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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34)화 (34/129)

34화

멀지 않은 곳에 에디스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부산하게 달리는 소음 탓에 당황했나 보다.

“잠깐만.”

아드리안은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할 말을 잠시 잊었다. 동그랗게 벌어진 에디스의 입매만 열심히 쳐다보느라고 어느새 멍청해졌다.

“어라? 아티, 급한 일이라도 있어?”

달려온 다음에 뭐 하려고 했더라. 뒤늦게나마 정신이 들었다.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고백은 할 수 없었다.

그럼 자신을 바람둥이가 아니라는 설명을 하자. 잘못된 선입견에 대해 알려 줘야지. 주변을 알짱거리는 알파들을 받아 준 적이 없다고. 그들이 멋대로 쫓아다니는 거라고.

“시간 좀 내어 줄 수 있을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때 에디스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내내 딴 데로 한눈팔지 않느라 풍경처럼 지나쳤던 인물이다. 황태자 클라이드. 근위병만큼 큰 덩치로 아드리안의 시야를 가리더니 주먹을 쥐어 돌연 습격했다.

클라이드의 움켜쥔 손아귀가 아드리안의 멱살을 잡아 비틀었다.

순식간에 속수무책으로 한쪽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타고난 무인의 기골인 데다가 우성 알파인 클라이드를 제가 버텨 이길 수는 없었다.

떠밀려진 뒤통수를 창틀 사이로 파묻어야 했다.

클라이드는 죄인을 체포하듯이 아드리안을 밀어붙인 후 바로 앞에 바싹 다가섰다. 금장식의 코트 소매가 귓가를 스쳤다. 팔꿈치를 반으로 접은 채 둘의 고개가 교차했다.

“무슨 일이지?”

자신만 볼 수 있는 각도에서 그의 서슬이 퍼렜다.

“아드리안, 그대와 더 얘기 나누고 싶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 나도 헤어지기 아쉽군.”

시간 좀 내어 달라는 말을 클라이드가 받았다. 마치 자신이 그에게 매달리며 부탁한 모습이 되었다.

때마침 근위병 한 조가 다가왔다. 황태자를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던 시종들도 추가로 나타났다.

‘어리석구나, 아드리안.’ 황태자의 눈빛이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궁에 사적인 공간은 찾기 어려웠다. 특히나 과시용으로 만남을 가진 직후라 보는 눈이 유독 많았다. 대부분은 클라이드의 측근이겠으나, 어디나 그렇듯 이 궁도 견제 세력의 첩자가 활동하고 있다.

“전하…….”

여기서 한가로이 에디스와 사담을 나눌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아드리안이 입에 올린 대상은 클라이드였다.

머리를 벽에 찧어 그런가. 정신 차리라며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어떻게 행동해야 현명할지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전하를 갑자기 쫓아와서 놀라게 해 드렸네요. 죄송해요.”

아드리안은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어 클라이드의 어깨에 올렸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북한 기분을 참는 것만으로도 큰 노력이 필요했다.

클라이드의 얼굴이 구긴 종이처럼 일그러졌지만 아드리안에게 밀착하며 주변 시선을 철저히 차단했다.

비스듬히 두 남자의 콧대가 교차했다.

에디스는 토끼처럼 뒤꿈치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거의 얼싸안다시피 두 남자가 겹쳐지며 아드리안이 클라이드의 넓은 어깨에 가려지자 그녀는 결국 뒤돌아섰다. 귀밑머리가 보시시 돋은 주변으로 발그스름하게 홍조가 피어났다.

아드리안에게 막막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그녀를 난감하게 한 듯했다.

“지금 어딜 보는 거지?”

클라이드가 그에게 나직하게 을러댔다.

손은 황태자에게 올렸으나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는 편이 외면하기보다 수월했다.

서늘한 침묵이 이어졌다. 시종들은 묵묵히 뒤돌아서 있었고, 근위병은 장식품처럼 똑바로 서서 정면만 응시했다. 마치 남의 밀회를 엿듣기 위해 쥐 죽은 듯 고요한 느낌이었다.

“용건이 없으면 이만 끝낼까?”

“…….”

아드리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태자의 연인으로서 성공적인 등장을 하려면 여기까지가 최선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마구 달려온 쇼도 그리 나쁘다고 볼 수 없었다.

“내일 보지, 아드리안.”

둘이 차 마실 때 클라이드는 제게 경이라고 호칭하더니, 시종이 들을 때는 이름을 불렀다. 혹시 지금 뒤돌아서서 귀를 세운 자가 첩자이려나.

클라이드가 천천히 몸을 떨어뜨렸다. 그가 물러나자 압박감이 줄어들었다. 우성 알파의 힘이 어느 순간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바짝 쳐들었던 고개를 떨구자, 아드리안의 긴 속눈썹 언저리가 가늘게 떨렸다.

못내 속상해서…….

아무런 진심도 전하지 못해 가슴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못난 표정을 에디스한테는 보이기 싫었다. 아드리안은 클라이드의 옷 앞섶을 붙들었다.

“어깨가 기울었더군요.”

“어깨?”

가리키는 어깨의 주인이 클라이드가 아니라는 걸 황태자는 곧바로 알아챘다.

“뒤에서 걷는 자세로 확실히 보였어요.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지 말고, 몸 관리도 충실히 하길 바라요.”

“그 얘기 하려고 온 건가.”

“뭐……. 겸사겸사요.”

더는 에디스를 기웃거리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제 모자란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먼저 발길을 돌렸다.

* * *

“에디스, 오늘은 꼭 깨워야겠어.”

어깨가 들썩들썩하도록 흔들리는 바람에 에디스는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눈꼬리를 매섭게 세운 클라이드가 바로 앞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

“왜요. 지금 몇 신데요.”

