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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29)화 (29/129)

29화

짠 내 나는 눈빛으로 옆쪽 책상을 흘끔댔더니, 그는 당연하게도 그녀의 복잡다단한 속내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클라이드는 평온한 얼굴로 수작을 걸어 왔다.

웬만해선 귀를 닫기 힘든 심리 싸움이었다.

“어디 보자, 오늘의 야식 목록이 뭐더라.”

“아, 안 돼요. 더는…… 이 속도로 계속 먹다가는 돼지 오줌보로 만든 공처럼 울퉁불퉁 빵빵하게 부풀 거라고요.”

“무슨 공? 말씀 참 아름답게 하기도…….”

“아니 진짜요.”

“에디스는 지금이 딱 예뻐. 여기서 더 빠지면 눈가에 잔주름도 생기고, 뺨도 홀쭉하게 들어간다니까.”

그러면서 야식 리스트를 줄줄 읽어 내린다. 뿔 달린 악마처럼 사악하게.

듣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귀청을 뚫고 들어와 뇌리에 콕콕 박히는 음식들. 죄다 에디스의 취향에 맞춘 요리였다.

클라이드는 육체남답게 동물적인 미식을 가졌다. 저녁을 육류 위주로 든든히 먹은 다음, 이후로는 라임을 띄운 물만 마시곤 했다. 따라서 길게 주절거리는 케이크와 셔벗, 푸딩은 오롯이 에디스의 몫이었다.

이름을 듣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레몬 샬럿에 다다르자 그녀는 결국 백기를 들어야 했다. 클라이드 전담 셰프의 비법으로 만든 마리나 비스킷을 아래에 깔고 시나몬을 뿜뿜 뿌린 디저트였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사흘 전 맛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요리를 시기적절하게 다시 추가하다니. 이건 에디스의 침샘 속에 야식 목록을 작성한 셰프가 들어앉아 있는 거나 진배없었다.

“너무해요, 전하. 제 조만간 뱃살은 갑자기 불어서 그물 모양으로 갈라지고 말 거예요.”

“원망스러우면 아까처럼 클라이드라고 부르든지. 혹시 알아? 이 몸이 자비를 베풀어서 살 안 찌는 샐러드를 추가하라고 지시할지.”

넙죽 시키는 대로 했다.

“클라이드!”

이름 까기가 참 쉽다.

실은 아름드리 케이크에 샐러드가 더해지는 상상을 했지만, 어쨌든 탄수화물이 덜 든 음식이 추가로 제공된다는 뜻이다.

못돼먹은 녀석이 빙긋 웃었다. 저렇게 성의 없이 입꼬리를 늘여도 끝장으로 잘나 버리면 반칙인 거다.

“아주 좋아. 앞으로는 둘만 있을 때 늘 그렇게 부르도록 해.”

“그건 좀.”

스읍, 입소리를 내며 그가 얼러 댔다. 하지만 황태자의 이름을 매번 불러 댈 수는 없다.

“그건 좀, 많이 좀…….”

격무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칼로리 가득한 메뉴를 들어서인가. 에디스는 막 나가고 있었다. 오늘의 퇴근도 물 건너가는 분위기라 말꼬리도 짧아졌다.

책상에 엎어지며 자포자기하는 그녀를 클라이드는 왜 이리 화색이 도는 얼굴로 반기는지 모르겠다.

황태자의 저녁 식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에디스는 궁 사용인을 위한 식당에서 저녁을 해치우고 올라왔다. 별실 테이블에 반짝반짝 빛나는 야식이 벌써 차려져 있었다.

레몬 샬럿 얘기를 들어 배를 덜 채우고 온 건 어떻게 알았대.

“식당의 디저트는 부실했지? 그럴 줄 알고 오늘은 일찌감치 준비했어.”

포크를 손에 쥐여 줄 필요까지는 없는데.

“전하, 제 옷이 안 맞으려고 해요. 심각한 상태라고요.”

“그럼 나랑 같이 신체 단련을 하면 어때? 에디스에게 맞춰서 트레이닝 강도를 조절할 수 있어.”

