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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30)화 (30/129)

30화

들어오라 했으니 문을 도로 닫을 수는 없었다.

에디스는 둘 데 없는 시선을 흐트러트렸다. 그러다가 결국 사내의 미끈한 맨살을 눈으로 더듬었다.

하의만 겨우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이 지극히 태연했다. 하체에 착 감기는 옷으로 발목을 감으며 카펫을 맨발로 디뎠다. 발등에 선명하게 도드라진 발등뼈와 힘줄이 묘하게 감각적이었다.

그가 손목에 침의의 웃옷을 걸었다. 커다란 손이 하얀 실크의 소매통을 스르륵 미끄러졌다.

바위산만큼 널따란 가슴팍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두툼한 근육을 일으켜 세웠다.

양쪽 팔뚝에 웃옷을 두르자, 클라이드의 육감적인 등허리를 따라 옷이 호선을 그리며 늘어졌다. 뾰족한 팔꿈치는 마르게 각져 있었다. 퍼런 핏줄이 구불구불한 팔뚝조차 선정적이었다.

저 팔뚝으로 침대에서 무슨 짓을 할지 공연히 상상하게 될 만큼.

눈을 뗄 수가 없어. 놀라서 동그래진 눈을 한 채 에디스는 문 앞에 허수아비로 멈춰 섰다.

“왜 그러고 있지?”

그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까딱였다. 침대 방향이었다.

멈추지 않는 심장이 이젠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푸른 머리칼 끝에서부터 맨발의 발톱까지 모조리 야한 남자가 침대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이란…….

“아, 네.”

하지만 에디스는 떡 벌어졌던 입을 닫으며 정신을 추슬러야 했다.

넋 놓고 그의 벗은 몸을 감상했던 걸 감추느라, 고개를 푹 숙이며 방 반대쪽 모서리로 돌았다. 때마침 욕실과 드레스룸에서 궁인 한 무리가 나왔다. 이제 막 뒷정리를 마친 기색이었다.

클라이드가 손을 가볍게 털었다. 궁인들은 묵례만 한 뒤 침실을 나갔다. 우리 외의 사람이 한 공간에 더 있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다시 둘이 되었다.

그런데 그새 실내가 굉장히 바뀌었다.

“와, 침대네요.”

원래 있던 침대 옆으로 비슷한 크기의 침대가 하나 더 생겼다. 긴 기간 공사하느라고 벽에 휘장이 처져 있더니 그 자리에 큼직하게 벽을 파고 만들어진 것이다.

새 침대는 벽에 세웠다가 내리는 구조였다. 황금 기둥에 기품 있는 캐노피가 드리워진 황태자의 침대보다야 위용이 떨어지지만, 푹신푹신하고 안락해 보이는 매트리스는 한눈에도 기능성이 돋보였다.

“여태 한 공사가 침대를 만들었던 거군요.”

놀라워하며 한 바퀴 돌며 시트를 쿡쿡 눌러 봤다.

“생각만큼 쓸 만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어. 올리고 내리는 데 궁인이 여럿 필요하더군.”

이걸 내리느라고 저녁 채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 듯했다.

평소와 달리 클라이드가 뒤늦게 씻는 바람에, 그녀가 돌아올 무렵 아직 옷을 갖춰 입지 못했다. 그 결과로 엉겁결에 맨살의 향연을 보게 된 것이다.

“엄청 크니까 그럴 법도 하겠네요.”

“많이 불편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설마 나 때문에 만든 거예요?”

“그럼 혼자 양쪽에 눕겠어? 내 몸뚱이는 하나인걸.”

심증으로 느끼던 걸 확답으로 듣는 순간 얼굴이 희게 질렸다. 침대까지 설치해 줬으니 아예 집에 가지 말란 뜻인가.

“저 집에 갈 건데요. 내일은 꼭 칼퇴할 거예요.”

“응, 나도 에디스의 칼퇴를 응원할게.”

“진짜라고요.”

그가 시큰둥하면서도 선선하게 대꾸했다.

“그 마음 알아. 하지만 시각이 늦어지게 될 때를 대비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언제까지 카우치에서 자야 할지 기약할 수 없으니까.”

“그건…….”

당신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냐고 대들려다가, 차마 거기까지는 선을 넘을 수 없어서 꾹 참았다.

지난 시간, 클라이드는 에디스를 침대에 재우고 저는 카우치를 이용하곤 했다.

