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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36)화 (36/129)

36화

황제가 몸을 누인 침실은 어두웠다. 휘장이 드리운 침대 안쪽이 컴컴했다.

은은하게 향을 피우고 창문도 열어 놔 둔 덕분에 분위기는 제법 평온했다. 단둘이 독대하는 자리에 얼씬거릴 궁인도 없었다. 황제의 궁은 철저히 클라이드의 손안에 있었다.

단단하게 문이 닫힌 침실에서, 그는 아버지에게 어떤 말도 걸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며 딴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이 되어서야 휘장을 슬쩍 들어 봤다. 그가 안배해 둔 대로 변함없이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방부 처리가 되어 바싹 마른 시체가 흰 천에 덮여 있었다.

그는 천을 들쳐 아버지의 시신이 온전한지까지 눈으로 본 후에야 물러났다. 완벽히 청소되어 있고 진갈색으로 변한 표면까지 지난주에 체크한 그대로였다.

늘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물러나곤 했지만 오늘만은 시신에 한마디 하고 싶었다. 에디스라는 든든한 아군이 생겨 제멋대로 감격에 겨워서였던가.

“언젠가 제힘이 닿는 날 폐하를 영면의 자리까지 모시겠습니다.”

총사 대회를 계기로 자신의 입지가 확고해지면 지금의 어정쩡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황제께서 서거하셨다고 공표할 수 있고, 자신이 외압을 받지 않는 상태로 황위에 오를 날을 절치부심 기다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점이 너무 일렀다.

기세등등한 귀족들한테 클라이드가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암살 후 석 달도 버티지 못했다.

슬픔보다는 눈앞에 닥친 현실이 가혹했다. 무너질 것인가, 감출 것인가의 기로에서 클라이드는 모진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편히 계십시오. 다시 오겠습니다.”

휘장을 내리고 미라가 된 시신에서 등을 돌렸다.

황제의 궁에서 보다 중요한 일은 입단속이었다. 비밀을 아는 궁인들은 일일이 직접 만나고 근황을 들었다. 실질적으로는 이 과정을 거치기 위해 매주 들르는 거였다.

그중 황제를 닮은 자와도 빼놓지 않고 얘기를 나눴다.

꼭 필요할 때 외부 행사에 내보내는 목적으로 둔 궁인이었다. 민얼굴은 아버지와 조금 다르지만 분장하면 몇 걸음 간격에서도 구분하기 힘들 만큼 비슷해질 수 있었다.

납골당처럼 조용한 황제의 궁에서 클라이드의 주간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 추가 공지☆]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다시 돌아온 작가입니다. 그동안 작품을 야심 차게 재정비했습니다. 다시 연재하는 이야기, 부디 재미있게 봐 주세요.]

오, 다행이다. 원작이 비공개로 바뀌어서 많이 걱정했는데.

지난번 공지에서는 작가가 설정을 고치고 수정도 많이 할 것처럼 얘기하더니, 얼마나 달라졌나 궁금한걸.

에디스는 평소보다 일찍 이부자리를 비집고 들어간 저녁에 침대 캐노피에 또박또박 떠오르는 한글을 읽었다.

잠이 오지 않아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원작의 공지를 따라갔다.

[아드리안을 남겨 두고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시종 에디스와 함께 모퉁이를 돌 무렵, 멀리에서 다급한 구두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이었다. 아드리안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듯 사뿐히 날아 그의 품에 안겼다.]

어라, 어딘가에서 본 장면인데?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을까요? 할 얘기가 있어서.”]

[“아드리안, 나도 헤어지기 아쉽군. 어쩐다지?”]

[“전하…….”]

이건 며칠 전에 아드리안이 궁에 들렀을 때의 일이잖아.

그것도 클라이드의 시점으로.

새로 올린 이야기에 그때의 일이 들어 있다니. 어쩌면 이럴 수가.

예전에 목격했던 홀로그램과 이번 것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4년 전에 본 원작은 에디스의 시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나중이다. 미래에 펼쳐질 일을 예상하고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에피소드는 지난 일이다. 자신이 이미 경험한 사건.

다음 회차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과거 사건이 쓰인다면 에디스의 입장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

가만있자……. 다시 보니 약간 이질감이 느껴진다.

아드리안과 클라이드가 저 글과 비슷한 말을 하긴 했어. 토씨 하나까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말이야.

하지만 같은 듯 다른 묘한 느낌은 뭐지?

[클라이드는 아드리안의 그렁그렁한 눈매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대신에 아드리안이 한껏 올린 팔을 그의 목덜미에 감았다. 아이리스꽃을 연상시키는 오메가의 향기 덕분에 기분이 들떴다. 술렁거리는 감각과 함께, 그는 비로소 만족감이 차올랐다.]

달라! 확실히 다르다!

이질감이 뭔지, 이번 대목에서 확실히 짚어 낼 수 있다.

두 사람은 가짜 연인 행세를 하는 중이다. 클라이드가 아드리안에게 들뜬 기분을 느꼈을 리가 없다.

원작 속의 지문은 실제가 아니다.

보이지 않게 감정이 달라졌으리라는 전제도 하기 힘들다. 어제만 해도 에디스가 아드리안 얘기를 잠깐 하자 클라이드가 투덜거렸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일이야?’

평행이론, 뭐 그런 건가?

다른 세계의 클라이드와 아드리안은 원작처럼 알콩달콩하고, 이곳 세계는 그렇지 않은?

‘내 예리한 촉으로는 말이지. 마치 옆에서 본 누군가가 적은 것 같아.’

