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아드리안은 붉으락푸르락하는 그녀의 안색을 염려하며 연신 눈을 맞추기에 바빴다.
“전하의 오메가 연인으로서 내가 나서는 게 꼭 에디스를 위해서만은 아니야. 나한테도 아주 큰 도움이 되거든.”
“그래도 네가 나서기에는 무리가 있어.”
“아냐, 정말로……. 앞으로는 사업적으로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귀족 위주로 돌아가는 사교계에서 더는 내쳐지지 않게 돼.”
이민족 출신인 탓에 그는 골수 귀족들 틈에 어울리지 못했다. 엄밀히 따지면 이도 저도 아닌 처지였다. 백작위를 가진 귀족이면서도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드리안, 아마 굉장히 시달리게 될 거야.”
“남들한테 시달리는 건 익숙해. 너도 알잖아. 내 주위엔 늘 사람이 들끓지.”
“네 추종자들이랑, 너를 물어뜯을 자들이랑 같겠어?”
“흠잡는 사람도 그만큼 많아. 에디스는 자세히 못 봤나 보구나.”
“내가 볼 때는 다들 너 예쁘다고만 하던걸.”
“전혀 아니야. 난 욕 듣고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 어차피 다른 곳에서도 겪는 과정인데, 사업이나 크게 벌이면서 당하면 억울하지는 않지.”
뚜렷한 의지를 가진 아드리안을 만류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사업에 필요해서 황태자의 파트너로 가장하겠다는 얘기가 핑계처럼 들려도 에디스로서는 어쩌지 못했다.
줄곧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던 아드리안이 어느새 그녀에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 * *
며칠간 아드리안이 황태자와 특별한 친분을 맺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화창한 날을 골라 전면이 확 트인 테라스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남의 눈에 쉽게 띄는 곳이었다. 황태자는 용의주도하게 안배했고, 아드리안은 할 수 있는 한 화려하게 치장했다.
주변을 물린 후 오붓하게 단둘이 차를 마셨다.
궁인이 다과를 내어 올 때마다 아드리안은 은근히 클라이드를 향해 오메가의 페로몬을 흘렸다. 마치 줄곧 유혹의 향을 건네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클라이드도 화답하듯이 찌를 듯 날카로운 알파 페로몬을 뿜어냈다.
황태자의 향은 꼭 짐승 같았다. 저절로 복종을 부르는 향이었다.
“전하, 향이 너무 짙습니다. 제가 감당하기 힘드네요.”
“그대도 만만치 않은걸. 알파깨나 울렸겠는걸.”
서빙 카트를 밀며 저만치 멀어져가는 궁인이 무릎을 휘청이는 걸 목격했다. 저 궁인은 약한 알파쯤 되어 보였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정숙한 오메가라고 자부합니다.”
아드리안은 괜히 부아가 치밀어 정색하고 말았다.
아무리 이용당해 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황태자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은 제게도 무거운 짐이었다. 나중에 다른 이와 가정을 꾸릴 때도 분명 걸림돌이 될 경험이었다.
에디스에게 미리 당부해 둔 게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부디 그녀만은 오해하기 말길.
아드리안은 연신 생글생글 웃어 댔다. 하지만 전시용 미소와 함께 나누는 대화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날씨 얘기를 지루하게 반복한 다음에는 그나마도 화제가 떨어졌다. 민감한 사안을 들먹이길 원치 않는 건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다.
“경, 이만 일어나겠나?”
매우 길었던 티타임을 끝낸 후 일어나는 기분이 후련했다.
“내일 또 오면 될까요?”
“그러는 게 좋겠지.”
“오늘처럼 넉넉히 시간을 비워 두겠습니다.”
“아, 그리고 따로 필요한 게 있으면 시종장에게 말하게.”
아드리안은 별말 없이 눈매만 아래로 내렸다. 황태자의 행보를 돕는 대가는 직접 요구할 필요 없이 시종장의 선에서 처리될 것이다.
그는 눈치채고 있었다. 황태자가 단순히 에디스를 사적으로 싸고도느라고 이런 조작까지 벌이는 게 아님을.
요즘 들려오는 황실과 구 귀족의 불화설이 만만치 않았다. 신진 세력을 중용하려는 의지도 뚜렷했다. 아드리안을 비롯한 상공업자와 무역업자의 무리는 이참에 어떻게든 끼어 보려고 애썼다. 작위는 높으나 귀족 진영에 어울리지 못하는 에디스도 자연스레 황태자의 눈 안에 들었다.
게다가 그녀가 좀 똑똑해야 말이지. 황태자에게 붙들려 있는 상황이 어느 정도는 이해됐다.
“전하,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두 남자가 테라스에서 나오다가 에디스를 만났다. 그녀는 다른 시종과 함께 복도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아…….”
아드리안은 멍하게 탄식을 흘리며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이런 태도가 그녀를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도저히 버릇이 나아지지 않았다.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에디스에게 어떤 좋은 인상도 남기지 못할 테다. 그렇지 않아도 저를 싫어하는데, 부족한 점을 만회하기는커녕 반응 속도마저 느리다니.
그녀는 저를 싫어하는 게 맞다. 아무리 봐도 그랬다. 싫어하지 않으면 적어도 불편해하는 거겠지.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섣불리 도전하기가 어려웠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온몸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클라이드에 반해 아드리안은 약간 뒤처져 아련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에디스는 먼저 황태자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아드리안을 알은체했다.
“아티, 아직 여기에 있었구나.”
그녀는 오늘도 어수선하게 물건을 들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소책자에 낱장의 종이들을 잔뜩 끼워서 책장 틈이 다 벌어졌다. 몇 장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에디스, 어떻게 때맞춰 왔네.”