같은 베개에서 눈 뜨던 날 그녀가 기겁한 탓도 있었다. 잠이 적고 일찍 일어나는 그가 에디스의 새벽잠을 깨우게 될까 봐 조심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이따금 체력 단련을 마치고 돌아온 후 그녀의 곁에 머리를 잠깐 눕힐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미안하긴 했다. 명색이 황태자인 클라이드를 몰아낸 꼴이었으니.

“차 한 잔 더 하고 잘래? 아니면 불 끌까?”

그래도 새 침대를 제공받은 게 기쁘지는 않았다.

그를 슬며시 째려봤다.

말로는 칼퇴를 응원한다고 해 놓고도, 행동거지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전혀 보내 줄 기미가 없었다. 여러모로 그녀에게 포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냥 여기서 살라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일찍 자고 싶어요.”

수월하게 어깨를 으쓱거린 클라이드는 실내에 켜 둔 불을 차례차례 껐다.

어둠이 드리우자 에디스는 침대에 기어 올라갔다. 아직 암순응하지 못한 눈이 주변을 까맣게만 물들였다.

사각사각, 시트 스치는 소리가 자신의 무릎과 손에서 났다. 그런데 또 다른 이질적인 마찰음도 들렸다.

대체 뭘까.

“에디스?”

커다란 육체가 그녀와 부딪쳤다.

“읏.”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는 허리에 굵직하고 단단한 팔뚝이 한 바퀴 크게 둘렸다. 새 매트리스의 탄력은 몸에 익지 않았고, 튕기는 힘을 이기지 못해 맥없이 옆으로 몸이 기울었다.

타인의 길쭉한 몸이 육중한 무게를 동반하며 그녀의 위로 겹쳐졌다.

옆구리에 닿는 체온이 뜨거웠다.

기겁해서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호흡과 그의 당황스러워하는 탄식이 마주 쏟아졌다. 시트와 이불까지 뒤엉킨 채, 그녀의 귓가에 클라이드의 더운 바람이 흘렀다.

“에디스가 왜 여기로 올라오지?”

군인다운 체격에 몸무게가 더해져 그가 말소리를 올릴 때마다 에디스의 가슴도 진동이 전해졌다.

눌린 목선이 새빨개졌을 것이다. 어둠에 묻혀 그에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여기가 내 침대 아니에요?”

“무슨 말이야. 에디스가 잘 곳은 옆 침대지. 늘 거기에서 잤잖아.”

“하지만 거긴 황태자를 위한 공간인데요.”

“인제 와 새삼스럽기는.”

귀 옆 머리카락에 느릿느릿한 손길이 느껴졌다.

정신이 쏙 빠지겠어. 위로 눌리고 달곰한 목소리가 뿜어지는 데다가 머리까지 만져지는 지경이다.

“새 침대에서 자 보고 싶다면…… 나와 경쟁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클라이드가 이 침대를 사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제가 여기서 자겠다며 고집부렸다가는 조만간 둘이 한 이불을 덮자는 말까지 나올 듯했다.

“아니요, 내가 비킬게요.”

순순히 물러날 수밖에.

에디스는 일어나려고 몸을 들썩거렸다. 그런데 그가 비켜 주지 않았다.

잠시 들떴던 골반이 이내 푹 파묻혔다.

길게 누운 클라이드는 어떤 상태인지 알기 힘들었다. 사위가 어둠뿐이라 짐승과 같은 숨소리만이 흐트러진 머리칼에 둘러싸여 후끈하게 떠다녔다.

“……왜.”

“잠시만.”

그의 호흡이 멈췄다. 귀 옆으로 흐르던 바람이 멈춘 대신에 열기가 더 온온하게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침묵이 무거웠다.

클라이드의 불뚝불뚝 날뛰는 복근과 모난 자갈처럼 튀어나온 장골보다 훨씬 묵직했다.

어둠이 갖가지 앙심과 불평을 먹어 버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신임받아 중압감을 느끼는 기분도, 집에 돌아가겠다며 앙탈하는 제 의지도.

무슨 기분일까. 그는 억지 쓰고 강짜를 부리면서까지 왜 저를 붙드는 걸까.

“이제 됐어.”

온갖 망상이 그녀를 혼란케 할 즈음, 육중한 그물 같던 몸체가 느릿하게 떠나갔다.

