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31)화 (31/129)

31화

“하아.”

몰아쉬는 한숨을 그가 들었으려나.

에디스는 둥그렇게 올라갔던 가슴을 내려 앉힌 후 고인 물처럼 숨을 죽였다. 그의 자잘한 소음이 귀에 꽂혔다.

베개를 부여잡는 뿌드득 소리, 긴 몸을 웅크리는 사각사각 소리.

“정확히는.”

청각에 집중한 동안 머리칼이 쭈뼛 곤두섰다.

“한 침대에 들어서.”

높은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레 그와 함께할 열띤 순간이 연상되었다.

“다른 알파는 접근할 엄두도 못 낼 만큼 서로의 몸에 페로몬을 바르는 거야. 며칠이 지나도 네게서 내 페로몬이 풀풀 풍기도록.”

육중하고 커다란 몸체와 뜨거운 체온.

짐승의 숨소리.

“완전하게 서로를 소유하는, 신성한 의식이지.”

왜 경험한 적도 없는 순간을 떠올리게 되는지.

그의 향기가 환상처럼 맡아지는지.

잘못된 거다. 클라이드가 심하게 홀리는 중이야. 정신 차려야 해. 정신을.

“이제 그만 자.”

“…….”

“다 들었다면.”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몇 발짝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자그마하게 속삭였지만, 제 기분은 묘하게 요동쳤다. 이게 무슨 감각인지 깨닫지 못한 상태로 이불 속에 숨은 육신이 간지럼 타듯이 술렁거렸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길게 이어졌다.

* * *

< 4장. 오메가의 향기 >

열흘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정 회의 말고도 황태자의 업무는 에디스가 따라가기 벅찰 만큼 많았다.

클라이드의 강철 체력이 새벽의 단련에 기인한다는 걸 알면서도 에디스는 섣불리 운동에 따라나서지 못했다. 땡깡 부리면서 이불을 둘둘 만 덕분에 매번 그를 혼자 다녀오게 하는 데 성공하곤 했다.

하지만 녹초가 되어 비실비실 황태자를 뒤따르는 몸뚱이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이번 국정 회의에서도 에디스의 보고서가 인용되었다. 잠깐의 느슨함도 허용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그녀는 각종 발언을 귀에 담고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젠장. 어쩌면 클라이드가 맞을지도 몰라. 난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인가 봐.’

그는 출세욕이라고 명칭했지만 저는 눈 뜨고 못 봐 주는 오지랖이 아닌가 싶었다.

전말이 눈에 훤한 상황에서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 거지. 몇몇 귀족이 황권을 위협하려는 기색을 뻔히 눈치채는데,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내버려 두지 못하는 거다.

국정 회의를 대비해 제가 무슨 의견을 제시해야 할지 조막만 한 뇌를 가열하게 굴렸다. 그 결과 1라운드에서 녹다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전하…….”

클라이드가 성큼성큼 내딛던 걸음을 멈췄다.

“왜?”

“가, 같이……. 아니 혼자 가세요.”

“업어 줘?”

“아니, 아니.”

간신히 클라이드를 따라잡아, 무릎을 짚으며 헐떡거렸다.

“다 왔어. 이번 회의는 여기야.”

소모임에 적합한 응접실이 활짝 열렸다.

안에서 미리 기다리던 사람들이 황태자의 행차를 맞이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쳐서 비척거리면서도 황태자의 수발 시종 노릇을 해야 하는 에디스는 빨리 클라이드가 착석하기만을 바랐다.

격식을 차린 긴 인사말이 오갔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와중에, 익숙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

“전하를 다시 뵈어 영광입니다.”

에디스는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다섯 명의 방문객 사이에서 아드리안이 환한 미모를 빛내고 있다.

“레이먼드 경도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군.”

“황공합니다.”

아드리안은 입으로는 황태자를 응대하면서도 시선을 그 뒤의 에디스에게 고정했다.

미묘한 각도라서 다른 이에게는 차이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바라보는 사람이 사실은 에디스라는 건 아마 클라이드밖에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에디스는 황태자의 명에 따라 가까이에서 대기해야 했다. 빙 둘러앉은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져 보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드리안의 자리는 클라이드의 반대편이었다. 그가 황태자한테 말씀을 올릴 때마다 에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싱긋 눈웃음 짓는 아드리안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클라이드는 그 미소가 제게 향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에디스를 대할 때 외에는 황태자의 분위기가 대체로 삭막하다 보니, 환담을 나누며 딱딱하게 턱을 굳혀도 누구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은 서로 친분이 깊다고 알고 있네. 오히려 내가 제일 서먹하겠지?”

클라이드와 시선이 닿아 있던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서먹하다니요, 말씀 거둬 주십시오. 저도 이쪽의 제리언이나 스미드와 사석에서 자주 만나기는 합니다만, 전하를 뵙는 것이 그보다 훨씬 의미가 큽니다.”

“나도 그대들과 함께할 기회를 자주 만들고 싶군.”

“불러 주신다면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속을 알기 힘든 얼굴로 클라이드가 낮게 읊조렸다.

모임의 참석자는 대규모 상회를 운영하는 이들이었다. 신분도 대체로 평민이었다. 조금 전 국정 회의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부류라고 할 수 있었다.

