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첫 발을 쏜 클라이드는 무감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다.
“에디스, 앞으로는 꼬박꼬박 나랑 새벽에 나오도록 하지. 항명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봐.”
지엄한 황태자의 명까지 들먹이다니. 치사해.
이런 식으로 결정 나 버리니 더는 조르거나 버틸 수가 없었다. 된통 잘못 걸린 느낌이었다. 새벽도 되지 않아 어둡던 기상 시각을 떠올리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사이 시원스러운 사격이 계속되었다. 사로에 서서 목표물을 겨냥하는 클라이드의 모습이 근사했다. 허우대만 보면 참 멀쑥하고 나무랄 데 없었다. 운동하기 싫다는 사람을 구태여 끌고 나온 게 문제지.
그래, 무를 수도 없는 일.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비록 새벽의 격렬한 달리기보다 늦은 오후의 산책이라면 육체적 건강과 더불어 정신 건강에까지 훨씬 도움이 됐겠지만.
몇 발의 사격을 구경하노라니, 언뜻 클라이드의 콧노래까지 들려왔다. 저를 데리고 나와서 무척 흥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에디스를 위한 새벽이 아닌 듯하다. 혼자 일어나기 싫어서가 확실해.
그래도 총쏘기는 재미있어 보였다. 내친김에 사격장 관리인에게 청했다.
“저도 한 자루 주시겠어요?”
장전된 총을 건네받은 그녀는 지난번에 배운 기억을 되살려 받침대를 세웠다. 클라이드가 사격을 멈추고 에디스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의 지대한 관심 속에 목표물을 정한 후 자세를 잡았다.
“혼자 괜찮겠어?”
“안전 수칙은 잘 기억하고 있어요. 사고만 안 나면 되는 거잖아요.”
“물론 그렇기야 하지.”
예전에 클라이드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해서 정신없이 배우긴 했지만, 필요한 부분은 잊어버리지 않고 제대로 기억했다. 가늠자 너머로 목표물을 주시했다.
규칙만 잘 따른다면, 잘못해 봤자 빗맞히기밖에 더 하랴. 위험한 무기를 다루며 엉성하게 행동해선 안 되니 차분하고 꼼꼼하게 총을 다뤘다. 특히 클라이드가 빤히 지켜보고 있어서 허술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지난 경험만을 살려 첫발의 총구를 저 멀리 설치된 구조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호흡하다가 숨을 멈췄다.
지금이구나 싶은 순간,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맞혔다. 지푸라기가 담긴 헝겊 주머니가 펑 터졌다.
견고한 기둥에 고정해 놓았던 목표물은 총탄에 꿰뚫려 사방으로 흩날렸다. 둥근 주머니 속에 짤막하게 자른 지푸라기가 잔뜩 들어 있어서 맞히면 폭탄처럼 터졌다. 명중했다는 걸 확실히 보여 주기 위한 장치였다.
“와……. 에디스, 정말 잘하는걸.”
에디스는 공터 달리기의 여파로 아직 호흡이 가빴다. 손끝도 조금 떨리고 균형감각도 완전한 정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맞혔으니 다행이다.
“재미있네요. 한 발 더 쏴도 되죠?”
“얼마든지.”
목표물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클라이드가 조준하는 곳은 활 쏘는 과녁처럼 동심원이 그려진 종이였다. 숙련도에서 차이가 있다 보니까 에디스보다 그가 확연히 잘 쏘기는 했다.
둘이 번갈아 가며 사격 연습을 계속했다. 그는 도중에 자신의 총을 내려놓고 에디스를 코치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명사수가 되겠어.”
에디스는 조금 뻐기는 기분이 되어 명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상관은 훌륭하다.’ 뭐 그런 말을 하려는 건가요?”
“있는 그대로의 감상이야. 진심으로.”
너무 띄워 주기만 하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장난치는 건가? 제 생각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은 솜씨인 듯하지만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열광적이었다. 더는 맞장구쳐서 잘난척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클라이드는 제 턱을 손끝으로 훑으며 그녀의 사격을 유심히 관찰했다.
“집중력이 뛰어나서 그런가. 확실히 재능이 있어.”
“내가 집중력이 뛰어나요?”
“모르는 척한다면 에디스야말로 내숭이잖아.”
“아닌데요! 덜렁댄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요.”
“그것도 사실이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 집중하는 힘이 뛰어나. 네 강점이기도 하지.”
왜 자꾸 칭찬만 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이기는 한 것 같았다. 그녀는 감사의 뜻을 담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대기 중이던 궁인에게 지시했다. 이제부터 에디스가 쏘는 사격은 모두 기록하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열 발을 쏘도록 준비시켰다.
대체 왜 이러지? 열 발 중에서 아홉 발이 짚 주머니를 터뜨리자 클라이드는 결심한 듯 깊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에디스는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군.”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부터 넌 총사 대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거든.”
“……네?”
“일단 열 발을 더 쏴 봐.”
추가 사격을 모두 마칠 때까지 클라이드는 묵묵히 기다렸다. 기록지에는 벌써 스무 발의 데이터가 쌓였다. 팔짱 끼고 상황을 지켜보는 그의 안색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이번에도 아홉 발을 명중하자 그가 곤란한 듯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아무래도 에디스밖에 없겠어.”
“설마 진심이세요? 내가 총사 대회를?”
“원래는 내가 신분을 위장해서 출전하려고 했어. 하지만 대회장에는 날 아는 사람도 많을 텐데. 1차전에 나타나기만 해도 발칵 뒤집히겠더군.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는 건 좀 무리죠.”
