처럼 터질 겁니다. 손쓸 수 없을지도 몰라요.”

에디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반적인 흐름은 알파 페로몬을 이용하는 게 맞는 듯했다.

에디스는 약을 먹는 방법과 페로몬 샤워 중 어느 쪽이 나은지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당장 죽을 병도 아닌데 오메가 발현을 위해 무리한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페로몬 샤워는 보류다. 나중에 좋아하는 알파를 만나면 그때 시도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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