이 세계가 원작의 세계와 같다는 전제 아래에 생각해 보자면, 저 글은 심하게 이상하다. 작가가 캐릭터의 심리를 모를 수는 없다. 그런데 잘못 알고 있다.

그날 클라이드가 보여 주기식의 행동을 했을 때, 첩자가 그 모습을 보고 글을 쓴 느낌에 가깝다. 세계의 창조주인 작가가 아니라 구경하는 관객 같다.

그것도 전부를 보는 게 아니고 일부만.

아드리안이 에디스에게 귀띔해 줬던 순간을 작가는 혹시 못 본 건가.

말도 안 돼!

전부 다 말도 안 되는데, 눈앞에 떠다니는 홀로그램도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아드리안, 내일 보지. 되도록 일찍.”]

[잠깐의 헤어짐이 아쉬워 눈꼬리에 물기가 맺히는 아드리안을 마주하며 클라이드는 마음이 무너졌다. 거듭 각오를 다지게 됐다. 그를 황태자비로 맞이는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은 가만히 두지 않…….]

한글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알아내야 할 게 태산 같은데 벌써 힌트가 끝났다.

에디스는 공연히 허공을 짚었다. 아무 소용 없음을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허튼 행동을 했다.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너무나 궁금한데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원작 홀로그램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만 많고 잠은 오지 않았다. 부스럭부스럭 몸을 뒤척였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아까 에디스는 클라이드에게 강력히 요청했다. 총사 대회를 위해 연습하기만 하면 되니까, 구태여 별실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달리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내 줬다.

아마 이대로라면 꼬박꼬박 이른 귀가를 할 수 있을 듯했다. 대외적인 공무를 수행하는 것 외에는 사격 연습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썰렁하고 낡은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올리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새벽 훈련 시각에 맞춰 사격장에 가기만 하면 된다. 하녀 여러 명에게 저를 일찍 깨우라고 신신당부해 뒀고, 시계도 정시를 가리키는지 확인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가. 원작 소설을 읽어서인가.

오만가지 상상과 고민을 하던 에디스는 황태자의 침대에서보다 훨씬 늦게 잠이 들었다.

* * *

“케츠모리스 경?”

결혼도 안 한 처자의 침실에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근사하게 울려 퍼졌다.

“경, 지금 몇 시인 줄 아나?”

그는 에디스의 귀에 익지 않은 호칭을 한참이나 부르다가 종국에는 짜증이 났는지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익숙했다. 어제도, 그제도 이 손길로 아침을 맞이했다.

“으응.”

“일어나야지? 일정에 늦겠어.”

그녀의 손을 쥐는 남자의 손아귀에 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기분으로 분개하려는 상태를 손에 세게 힘을 줘 움키는 것으로 대신한 느낌이었다.

까슬까슬한 이불이 목덜미를 긁는 바람에 이곳이 어제와 다른 침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집에서 잠들었더랬지.

근데 왜 저 남자가 여기에 있을까.

“클라이드?”

무복을 날렵하게 갖춰 입은 그는 새벽 훈련을 마치고 온 분위기였다. 편치 않은 기색을 드러내며 한쪽 눈썹을 삐죽이 들어 올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더군.”

“핫, 지금 몇 시예요?”

“해 뜬 지 한참이야. 당장 나가도 신료 접견 스케줄에 아슬아슬할 정도지.”

그의 어깨 너머로 안절부절못하는 하녀들이 넘겨다 보였다. 저들도 늦잠을 잔 건지, 깨웠는데 자신이 못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대박 지각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런…….”

등에 용수철이 달린 양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아침 준비를 하는 동안 클라이드는 문가에 기대어 선 채 기다렸다. 팔짱 낀 손끝으로 제 팔뚝을 툭툭 두드리며 무언중에 그녀를 재촉했다.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출발 신호를 했다.

“사격장에서 새벽 내내 기다렸어.”

“죄송해요.”

“총사 대회까지는 아직 시일이 넉넉하지만, 이제 막 총을 잡기 시작한 에디스가 여유를 부릴 입장은 아니잖아.”

“…….”

“궁보다 훨씬 먼 케츠모리스 가에서 사격장까지 출근하겠다고 할 때부터 불안했어. 오는 시간도 만만치 않을 텐데.”

“…….”

대지의 기둥 언덕에서 황궁까지 그다지 거리가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에디스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다. 황태자를 바람맞힌 죄인이 무슨 말을 하랴.

“못 일어날 것 같으면 차라리 나한테 맡기든지.”

아니나 다를까 이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내일은 절대 늦지 않을게요.”

“아냐, 괜히 무리하지 마. 내 방에서 편히 자고, 같이 일어나서 움직이자.”

클라이드를 태운 말이 앞장서서 달렸다. 서둘러 궁으로 향하는 길에 실랑이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고작 하루만 귀가에 성공한 후, 에디스는 다시 직장 숙식의 구렁텅이로 돌아오고 말았다.

* * *

에디스의 샘플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심경이 복잡했다. 기질이 바뀌는 원인을 여러모로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기껏 예상할 수 있는 건, 다른 세계의 자신이 에디스가 됐다는 점이었다.

원작과 다르게 진행되는 많은 사건이 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공통점으로 따져 볼 때 오메가로 의심되고 기질 검사까지 하게 된 까닭은 혹시 육신 안에 다른 실체가 들어 있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이건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었다. 오메가 기질은 신체적 특징인데, 영혼이 바뀐다고 해서 신체까지 달라지진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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