탐스럽게 놓인 케이크를 차마 외면할 수는 없어서, 안 먹는 척 느릿느릿 포크질했다. 그가 권유한 신체 단련에 대해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게…….”

“왜? 뱃살 불었다며 몸 움직이기는 싫어?”

심장에 비수가 박히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이 와중에도 포크를 내려놓지 못하는 탓에, 에디스는 뱃살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했다.

“트레이닝…… 하긴 해야 하는데.”

“그럼 내일 새벽부터 같이 나가도록 하지.”

“아니요.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클라이드가 말하는 새벽이란 첫닭이 울기 전 동녘이 시커멀 때를 의미했다. 그는 에디스 몰래 일어나 운동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녀가 눈을 뜰 때쯤에는 땀 흘린 몸을 씻고 머리까지 말린 후 아무 일 없었던 양 지난밤의 침대에 고이 누워 있었다.

그걸 클라이드가 말해 줘서 알았지, 저녁에 불 끌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아침에도 누워 있는 남자를 보고 어떻게 새벽 트레이닝을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야, 에디스는 할 수 있어.”

“할 수 없어요!”

단호하게 도리질 쳤다.

현실 세계의 과거가 겹쳐서 떠올랐다. 월급 통장이 휘청일 만큼 고가의 PT를 끊고 횟수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지난날을 되새겼다.

역시 난 운동만은 안돼. 치욕의 과거를 되풀이할 순 없어. 머리를 사납게 털었다.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이드는 알쏭달쏭한 장난기를 얼굴 가득히 품고 있었다.

“그나저나, 에디스는 어지간히 출세욕이 있나 보군.”

“에에? 절대요.”

“농땡이 피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네가 작성한 보고서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써먹을 만큼 충실하거든. 지금도 봐 봐. 매일 올리라고 지시한 내가 미안할 만큼 몇 장이나 써 놨잖아.”

아니 이게 말이야 방귀야. 똥줄을 조이며 닦달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너무 성실하다고 칭찬이야?

그딴 칭찬 필요 없다고요.

내 인생의 목표를 멋대로 바꾸지 말아 주세요.

포부도 뭣도 없고 대충 펜만 끼적이다가 튀고 싶은걸. 타는 제 속도 몰라주고 조만간 승진이라도 시켜 줄 듯한 언사는 반갑지 않았다.

눈 밖에 나기가 참 어렵구나.

특히 업무적인 측면에서 그를 흡족게 한 듯하니, 행동거지를 싸가지 없게 하면 어떨까.

좋아, 그래야겠어.

“아, 몰라요. 이젠 보고 안 할 거야.”

“보고를 안 해?”

“너무 일이 많다고요. 매일 보고라니. 차라리 내 목을 따요.”

그가 매끈한 턱을 슬슬 문질렀다. 골몰하는 눈치가 더 무섭다.

“흠…….”

“왜요. 자르시게요?”

“네 말이 맞아. 매일은 너무했군. 보고서 제출 주기를 에디스가 할 수 있는 만큼으로 정해.”

눈이 반짝 빛날 만큼의 제안이었다. 제가 정하라 하면 당연히 아주 띄엄띄엄 기간을 둬야지. 이틀? 사흘? 일주일은 좀 너무한가?

“정말요? 그럼…… 엄, 으음, 열흘에 한 번!”

세게 질렀다. 에디스 용감해.

“열흘 좋아.”

“전하…….”

그녀는 감격에 겨워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클라이드로 부르지 않고? 그럼 열흘은 좀.”

“아뇨! 클라이드. 이름이 아주 입에 짝짝 붙네요.”

빠르게 호칭 정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선선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렁그렁한 에디스의 눈망울에 동조하듯이 미소까지 지어 줬다.

이 남자, 대체 웬 바람이 불었대. 지난번 국정 회의에서 제 보고서가 쓸모 있어서였나.

그런데 열흘 늘리기 협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한 가지 조건이 덧붙었다.

“단, 보고하지 못한 날은 내 궁에서 저녁을 먹도록 해.”

“……네?”

“어때. 공정하지?”

“저녁을 먹으라는 뜻은.”

클라이드가 사악한 턱을 들어 디저트가 줄줄이 놓인 테이블을 까딱였다.