에디스는 뜨끈해진 등을 일으켜 겨우겨우 옆 침대로 옮겨 갔다.

침대 기둥에 묶인 휘장을 풀 겨를도 없이 침대로 파고들어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가 공연한 짓을 벌인 바람에 저도 열 오른 감정이 꺼지지 않았다. 전부 클라이드 잘못이잖아. 이렇게 맨날 철야시키는 악덕 상관이라니. 지엄한 황실의 권위 때문에 관두지도 못하고 거역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혼자 속앓이하며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분을 이불 속으로 꾹꾹 눌러서 삭여야 했다.

“아까 진찰은…….”

까칠하게 쉰 음성이 옆에서 들렸다.

“…….”

“의사의 소견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이 제국에서 첫손 꼽히는 명의거든.”

“알아요.”

“에디스가 희귀 사례라는 얘기에는 나도 놀랐어.”

“나도 그래서 여태껏 베타로 살아왔어요. 그게 당연했으니까요.”

이 자리에서 소설 따위를 주절거릴 수는 없었다. 스토리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털어놓기 어려웠다. 그녀는 순수하게 새로운 변화를 접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도 진작 진단을 받지 그랬어.”

“…… 네. 그럴 걸 그랬나 봐요.”

용돈이 한 푼도 없었다는 얘기는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 캠퍼스를 벗어난 예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과거도 들먹일 필요 없었다.

강의실과 도서관, 기숙사를 쳇바퀴 돌며 낯선 세계의 문물을 익히려 발버둥 쳤노라고, 소설 주인공인 클라이드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그런데 클라이드.”

이름으로 불린 그는 조금 늦게 응답했다. 마치 제 이름을 곱씹듯이.

“……응.”

“아까 그 얘기는 뭐였어요?”

“무슨 얘기?”

기억을 더듬어, 새로 들은 어휘를 혀끝에 올렸다.

“페로몬 샤워?”

돌연 옆 침대가 고요해졌다. 두런두런 나누던 대화도 뚝 끊겼다.

늘 그녀에게 치근덕거리기를 즐기던 남자답지 않게 먼저 말문을 닫은 게 수상했다. 유치한 장난도 곧잘 치며 에디스가 낭패를 보는 모습을 유쾌하게 지켜보던 클라이드와는 사뭇 달랐다.

역시 좋지 않은 의미이려나.

치료법과 연관 지어서 나온 얘기였다. 비정상적인 방법일까? 혹시 민간요법이나 그런 거?

“왜요? 페로몬 샤워가 뭔데 그래요?”

거듭 캐묻자 그는 바로 누웠던 몸을 그녀에게 돌렸다. 이젠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약간의 실루엣은 알아채게 되었다.

“그거……. 할 수 있으면 할래?”

“알려 줘야 하든지 말든지 결정하죠.”

“하려면 나랑 해. 딴 놈 말고.”

정체는 밝히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 꼴이다.

저만치에서 빛나는 황금안을 노려보며, 이 남자가 또 무슨 꿍꿍이일까 궁금해졌다.

“페로몬 샤워는 말이지.”

뜸을 들이다 못해 밥이 탈 정도로 오래 기다린 끝에 드디어 클라이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짝을 이루는 페로몬을 온몸에 뒤집어쓰는 거야.”

“뒤집어쓴다고요? 페로몬은 액체가 아니잖아요. 고작해야 향기가 나는 기체일 뿐인데.”

페로몬은 상대를 유혹하는 힘이자 매력이다. 각자 지니고 있는 독특한 향취를 무기로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를 꼬드기는 냄새다. 그에 더해 우성 알파만이 타인을 강압하는 무형의 힘을 지녔다.

단지 그뿐, 묻어나지도 않을 만큼 적은 양의 페로몬으로는 샤워할 수가 없다.

전신을 페로몬으로 뒤덮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 세계에 낯선 에디스는 모르고, 의사와 클라이드는 당연히 아는 그게 뭘까?

긴 정적이 다시 흘렀다.

고요함을 뚫고, 달면서 진한 음성이 들렸을 때는 저절로 귀를 세우게 되었다.

“내 페로몬으로 네 온몸을 감싸는 거야.”

아직 오메가 진단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가 이렇게 말했다.

“너와 내가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는 떨치고.”

“…….”

“지금처럼 멀리서가 아니라 맨살을 맞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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