“전하께서 자리를 파했다고 연락을 해 주셔서 말이야.”
티타임이 끝날 때에 맞춰 불려 온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은 바빠 보이는 그녀가 무척 안타까웠다. 황태자도 너무하지. 에디스를 넉넉히 좀 쉬게 해 주지 않고, 이렇게 곧바로 부르나.
클라이드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에 든 것을 냉큼 빼앗았다. 그러고는 책에서 너저분한 종이들을 빼내 가지런히 정리했다. 탁탁 모서리를 쳐 네모반듯하게 만든 후, 다시 책에 끼워 그가 직접 손에 들었다.
아드리안이 해 주고 싶던 행동을 클라이드가 선수 쳐서 해내고 말았다.
클라이드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에디스, 올라가자.”
“네에…….”
“아드리안은 이쪽 시종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돌아가도록 해.”
함께 온 시종은 아드리안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이번에 에디스와 함께 임관한 동기로서 아드리안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황태자와 에디스가 나란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아드리안은 명치가 뻐근하게 당기는 허망함을 느꼈다.
다른 남자와 함께인 그녀를 보고 싶지 않은데도 끝내 눈을 떼지 못했다.
시종이 아드리안의 귀 뒤에 대고 뭐라 뭐라 한참이나 말했다. 처음에는 듣지 못하다가 몇 번 얘기가 반복된 후에야 이만 가자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잠깐만. 좀 더 배웅하고.”
오가는 궁인의 눈에는 아드리안이 연인인 클라이드를 먼눈으로 좇는 거로 보이겠지.
학창 시절부터 아드리안과 어울려 다녔던 시종은 그의 밝히지 못한 속마음도 익히 알았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은 다들 목격해 왔다. 아드리안이 에디스의 주변에서 맴돌기만 한 세월을.
“아드리안,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는 옷자락 사이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아린 속을 남몰래 달랬다.
“그만이라니. 이제 겨우 시작이야.”
“시작한 거 맞아? 여전히 일방통행은 아니고?”
“얼마 전에 에디스가 직접 나한테 연락하고 만나러 왔는걸. 아마 황태자와 줄을 대주려는 듯했는데……. 하지만 그게 어디야. 에디스가 내 생각해 줬다는 의미잖아.”
혼신의 힘을 다해 교태부렸던 그 날이 떠올랐다. 일부러 옷도 걷어붙이고 가까이에 앉아 유혹했다.
그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을 넘는 얘기까지 했다. 아무 때나 제집에 와도 좋다고. 에디스라면 밤낮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뜻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에디스는 모를 거다. 그런 말과 행동을 하며 제가 얼마나 쑥스러웠는지.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등바등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시종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아드리안을 지켜보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쟤의 어디가 그리 좋아?”
“어디가 좋냐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이내 말꼬리를 늘였다.
“글쎄.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네. 그냥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던 것 같아.”
그에게 엉기기만 하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고아해서였나. 아득하게 높은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던 모습이 인상 깊어서였나. 강의실 위치조차 매번 혼동하면서도 장학금은 꼬박꼬박 타는 엄청난 간극이 신기해서였나.
그러다가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에디스가 저를 어떻게 여기는지.
그녀는 수차례 얘기를 흘린 적이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했던가. 추종자라고도 했다.
이 말은 아드리안을 헐뜯는 부류에서 처음 나왔다. 워낙 흔하게 떠도는 말이라서 나중에는 친구들조차 거리낌 없이 추종자라며 장난치곤 했다.
물론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많긴 했다. 아무리 잘라 내고 쳐내도 계속 생기다 보니, 저로서는 고백을 사양하는 일이 진저리 날 만큼 익숙했다.
“에디스는 나를 바람둥이로 아는 걸까?”
시종은 그의 혼잣말을 무심히 받아넘겼다.
“당연히 그렇겠지.”
“당연히?”
“네가 생각해도 그렇잖아. 알파를 둘둘 감고 다니는 오메가를 누가 순수하다고 보겠어.”
정작 아드리안의 우울한 기분을 받아 주는 시종조차도 알파였다. 따라서 에디스가 저를 그런 식으로 여긴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닌데.”
“아닌 건 너만 알지. 에디스는 모를걸.”
“나, 정말 바람둥이 아닌데.”
울컥, 울분이 솟구쳤다.
꾹꾹 눌러 놓았던 괴로움이 안에서부터 곪아 화끈화끈 열이 났다.
일순간, 참을 수 없는 격정이 몰아닥쳤다.
에디스는 복도 끝에서 이제 막 모퉁이를 돌려 했다. 일상에 지친 듯 발뒤축을 끌면서 어느덧 그녀가 아드리안의 시야를 벗어났다.
그게 못내 참기 힘들었다.
잘 참아 오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려 했다. 더는 속으로 삭이기 힘들다고 제 몸이 말하고 있었다.
가눌 길 없는 격분의 폭포가 쏟아져, 방황하던 다리를 멋대로 움직였다. 어느새 아드리안은 달리고 있었다. 근엄한 황태자 궁 복도를 채신머리없이 내달아 그녀를 뒤쫓았다.
사실은 바람둥이가 아니라는 변명 따위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무리 내리눌러도 넘치는 말이 따로 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주변을 맴돌기는 이제 지쳤어. 다가가고 싶으니 제발 날 피하지 말아 줬으면.’
후끈해지는 눈자위를 달리는 바람에 식혔다. 찌푸린 눈썹을 의식적으로 곧게 풀었다.
울화와 격정이 뒤섞인 순간마저도 그녀에게 밉보여선 안 되리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저기…….”
모퉁이의 기둥을 붙들고 에디스가 간 방향으로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