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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32)화 (32/129)

32화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어도 에디스는 한 걸음 나서서 끼어들었다.

“전하, 죄송하지만 저도 친구를 만나는 건 중요한 사생활입니다. 잠시 얘기 좀 나누다가 오겠습니다.”

둘이 대체 어떤 관계인 거야.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

“너무 늦어지지는 마, 에디스.”

마지못해 허락한 클라이드는 다른 시종만을 거느리고 사라졌다.

아드리안이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끌어 인적 없는 발코니로 향했다. 황태자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궁에서 접견이 끝난 응접실 앞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바깥바람을 쐬자 아드리안은 크게 가슴을 들치며 심호흡했다.

잔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뒤로 묶은 매듭을 매만졌다. 찰랑거리는 가닥들이 좀체 가지런해지지 못하자 차라리 매듭을 풀었다. 그동안 답답했던지 정수리부터 머리를 길게 훑어내리는 손길이 시원스러웠다.

“아티, 전하가 따로 부르셔서 많이 힘들었어?”

해가 진 정원으로 향했던 푸른 눈동자가 느른하게 에디스에게로 내려왔다.

지친 기색의 아드리안도 눈부셨다. 아침에 볼 때는 싱그럽더니 늦은 시각에는 다소 말랑거리는 느낌이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어깨가 에디스에게 기울었다.

난간에 둘이 엉덩이를 걸친 채 손을 엇갈렸다.

“네가 더 힘들지.”

아드리안은 그녀의 손을 가져다가 제 두 손으로 감쌌다. 은근하게 휘는 눈꼬리가 야릇했다. 늦은 시각의 그는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어서 제게 다가와 달라며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에디스, 너하고 천천히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기회가 너무 없네.”

“서로 일이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왜 이리 복잡하게 꼬이는지 모르겠어. 난 단지 너하고 이렇게 하고 싶을 뿐인데.”

하소연을 조곤조곤 내뱉는 입술 가까이 에디스의 뺨이 당겨졌다.

동화 속 요정이 내려앉듯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연한 입술이 슬며시 풀어진 채였다.

흘러내리는 보랏빛 머리칼이 에디스가 조금만 각도를 돌리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멈췄다. 아드리안은 청아한 눈동자를 고정한 채 그녀가 다가와 주길 기다렸다.

눈 한 번만 깜빡해도, 잡힌 손에 약간의 힘만 줘도, 그가 허락의 신호로 받아들일 듯했다.

“에디스와 어서 가까워지고 싶어.”

사르르 흘러내리는 미소가 눈부셨다. 사랑스럽게 휜 입꼬리에 유혹의 의미가 잔뜩 매달려서 그녀를 눈 떼지 못하게 했다.

“아드리안,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어여쁜 입술에 가까이 가지 않고 고개를 돌릴 때,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그가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런 사이라…….”

끝맺지 못한 말과 함께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난 에디스와의 사이를 어떻게든 선을 긋고 정한 적이 없는걸.”

이런 미인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데 밀어내야 하는 그녀의 마음도 가볍지 못했다.

저라고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으랴. 잘생기고 근사한 상대를 만나 찐하게 이것저것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너무 부담스럽다. 사교계 최고 인기인이라는 수식어와 그를 따라붙는 수많은 관심이 에디스에게는 편치 않았다.

게다가 아드리안은 원작의 메인 수이다.

에디스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제국이 무너지는 날이 오는 건 변함이 없는지.

러브 라인이 바뀌면 피의 숙청을 막을 사람이 없게 될 수도 있다. 아드리안이 해야 할 역할을 다른 누군가가 대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디스가, 어쩌면 또 다른 오메가가, 아드리안의 역할에 실패할 수 있다.

만약 이런 불안과 위험이 사라진다면 아드리안을 품에 안고 싶어지려나?

글쎄……. 어쩌면 생각의 폭을 넓혀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는 자동적으로 심장을 뛰게 하는 미모의 소유자니까.