“일단 디저트까지 먹고 봐. 나는 합리적인 황태자니까.”

구시렁구시렁 욕이 절로 나왔다.

저녁 먹고 여기서 자라는 뜻이 명백했다. 집에 안 보내겠다는 거지.

썩을 놈, 망할 놈.

직접적인 폭언은 목청을 지나치지 못했지만, 접시에 포크를 찍으며 눈으로 불평했다. 클라이드도 그녀의 심경을 눈치챘는지 부득부득 시선을 반대편으로 고정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궁에서 거주하는 자리로 바꿔 달라고 할까 싶다가, 우리 둘 사이에 이따금 미묘하고 야릇한 분위기가 떠돌던 때를 기억하고 머리를 털었다.

입궁 시종직으로 전환하면 방을 배정받는 장점은 있지만, 분기별로 휴가를 받는다. 아예 클라이드의 궁에 살게 되기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질 것이다.

* * *

황태자의 여러 침실 중 자주 쓰지 않는 옆방이 그녀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다.

물론 빈 침대에 함부로 누울 수는 없었다. 필요한 물품 외의 다른 건 허용되지 않았다.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욕조 옆에 에디스를 시중드는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보다 까마득하게 고참인 자의 숙련된 돌봄을 받으며 몸을 정갈히 했다. 집에서는 맨날 혼자서 풍덩거리고 놀았는데 여기는 그게 어려웠다.

침의도 외출복만큼 귀티가 넘쳤다. 황태자를 모시는 시종은 허름한 면을 보이면 안 된다는 철칙을 잠들기 직전까지 지킨 덕분이었다.

머리칼을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우윳빛 윤기가 흐르도록 빗질한 다음에야 겨우 궁인들의 손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별실은 외부 출입문이 따로 있었다. 침실과 별실에 각각 문이 달리고 그 사이로 가벽이 세워진 형태였다. 하지만 별실로 직행하는 문은 잠긴 지 오래였다. 보안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수많은 근위병이 클라이드를 둘러싸고 철통 방비하는 마당에 구태여 별실 문만을 잠근 이유로는 타당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녀가 설명 들은 바로는 그랬다.

에디스는 황태자의 침실을 내 방처럼 태연히 열었다.

인기척을 내면서 들어가도 되겠냐고 여쭈는 절차를 생략했다. 원래도 그다지 내외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데다가, 오늘은 제 심사도 비틀린 참이라 단단히 개기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벌거벗은 사내의 뒷모습을.

“앗, 죄송!”

쾅, 하고 세게 문을 닫았다.

닫힌 문에 펼쳐서 짚은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잠깐 본 장면이 여전히 망막에 맺혀 있었다.

클라이드는 수건 한 장만 허리에 두르고 몽땅 헐벗은 채였다. 넓은 등은 울룩불룩한 잔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볼 건 다 본 나, 에디스야.

정말 장하구나.

재빨랐던 눈초리에 스스로 찬사를 보내며 호흡을 골랐다. 손끝에서 맥박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문에 머리를 박은 채, 급작스럽게 벌어진 불의의 사태를 한껏 만끽했다. 클라이드, 저 녀석. 한 치의 모자람 없이 로맨스 소설 주인공다운 외모라니.

벌게진 얼굴 가운데로 입매는 으흐흐 웃음소리가 샐 만큼 벌어졌다.

이건 교통사고처럼 우연이었다. 잠깐 한 장면만 보고 튀어나왔으니 딱히 못된 짓도 아니었다. 그래서 순수하게 클라이드의 뒷모습을 기억에 남길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에서 천 쪼가리 한 장 아랫도리에 걸친 인물을 보는 기분과 비슷했다.

“들어와.”

문 너머에서 클라이드의 단정한 음성이 들렸다. 이제 옷을 다 입었나 보다.

쑥스러운 헛기침과 함께 입장하며, 예의상 실례했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황태자의 체면을 운운하며 그가 크게 한 소리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문책을 당해야겠지만, 아마 그럴 리까지는 없을 거로 여겼다.

정중한 척하며 실내의 전경을 쓱 훑었다.

“앗.”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또 헛숨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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