“그래서 다른 대책을 여러모로 생각 중이었는데…….”
그가 에디스를 빤히 쳐다봤다. 시선 속에 답이 있었다.
망연자실해진 그녀는 자신의 코끝을 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눈은 댕그랗게 부릅떴고, 얼굴색은 질겁하느라고 허옇게 들떴다.
“그래서 전하 대신 나를?”
그의 어깨가 묵직하게 내려갔다. 기필코 해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으로 그녀가 세게 외쳤다.
“싫은데요!”
생초보한테 대회에 참가하라니. 전문적으로 총을 다루는 자들 틈바구니에서 싸우라니.
총사 대회는 황실의 권위를 내세우는 축제이면서, 동시에 상비군 총사대를 선발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당연히 총 좀 쏜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많이 지원했다. 이 제국의 전반적인 사격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녀의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절대 만만치 않을 게 분명하다. 아마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 사격 종목을 떠올리면 되려나.
그녀가 도리질 쳤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 클라이드는 강렬한 눈을 빛내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에디스, 이번 총사 대회는 아주 중요해. 이번 기회에 내 입지도 확고히 해야 하고, 군비 문제로 꼬투리를 잡는 권신들을 압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해.”
“알기는 하지만.”
황태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력 다툼은 누구보다 에디스가 잘 알았다. 맨날 읽고 쓰는 문서가 그거니까.
그래서 총사 대회라는 말도 안 되는 클라이드의 제안에도 차마 강력히 거절하지 못했다.
“에디스한테 우수한 성적을 바라는 게 아니야.”
“그러면 왜 나한테 나가라는 건가요?”
“대회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감시하는 역할이 필요해. 그래서 내가 직접 참가할까 싶었던 것이고.”
“감시 역할이요?”
“근위대에서 한 명 뽑아 내보낼까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런데 경호에 특화된 자들보다는 대회의 전반적인 사정을 아는 사람이 낫겠다 싶어.”
“그게…… 나인 거예요?”
클라이드가 그녀의 팔뚝을 양쪽으로 잡았다. 부담스럽게 얼굴까지 들이대며 열심히 말을 보탰다.
“성적은 절대 중요치 않아. 나는 객석에서, 에디스는 선수석에서 진행 요원이 된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하지만 영 자신이 없는데.”
“에디스, 대회를 망치려고 벌써부터 물밑 작업을 하는 자도 있어. 정황이 포착됐다니까. 그러니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에디스가 읽은 최신 동향 보고서에 총사 대회를 꺼리는 세력의 정보도 있었다. 그녀는 누가 적극적으로 대회를 망치려 드는지 명단까지 뽑을 자신이 있었다.
고군분투하는 클라이드의 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황제는 앓아누운 지 몇 년이나 되었고 누나는 암살당해 황실에서 그에게 힘을 실어 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황태자의 측근이 여럿 있지만, 에디스가 봐도 자신이 가장 그와 비슷한 정치적 안목을 가졌고 믿을 만했다.
대꾸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난 초보자이고.”
“내가 가르쳐 줄게.”
“일도 많고.”
“대회까지는 아무 보고도 안 받을게.”
“……정말요?”
“황태자의 이름을 걸고 보장해. 별실 책장은 건드리지도 마.”
귀가 번쩍 뜨였다. 이것만은 대단한 희소식이었다.
거의 다 넘어가는 와중에 문서작업까지 면제해 주겠다니, 자신감이 없는 도전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인 얘기였다.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그를 위아래로 흘겨봤다.
“정말이죠?”
“정말이라니까.”
끙, 신음을 흘린 후 결심을 굳혔다.
“알았어요. 해 볼게요.”
그가 동등한 지위의 귀족처럼 손을 내밀었다. 좀체 악수하는 법이 없는 황태자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잘 부탁해.”
손가락이 길고 큼직한 손을 잠시 응시하다가, 그녀도 손을 내밀었다.
“노력할게요.”
신분제 사회에 여전히 익숙하지 못한 에디스는 클라이드 녀석의 제안이 마치 간곡한 애원처럼 들렸다.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는 도움 요청이 마음으로 와닿았다.
소설 속 세계의 사건은 외면한 채 자신의 목숨줄만 지키려던 목표는 어디 가고, 어느새 그가 흔드는 손을 홀린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라그란드 제국의 황제가 공석에 나서지 않은 지 이미 오래다.
암살 사건이 벌어진 때가 5년 전이었으니까 그때부터 클라이드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궁이 발칵 뒤집힌 후로 황제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한두 해는 중요한 행사에 얼굴을 비쳤다. 병색이 완연한 채 잠깐 외부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형편이었다. 시종과 의사의 군단에 둘러싸인 채 생존 신고만 했다.
암살은 황제와 황태자 양쪽으로 시도되었다. 클라이드 이전의 황태자였던 누나는 끝내 살아남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이 그리되자 절망한 황후는 궁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이혼해 멀리 떠났다.
느닷없이 군사령관에서 새로운 황태자가 된 클라이드는 휘청이는 황실을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워야 했다.
고작해야 만 열여섯의 나이, 에디스의 시각에는 고등학교 1학년일 때의 일이었다.
황제의 궁은 최측근 궁인으로만 구성되었다. 새 궁인을 들일 때는 클라이드가 직접 만나서 결정했다. 또 다른 암살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한 조처였다. 이는 병환 중인 황제를 위해 황태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으로 비쳤다.
클라이드는 매주 한 번씩 황제의 궁에 들르곤 했다. 이 일정은 5년간 변함없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때만은 에디스도 따라가지 못했다. 오로지 혼자 황제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