섭섭히 여길 만한 말이 지나간 후에도 그는 여전히 상냥했다.

“에디스, 성향 검사를 받았다며?”

그는 끌어들였던 턱을 풀어 주는 대신에 손을 사이사이 얽어서 꼭 쥐었다.

“전하가 그런 얘기도 했어? 중요한 밀담을 나누려나 싶더니 왜 내 얘기를……?”

“너 때문에 부르신 거더라.”

의아한 눈을 들어 옆을 바라봤다.

“전하가 너한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까 봐 걱정스러웠어. 그래서 그분과 독대한 후 곧바로 네게 얘기할 시간을 달라고 한 거였어.”

“무슨 일인데?”

아드리안은 에디스 앞에서 풀어진 모습을 쉽게 보이고 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녀를 편히 대했다.

목을 조르던 셔츠 버튼을 하나 풀면서 제 목선을 살살 만졌다.

“네가 중임되고 있다는 소식은 궁 밖에서도 전해 들었어. 널 견제하는 귀족도 생기는 모양이더라고.”

“하긴, 내 의견서가 좀 많이 거칠긴 해.”

그걸 거침없이 사용해 주는 클라이드의 행보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에디스는 거의 24시간 그와 함께하느라고 외부의 압박을 받을 틈이 없었다. 하지만 국정 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은 확실히 황태자의 측근 시종을 싫어할 여지가 있었다.

아드리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면 벌써 꽤 분위기가 잡혀 가는 중이려나. 어디 돌아다니다가 암살당하면 어쩌지.

“설마 주변에서 나를 전하의 오른팔쯤으로 여기는 거 아냐?”

“그거 맞잖아.”

“하지만 난 고작해야 수발 시종인걸. 임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전하께서는 네가 경각심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더니, 정말 그렇구나.”

아드리안이 애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요리조리 살폈다. 얼굴 좀 들이대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너무 반짝거려서 심장 떨리니까.

“넌 옛날부터 그랬지. 굉장히 똑똑하고 성적도 좋은데 엉뚱한 곳에서 허술하더라.”

“내가?”

“강의 노트 흘리고 다닌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필기도구를 잃어버리기는 거의 일상이었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아드리안과 멀찍이 떨어진 캠퍼스 생활을 누려 왔건만, 물건 흘리고 다니는 건 언제 봤대. 그가 저한테 말을 걸려고 했던 시도의 절반 정도만 눈치챘으니, 어쩌면 제 기억보다 먼 사이는 아니었으려나.

아련한 눈빛으로 회상하는 그는 아이리스꽃처럼 청초했다. 잡힌 손과 스치는 어깨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설렜다.

“네가 두고 간 걸 다른 친구를 시켜서 전달해 준 적도 여러 번인걸. 내가 나서면 싫어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랬어? 늦었지만 고마워.”

“심지어 네 노트 한 권은 내가 가지고 있어.”

“뭐? 아니, 왜.”

“그때가 학기 초반이었을 거야. 네가 두고 간 걸 챙겨서, 언제 전해 주면 좋을지 눈치를 봤거든. 근데 네가 먼저 잃어버린 걸 알아채더라. 그러곤 어땠는지 알아?”

“…….”

대충 기억이 났다. 아드리안이 다음에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어서 그녀는 쑥스러워진 얼굴을 부하게 풀렸다.

“맞아, 에디스. 너는 그 자리에서 새 노트에 다시 썼어. 몇 장이나 되는 분량을 기억해서 말이지. 쉬운 과목도 아니었는데.”

“내가 좀 덜렁대기는 하지. 지난 일을 듣고 보니 민망하네.”

“민망하기는……. 인간미 있는 점이 완벽한 아카데미 수석 에디스를 돋보이게 하는 핵심 포인트였지.”

“칭찬이 좀 과한걸.”