귀족 층에서는 신흥 상공업자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황태자의 시각에서는 세금도 많이 내면서 빠르게 성장하는 이들이 나쁘지 않았다. 별실 책장에 꽂힌 문건 중 에디스가 우선적으로 보고서를 써야 하는 별 꼬리표가 바로 상공업이었다.

“그대들 중 작위가 있는 자는 레이먼드 경뿐이지?”

“예, 전하.”

“나머지는 머지않아 열릴 황실 행사에 참석하기가 거북하겠군.”

물론 다들 폭넓은 인맥을 이용해 연회에 오기는 한다. 하지만 초대된 귀족의 파트너라든가 지인으로서 따라올 뿐이었다.

“내 이참에 확실히 해 둘까 해. 제국에 기여도가 높은 상회 주인은 공식적으로 행사에 초대받을 수 있도록 하겠네.”

옆에서 듣고 있던 제리언 상회 오너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 그대들의 처우도 달라져야 한다고 봐. 새 사업을 개척하는 자들을 위주로 이런 식의 모임을 정기적으로 열면 좋겠군. 나도 변화하는 바깥 사정을 전해 들을 겸 해서 말이지.”

황궁에서 싱공업자 간의 정기 모임이라니. 이건 파격적인 특혜였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전하, 영광입니다!”

제리언 상회 오너도 그 의미를 이해하고 크게 감격했다.

하지만 메모지에 이 내용을 받아 적은 에디스는 내심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클라이드의 행보가 조마조마해서였다. 귀족의 힘이 여전히 만만치 않은데 너무 대놓고 반목하려는 기미가 있었다.

이것이 훗날 피의 숙청이라는 결말로 이어질 가능성도 엿보였다. 원작 소설의 로맨스 흐름은 상당 부분 뒤틀렸지만 이야기 흐름은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이대로라면 제국의 미래가 암울하게 전개될 것이다.

황태자로서 클라이드가 바르게 판단하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과격했다. 가까이에 있다 보니 위험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에디스는 그에게 이런 점을 지적해 줘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시종직에 있는 동안 전체를 보는 안목이 자라기 시작한 듯했다.

입바른 소리가 나올락 말락 했다. 자리를 파하고 단둘이 있을 때 한 소리 하고 싶었다.

‘또 괜한 오지랖이지. 클라이드가 귀족들과 크게 한판 붙으면 나는 모가지 하나 지키기도 어려울 텐데.’

마음 한편으로 망설이면서도, 우선은 모임에 집중하느라고 입을 다물었다.

담화가 한참 진행되던 중, 클라이드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말을 붙였다.

“레이먼드 경은 잠시 후 나와 따로 보세.”

담담한 어조로 불렀던 탓에 둘이 왜 따로 보려는 건지는 눈치채기 힘들었다.

그런데 에디스만 모르지 다른 참석자들은 금세 이해한 듯했다. 다들 희색이 가득한 말투로 응대했다.

“전하, 현명한 생각이십니다. 레이먼드 경과 제가 친분이 깊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경은 매우 우월한 오메가입니다. 인품도 훌륭하고요.”

“맞습니다. 전하의 곁에 두셔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겁니다.”

“사교계에서도 평이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출신 성분을 극복할 만큼 레이먼드 경은 빼어나다고 자부합니다.”

찻잔 너머로 에디스를 흘끔거리기에 바쁘던 아드리안은 저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분위기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말씀들을 하시면 제가 쑥스럽습니다. 전 그저 전하의 독대를 영광으로 여길 뿐입니다.”

응접실에서의 모임을 파한 후 클라이드는 아드리안만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누구도 데려가지 않았다.

에디스까지 쉬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조금 당황했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혼자 남겨지게 되자 그녀는 궁금증이 커졌다. 클라이드가 왜 아드리안만 따로 만나기를 원했는지 신경 쓰였다.

그리고 아드리안이 보였던 반응도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영광으로 여긴다던 얘기는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었겠지? 아마도 그랬을 거야.

에디스는 편히 휴식하지 못하고 자꾸만 그들의 방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둘만의 밀담은 길게 이어졌다.

저녁이 다 되어 부름을 받고 내려가니, 복도에 클라이드가 나와 있었다. 그는 구석에 아드리안을 세워 놓고 은밀한 대화를 나눴다.

두 남자의 간격이 심하게 가까웠다. 귓속말로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옆얼굴을 보인 아드리안은 클라이드의 속삭임에 고개를 숙였다. 보라색의 긴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몇 가닥 새어 나온 머리칼이 아드리안의 날씬한 뺨 위에서 흔들렸다.

에디스와 함께 있던 시종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전하께서 드디어 오메가 파트너를 곁에 두시려나 봅니다.”

“오메가 파트너요?”

“분위기가 아주 좋네요. 저렇게 가까이 오메가의 접근을 허용한 적이 없으시거든요.”

인기척을 느낀 클라이드가 뒤돌아섰다. 언제나처럼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가오는데, 에디스는 기분이 뭐라 형용할 수 없게 오묘했다. 황태자가 앞장서지 않고 아드리안과 옆에서 걷다니. 둘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이처럼 남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걸까?

아드리안이 멈칫하면서 클라이드에게 청했다.

“전하, 에디스의 시간을 조금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건 곤란하네. 에디스는 나와 같이할 일이 있어.”

“잠시면 됩니다.”

“정 그러면 내 옆에서 얘기하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남자는 꽃가루가 날리는 분위기였건만, 클라이드는 아드리안의 청을 듣고 잠깐 그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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