“진작부터 일어나서 훈련도 하고 식사 준비도 하는 사람이 많아. 시각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체력 단련하러 나가자.”

창밖으로 동도 트지 않아 방에 불을 다시 밝힌 상태였다. 클라이드는 가벼운 무복을 갖춰 입었고 에디스를 위해 저와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준비해 뒀다.

등 떠밀려서 옷을 갈아입은 후 눈곱만 간신히 뗐다. 머리는 대충 하나로 모아 묶었다. 서둘러 준비하라는 불호령이 얼마나 매섭던지, 졸음을 견디면서도 부득부득 밖으로 나서야 했다.

문득 빨간 모자 교관이 떠올랐다.

클라이드는 여러모로 교관 스타일이다. 옆구리에 손을 짚고 찰지게 호루라기를 부는 교관.

그래도 말을 타니까 잠이 달아났다. 운동 나가는 길에 낙마하는 볼썽사나운 꼴을 만들 수는 없으니 고삐를 바짝 잡았다.

목적지는 지난번에 들렀던 사격장이었다. 도착할 즈음에는 날이 부옇게 밝았다.

오늘 클라이드는 완전히 작정한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잠을 깨울 때부터 기세등등하더니 운동도 무자비하게 시켰다.

“그럼 간단히 뜀뛰기부터 하고 시작할까?”

“뜀뛰기요? 제자리 뛰기?”

“이 공터를 크게 돌면 어때. 에디스의 체력을 감안하면 그 정도가 적절할 듯하군.”

“클라이드는요?”

“나?”

그가 악마같이 씨익 웃었다.

“같이 훈련하고 싶다면, 평상시 내가 도는 코스로 갈까? 조금 멀겠지만 에디스도 열심히 하면 해낼 수 있을 거야.”

“아니요! 못 할 것 같아요!”

단호하게 거절했다. 클라이드를 기준으로 한 코스는 짐작도 하기 싫었다. 이 공터도 아카데미 대광장만큼이나 넓어서 한 바퀴만 돌면 하루치 운동량이 차고 넘쳤다.

헐떡거리며 달리는 동안 그는 바로 옆에서 따라왔다. 뿔 달린 악마 녀석. 아무 말 안 하고 따라서 뛰는 게 재촉하는 것보다 더 못됐다.

저는 지쳐서 등이 두꺼비 모양으로 굽을 때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말짱했다. 심지어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도 않았다. 에디스가 질척하게 뛰는 속도는 클라이드의 걷는 속도와 같았다.

겨우겨우 제자리로 돌아와 무릎을 손에 짚었다.

“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어.”

“흐어?”

당연히 한 바퀴여야지 그럼 얼마나 뛰게?

벌렁벌렁 날뛰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에디스는 절망 어린 시선으로 클라이드 자식에게 호소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는 물통을 건넸다.

“처음이니까 뭐……. 차차 체력이 붙겠지.”

“대체 나한테 갑자기 왜 이래요?”

“갑자기라니. 새벽에 같이 나오자고 권한 게 한참이나 됐잖아.”

“그래도 오늘은 유난하신걸요.”

대기 중인 시종과 궁인이 잔뜩이지만 손수건을 챙겨 주는 사람도 클라이드였다. 둘 사이에 벌어지는 사소한 실랑이는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걱정하더라. 너 잘 좀 챙기라고.”

“아티가요?”

“사실 맞는 말이지. 별실에 처박아 놓고 너무 일만 시켰으니까. 앞으로는 바깥바람도 쐬고 체력 관리도 해 주려고.”

“처박힌 적은 없습니다만.”

클라이드의 일정에 맞춰 따라다니곤 해서 오후나 되어야 별실 책상에 앉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바쁜 건 분명했다.

“그럼 자유 시간을 주신다는 말씀이죠? 언제, 얼마나요?”

“바람 쐬자고 했는데.”

“……?”

“지금처럼 말이야. 어때, 상쾌하고 좋지?”

치사한 자식. 그러면 그렇지. 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자는 뜻이다.

제발 이러지 말았으면. 운동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버려 두면 안 될까? 목구멍에 걸린 말이 혀 위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다.

새벽에 클라이드가 깨울 때마다 그녀는 ‘알아서 할게요.’라며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정작 알아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운동이란 원래 시간 내기가 참 어려운 종목이다. 궁 바깥에 화려 찬란한 정원이 펼쳐져 있지만 스스로 산책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에디스는 황태자의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기에만도 바빴다. 그 결과 날이 갈수록 몸 상태가 골골해졌다.

꼭두새벽부터 클라이드는 그녀의 심기를 자극하는 데 재미가 들려 있었다.

“업무량을 줄여 줬는데 어제도 에디스는 부득부득 책상머리를 지키더군.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아니면 출세욕?”

“그런 거 아니거든요.”

할 일이 적어지긴 했지만 집에 가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마지막 퇴근했던 날짜가 까마득하다.

내 누추하고 먼지 쌓인 집. 빚쟁이들은 얼마나 자주 찾아오고 있으려나.

에디스의 소리 없는 절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이드는 간단히 몸을 푼 후 사격 연습을 시작했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총을 쏘는 위치인 사로에 올랐다. 사격장 담당 궁인이 총을 건네자 그가 능숙하게 총알을 장전했다.

“어쨌든 너무 오래 앉아 있는 습관은 고치는 게 좋겠어. 모범적인 상관으로서 내가 측근의 건강 관리도 책임져야 할 의무를 느끼거든.”

“자유 시간만 주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요.”

구시렁거리면서도 스스로 자신은 없었다. 만약 자유 시간이 생긴다면 낮잠부터 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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