“아냐, 정말이야. 덕분에 널 시기하는 애들은 별로 없었잖아. 챙겨 주는 친구는 있을지언정.”

긴장된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에디스는 끈적해진 손바닥을 들키기 싫어서 은근슬쩍 손목을 비틀었다. 빈손의 아드리안은 제 허벅지에 소매를 떨궜다.

그는 아득하니 먼 시선을 정원 너머로 던졌다.

왠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기 어려웠다. 여태 몰랐던 고마움을 새삼 깨달아서일까. 몇 년이나 아드리안 혼자만 간직해 온 추억을 뒤늦게 듣는 기분이 아련했다.

“에디스, 지금도 마찬가지야. 너는 뛰어난 재능을 뒷받침해 줄 사람이 필요해.”

“어차피 궁에는 사람이 많은걸. 잔일 할 궁인도 넘쳐나고.”

“하지만 넌 황태자의 시종으로 일하고 있잖아. 에디스는 남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네가 앞장서고 다른 이의 지원을 받아야 해. 그래야 빛을 발할 스타일이지.”

“얘기는 고맙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완곡히 부인하면서도 속으로는 아드리안의 말을 듣고 찔리는 부분이 있었다.

요즘 맡은 일도 그랬다. 클라이드가 책상 앞에서 딱 버티고 있다가 받아 가지 않았더라면 그나마도 흘리고 잃어버리기 일쑤였을 것이다.

별실 정리는 으레 클라이드가 담당했다. 에디스는 제 책상마저 깔끔히 하지 못해서, 매번 우수수 무너지는 문서철을 그가 대신 정리해 주곤 했다. 정리를 잘하지 못한다고 타박받은 적은 없지만 현실은 어쨌든 그랬다.

곧이어 아드리안이 꺼낸 말은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에디스, 기왕 황태자의 오른팔 역할을 해낼 거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해.”

“각오까지라면 좀 무섭네.”

“어쩔 수 없어. 전하는 널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시거든.”

“음…….”

“앞으로는 네게도 외부 압력이 들어올 테고, 신체적인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돕고 싶어. 전하께 널 돕겠다고 말씀드렸어.”

아드리안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나직한 목소리가 음악과 같이 맑게 흘렀다.

“오해하지 말아 줬으면 해. 당분간 나는…… 전하의 연인이 될 거야.”

“연인?”

“관심 흩뜨리기 전략이야. 진짜 깊은 관계가 되는 건 아니고.”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에디스는 그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게다가 이런 흐름대로라면 아드리안이 클라이드와 맺어지는 모양새가 나온다. 원작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설마 둘이 미운 정이 들다가 결국 결혼에 골인하게 되려나?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정은 에디스가 읽었던 내용과 전혀 다르다.

제가 억지로 2년을 당겨서 추진한 만남도 삐끗하게 되는 계기가 된 듯하다.

곰곰이 생각해 온 건데, 가장 크게 비틀린 원인은 자신인 것도 같았다. 아드리안이 아카데미에서 에디스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얘기는 소설 어디에도 없었다.

“아드리안, 네가 전하와 가까워지는 건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지. 하지만 나 때문에 위장하면 너무 미안하네.”

“미안할 필요 없어.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 네가 베타로 머물러 있어도 널 견제할 사람은 나타나겠지만, 오메가가 된다면 정말 집중 포격을 당할 거야.”

그녀는 대꾸할 말을 곧바로 찾지 못했다. 요즘 돌아가는 정세로 볼 때 상당히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황태자의 별실에서 일한다며? 전하와 너, 단둘만 있는 사무실이라던데.”

“그건 전하가 우겨서.”

“전하께서 강력히 요구하셨다면 더 시끄러워지겠지.”

수발 시종이라는 괴상한 직책인 데다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못해서 아직 잠잠할 뿐일 수도 있다.

오메가 시종이 침실 옆의 별실에서 기거한다니. 황태자의 흠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귀족들에게 딱 좋은 먹잇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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